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네덜란드 풍설서] 플라시 전투 (113-115) & 그들은 뭐든지 믿는다 (115-116) 아란타 풍설서


▲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플라시 전투

정재정 공저, 중학교 역사 ②, (지학사, 2013), pp. 156.





플라시 전투


1757년 6월, 세계사 상 유명한 플라시 전투가 서(西) 벵골에서 일어났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군대가 벵골 태수(太守)와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연합군을 격파한 것이다. 이 전투의 결과, 1765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는 벵골의 징세권(徵稅權)을 획득하고, 그것을 발판 삼아 벵골에서의 우세를 결정적으로 굳혔다. 이제껏 오로지 통상을 위해 아시아로 오던 유럽인이 본격적으로 영토를 획득했다는 점에서, 이후의 식민지 지배로 이어지는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1758년, 일본 상관장 헤르버르트 페르묄런은 통사들에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벵골산 견직물을 충분히 수입하지 못한 이유로 벵골에서의 전쟁을 들었다. 사실 회사는 이익이 오르지 않는 벵골산 생사/견직물의 대일본 수출을 중단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를 숨기고 전쟁이라는 다른 구실을 들이민 것이다.

1758년 11월 12일자로, 페르묄런은 총독 야코프 모설(Jacob Mossel)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 보고하였다.

벵골산 견직물은 막부 선물용으로도 판매용으로도 입수할 수 없었다고 일본인에게 설명했습니다. 영국인과 벵골인 사이 전란에 의해 직공들이 도망을 가, 벵골의 견직물 업계가 침묵했기 때문에, 벵골에서의 비단의 집하가 대부분 멈추고, 그 결과 충분한 양의 상품을 실어 올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설명은 현재 일본에서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타국과의 소위 통교관계 밖에 살고 있어, 네덜란드인이 하는 말을 대체로 뭐든지 믿는 일본인은, 네덜란드인의 희망사항이라면 무엇이든지 수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이야기로부터 일본인은 네덜란드인이 보기에 바람직한, 굉장한 고찰을 도출해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벵골인이 영국인으로부터 이러한 압제를 당한 것은 지나치게 많은 외국인의 입국을 허용해버렸기 때문이며, 벵골은 외국인의 지배를 받게 생겼지만, 반대로 네덜란드인과만 교류해왔더라면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리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견에 이의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일본인은 지금의 벵골 정세와, 여러 외국으로부터 재난을 불러들이지 않는 자신들의 안전한 상태를 비교하여, 그러한 상태가 네덜란인과 무역을 계속하는데 걸려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에, 그들은 이 무역제도를 유지하고자 더더욱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뭐든지 믿는다


이 서한은 2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번째. 벵골 정세에 대한 상관장의 설명은, 예상과는 다른 효과를 불러왔다. 서한 속에 "일본인"이란 아마도 나가사키의 통사(通詞)를 가리킨다고 생각되는데, 그들은 벵골인이 고난을 겪는 원인이 다수의 유럽인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네덜란드인 만을 교류 상대로 삼는 일본의 현황을, 외국과 분쟁을 막는 좋은 상태라고 생각한 것이다. "쇄국"이 일본인 자신에 의해 자각되었고, 무려 좋은 일이라고 인식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으리라. 물론 이런 인식은 네덜란드인에게 대단히 좋은 신호였다.

두번째로, 상관장이 일본인을 "소위 통교관계 밖에 살고 있어, 네덜란드인이 하는 말을 대체로 뭐든지 믿는"다고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여기서는, 일본으로 가는 해외정보의 경로를 독점하고 있다는 자신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플라시 전투의 소식이 네덜란드 풍설서에 쓰이는 일은 없었다. 다시 말해, 통사나 나가사키 부교는 이 정보를 에도에 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통사는 해당 정보가 막부 정책의 타당성을 증명한다고 인식하였으므로, 전하지 않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고는 볼 수는 없다.[1] 벵골 정세가 풍설서에 최초로 언급된 것은, 플라시 전투로부터 3년 후인 1760년이다.

네덜란드 풍설서는, 1765년에 시작한 버마 군의 시암 침입과 1767년의 아유타야 왕조의 멸망도 다루지 않는다. 18세기 초두에 일본인이 강한 흥미를 보였던 시암은, 더 이상 관심 밖의 일이 된 것이다.


출처: 松方冬子, オランダ風説書, (中公新書, 2010), pp. 11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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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시 말해, 중요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정보라고 판단해서 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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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3인칭관찰자 2020/03/07 19:47 # 답글

    100여년 뒤에 개항한 막부 말기의 일본이 유럽에 가장 많이 수출한 물품이 생사인 걸로 아는데 플라시 전투를 전후한 시기에는 아직 벵골산 생사와 견직물을 네덜란드 업자들로부터 수입해 쓰고 있었군요...
  • 남중생 2020/03/07 21:14 #

    네, 일본 생사 산업이 발달한 계기가 뭐가 있다고 들었는데...
    암튼 이 시점에서는 일본은 대중국 무역을 못하니 베트남이든 벵골이든 어디를 통해서 비단을 사들이려고 혈안이 되어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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