유사역사학 사절



안정을 찾은 동아시아 (94-95) 아란타 풍설서



제 4장 - 가톨릭에서 "서양 근대"로 옮겨 간 위협


이시자키 유우시(石崎融思) 작, 《난관도 에마키 蘭館図絵巻》「데지마 수문 出島水門」
1801년,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안정을 찾은 동아시아


1681년에 청나라는 삼번의 난을 진압하였다. 1683년에는 대만의 정씨 정권이 청에 항복한다. 이에 청은 천해령(遷海令)을 해제하고, 민간 상선의 해외 도항을 허락한다. 그 결과, 1685년 이후 대량의 중국 배가 나가사키에 쇄도하여 무역량이 급증하였다. 일본에서 금은이 유출되는 것을 문제시한 막부는 1715년에 정덕신례(正德新例)를 발령하여 무역제한을 강화하였다.

1717년 청나라가 남양(南洋) 해금정책을 도입한 것을 하나의 원인으로 하여, 18세기 전반을 마지막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출범하는 정크선은 일본에 내항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로 일본에 내항한 정크선은 모두 중국 본토에서, 특히 자푸(乍浦)의 상인들이 마련한 것이다. 자푸는 상하이와 마찬가지로 장강 하류에 있는 항구 마을이다. 나가사키에 내항하는 상인은, 일본의 구리를 사들일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은 관허(官許) 상인이었다. 1757년, 청나라는 유럽 선박의 무역을 광저우(칸톤)에 한정해 허가하였다. 이로부터 칸톤 시스템이라고 불린 엄한 통제 하에서 이뤄졌다고는 하나, 활발한 무역이 행해졌다.

18세기 중엽에는 인도 아대륙의 동해안(코로만델) 지방 및 벵골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두 동인도회사가 반복적인 패권싸움을 벌였다. 1757년의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우위가 확정된다. 1759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바타비아에서 원정군을 벵골로 파견했지만,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출처: 松方冬子, オランダ風説書, (中公新書, 2010), pp. 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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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백

  • 남중생 : "아란타 풍설서" 항목 정리 2020-04-23 22:17:18 #

    ... 초안 & 원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pp. 26-31) 근세 유럽과 아시아의 소식 (79-129쪽) 가족관계까지 일러바치는 VOC (pp. 79-81) 안정을 찾은 동아시아 (pp. 94-95)혼란한 유럽 정세 (pp. 95-97) 쇄국정책과 쇄국체제는 다르다 (pp. 97-98)똑바로 서라, 카피탄! (pp. 98-100 ... more

덧글

  • Fedaykin 2020/04/22 14:06 # 답글

    저런 흐름을 보고있자면 1800년대 후반의 세계정세 변화 속도는 누구도 따라가기 힘들었을것 같네요. 미래를 알려준다고 믿을것 같지도 않고...
  • 남중생 2020/04/22 15:49 #

    어떤 의미에서는 풍설서가 러시아나 미국 선단이 찾아올 것을 미리 말해준다는 점에서 실제로 "미래"를 알려주는 정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편적인 예고만으로 큰 "세계정세"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겠지요.

    풍설서가 예보성 정보를 전해주었다는 이야기는 3인칭 관찰자 님께서 얼마 전에 번역하신 글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더군요 ㅎㅎ
    http://beholderer.egloos.com/1224249
  • 3인칭관찰자 2020/04/22 19:26 # 답글

    일본은 저 시기엔 구리 수출국 역할을 했군요. 더 비싼 금과 은이 고갈되고 유출되어 가는 걸 모두 커버하진 못했을지라도 그 손실을 어느 정도 만회하는 데는 분명 기여했겠네요.
  • 남중생 2020/04/22 21:21 #

    조선에서도 동전을 찍어내기 위해 일본에서 구리를 수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ㅎㅎ
    말씀하신대로 구리로 금은 유출을 조절하려고 했다고 읽은 기억도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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