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네덜란드 풍설서] 사라져가는 가톨릭 세력의 공포 (110-113) 아란타 풍설서



사라져가는 가톨릭 세력의 공포


1690년에서 1715년까지는 대개 예년과 같이 시암에서 오는 소식 만을 전하는 풍설서가 작성되었다. 그 중 몇 편은 아예 "시암 풍설"이라는 제목이 달려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시암 정보에 특화된 풍설서가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이유는, 1715년의 정덕신례(正德新例)로 인해 일본에 올 수 있는 네덜란드 선박의 수가 연 2척으로 제한된 것이다. 그 때문에 1715년을 마지막으로, 시암을 경유해 나가사키로 오는 네덜란드 선박은 더 이상 없다. 이듬해부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시암 상품을 바타비아를 경유해서 일본으로 보내고, 시암 정보도 바타비아에서 보내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시암의 국내 정세나 시암에서 활동하는 가톨릭 선교사의 정보를 흘리는 일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게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1715년 시암 풍설의 내용은, 네덜란드 선박이 조난되었고, 생존한 승객은 시암에서 활동하는 가톨릭 선교사 인편으로, 결국 시암을 경유해 바타비아로 송환되었다는 것이다. 시암에서 가톨릭 선교사가 활동하는 것을 위협으로 강조하는 듯한 내용이 아니다.

이 배경에는, 스아 왕(Phra Chao Suea, 페트라짜 왕의 아들, 재위 1703-1709)의 뒤를 이은 타이사 왕(Thai Sa, 재위 1709-1733)의 치세에 들어, 시암이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의 국가와 관계를 축소한 것이 있었으리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입장에서 볼 때, 큰 대항 세력이나 비난의 대상이 시암 국내에 더 이상 없어진 것이다. 이 시기, 시암에 출범한 정크선은 시암에 대해서 어떤 정보를 전하고 있었을까? 대부분의 당풍설서(唐風說書)는 시암 정세를 두고 "고요하다(静謐)"고 하고 있다. 나라이 왕 사후에 터진 쿠데타를 1689년에 전하거나, 페트라짜 왕의 즉위를 1703년에 전하는 정도에 그친다. 가톨릭 선교단이나 프랑스 동인도 회사에 대해 언급한 흔적은 없다. 

네덜란드 풍설서를 시작했을 때, 그 최종 목적은 포르투갈, 스페인을 비롯한 가톨릭 세력을 일본과 그 근해로부터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는 막부가 키리시탄 금제(キリシタン禁制)를 시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1680년대에서 1710년대에 걸친 시암 풍설은 일본에서의 가톨릭 세력 배제라는 본래의 목적을 위해 작성된 풍설서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포르투갈인 대신 프랑스인이 주된 표적이 되었고, 당시 가톨릭 왕이 다스리던 영국인도 비난 대상에 추가되었다.

종합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가톨릭의 위협을 선전하여 일본 무역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했던 것이다. 1680년대를 경계로 중국 주변의 해역이 대체로 안정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남아시아는 아직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혼란했다. 이는 유럽의 전쟁과도 엮이는 바람에, 유럽인 간의 경쟁도 불타오른 것이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막부도 네덜란드인이 제공하는 해외 정보를 정크선으로 듣는 정보와 비교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로 인해, 대항하는 정보원의 존재가 압박으로 작용하여, 풍설서는 사실에 기반한 상당히 상세한 내용으로 되어있었다.

나가사키 부교나 통사들은 동남아시아 정세에 주목하고 있었다. 시암은 당선(唐船, 정크선) 활동 범위의 서쪽 끝이었고, 그 때문에 전통적으로 일본이 관심을 가져온 세계의 서쪽 끝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은, 그 자체로는 일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흥미를 가지더라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시암 왕국의 동정, 혹은 시암으로부터 중국으로 선교사를 들여보냈다는 정보와 조합한다면 갑자기 현실감 있는 일이 되어 막부의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한편 에도 막부는, 키리시탄이나 대외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점점 줄여가고 있었다. 당시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徳川綱吉, 재직 1680-1709)는 보통 이상으로 강한 호기심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참부한 네덜란드 상관장에게 그가 질문한 것은, "자녀는 몇 명인가?" 따의 비정치적인 것 뿐이었다. 1640-1660년대의 참부 때, 이노우에 마사시게(井上政重)나 호죠 우지나가(北条氏長)로부터 상관장이 받은 날카로운 질문과는 비교할 것이 못 된다.

나가사키 상관 소속 의사로 일본에 온 엥겔베르트 캠퍼가 츠나요시를 배알한 것은 바야흐로 1690년 경의 일이었다. 캠퍼가 묘사한 일본인이 바깥 세상에 보인 흥미는,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참고로, 캠퍼의 저서 "일본지(日本誌)"의 서문에 보면, 일본을 "닫힌 나라"라고 적은 구절이 있다. 19세기 들어 그 서문이 "쇄국론(鎖國論)"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을 때, 비로소 "쇄국"이라는 일본어가 탄생한 것이다.


출처: 松方冬子, オランダ風説書, (中公新書, 2010), pp. 1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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