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3. 도돌이표: 월인 이주 가설 [도돌이표]

Liam Kelley 교수님 블로그에서 번역합니다. 3. Going Backwards: The Yue Migration Theory입니다.
--------------------------------------------------------------------------------------------------------------------------------------------------------------------------------------------------

3. 도돌이표: 월인 이주 가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프랑스의 선교사, 군인 관료, 학자들은 모두 베트남인에 대해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 질문은 정작 베트남인들은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베트남인은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떤 민족에 속하는가? 언어는 어떤 어족에 속하는가? 등등의 질문이었다.

그때 이미 베트남인은 자국 강역의 역사에 대한 문헌을 집성해놓은 상태였으나, 그 문헌만으로는 위 질문을 명쾌히 답할 수 없었다. 반대로 이들 문헌은 서로 다른 지도자와 왕조를 엮는 정치적 계보도를 따라 그리는 것을 관건으로 삼은 문헌이었다.

베트남인이 서술한 가장 이른 시기의 역사서는 14세기(월사략)와 15세기(대월사기전서)의 문헌이다. 그러나 더 옛날에 대한 정보도 담고 있다. 1,000년 동안 중국으로부터 지배받은 시기라던가, 대월사기전서에서 이야기하는 기원전 몇 천년 동안의 시기에 대한 정보도 있다.

이들 문헌을 집성한 사람들은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었을까? 우선 옛 중국의 사료를 참고했고, 또 기원전 1 ,2천년에 대한 정보를 작성할 때는 15세기 베트남 사회의 상류층이 만들어낸 이야기에서 나온 정보도 쓰였다. 


프랑스 학자들이 보기에, 15세기 대월사기전서에 나와있는 고대사 관련 정보는 당황스러웠다. 예를 들자면, 중국 전설 속의 군주 신농(神農)으로부터 뻗어나와 고대 홍하강 삼각주 지역의 집권층에게로 이어지는 정치적 계보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사료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었다.

그렇다면 대월사기전서의 기록이 정확한 것일까? 만약에 부정확하다면, 이 정보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리고 베트남인은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베트남사를 최초로 연구한 프랑스 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다. 또한 다른 주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뇌리에도 이런 사안들이 맴돌고 있었다. 예컨대 사마천의 1세기 역사서, 사기(史記)를 20세기 초에 번역한 에두아르 샤반느(Edouard Chavannes)도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기를 번역하던 샤반느는 "월(越)"이라는 표현이 절강성에서 베트남 북부까지 이어지는 넓은 지역 상의 서로 다른 인구집단과 정치집단과 연관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보았다. 또한 복건과 광서(i.e. 동구東嫗와 서구西)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지역의 인구집단과 정치체를 가리키는데도 "구()"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샤반느는 번역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이들 용어의 유사성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들이 동일한 인구집단에 연관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한 인구 집단이 절강성 지역에서 베트남 북부까지 점진적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1901년에 에두아르 샤반느가 최초로 제시하였고, 레오나르 오루소가 1923년에 더욱 발전시켰다. 오늘날 이 이론은 "월인 이주 가설"이라고 부르는데, 역사학계에서는 더 이상 이 이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1983년, 역사학자 키스 테일러는 "베트남의 탄생(The Birth of Vietnam)"에서 부록 한 장을 통틀어 "베트남인의 유래가 월인 이주 집단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레오나르 오루소의 얼마 가지 못한 이론"을 다룬다. (314)

이 부록에서 테일러는 "권력 승계에 실패한 집권 계층"의 일부가 홍하 삼각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아래의 피지배층 사람들도 함께 이주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않는다. (315)

다시 말해, 테일러는 오루소가 주장한 바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오루소의 학문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루소의 학문과 방법론은 손쉽게 반박할 수 있다.


월인을 언급한 옛 중국 사료에 대해 에리카 브린들리가 펼친 논의를 다룬 이 포스팅에서 지적하였듯이, 오루소가 인용한 정보를 통해 상류층의 이동이라도 있었는지 입증하기란 불가능하다.

한편, 필자 본인이 (오루소가 따른) 샤반느의 방법론을 검토한 결과, 샤반느가 얼마나 사료 상의 연결고리를 짜맞추었거나 만들어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면, 기원전 1, 2천년기에 오늘날 중국 남부와 홍하 삼각주 지역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남북"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고고학자들이 밝혀내었다.


고고학자 주디스 카메론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남부 중국에서 최초로 발명된 방추(紡錘)가 베트남 북부의 기원전 2천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으며 유사하게 북쪽에서 유래한 수놓은 직물 또한 기원전 1천년기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고고학자 남 낌(Nam Kim)도 기원전 1천년기의 꼬 로아(Cổ Loa) 성터에서 발굴 작업을 한 결과, 북부에서 유래한 (기와 등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그렇다는 것은 접촉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동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게다가 카메론은 저서에서 "레온오나르 오루소 학설의 재검토: 역사와 고고학의 접합"이라고 제목붙인 장을 통해 고고학적 증거가 오루소의 월인 이주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인정한 바 있다. 

카메론이 내린 결론은 이들 증거가 단순히 "베트남 정치체의 유래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고 할 뿐이다. (228)


그러니 역사학계와 고고학계는 레오나르 오루소의 월인 이주 가설을 이미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벤 키어넌의 신간 "베트남 통사"에서 화려한 복귀를 하였였다. 이번에는 오히려 더욱 강력해진 것이, 키어넌은 홍하 삼각주의 북방 방추라는 카메론의 근거를 이용해 두 차례의 월인 이주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 기원전 2천년기부터 월강 평야를 찾아온 월인 이주 세력은 그들만의 특징적인 방추를 가져온 결과, 월강 평야의 풍 응우옌 유적지에서는 해당 방추가 발굴된다."

"중국어 문헌은 기원전 1천년기 후반에 중화 제국의 정복을 피해온 월인 망명 세력이 오늘날 중국 남부로 다시 한 번 이주하였고, 이번에는 '월'이라는 단어를 남쪽으로 끌고 가게 되었다... 시간이 흐른 뒤, 중국 동남부와 베트남 북부의 원주민이 남월국의 새로운 백성이자 이웃 민족이 되면서 망명세력의 종족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47)


키어넌에 따르면, 이 이주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이 두 지역의 사람들은 동일한 문화권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이 문화권은 다른 지역의 고대에서 처럼, 민족성이나 언어의 종속성마저도 유동적이었다." (47)

이 "동일한 문화권"에 대한 근거로 키어넌은 오늘날 절강성에 위치한 기원전 5세기 월나라와 고대의 홍하 삼각주 지역 세계 사이의 유사성을 언급한다. [준비하시라.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월나라의 강역은 락 비엣과 많은 유사성을 공유했다. 중국의 한 기록에 따르면, 월나라 왕 구천(勾践, 기원전 496-465 통치)은 '동해 바닷가에 위치한 나라에 살면서 몸에 문신을 한 오랑캐를 다스렸다.'고 한다." 

"3세기 중국 문헌을 보면, 구천의 치세 중에 월나라에 농경을 도입한 대부종(大夫種)이라는 인물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인물의 역할은 베트남을 건국한 신화 속 "수달 용의 군주" 락룡군을 닮았다. '월나라 왕을 위해, 대부종은 들판을 개간하고 도시들을 세웠다. 땅을 넓히고 씨를 뿌려 수확하였다.'"

"이처럼 기원전 5세기 초에 일어난 사건은 이후 월인 망명 세력과 함께 남쪽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중국 세력이 월인들을 (주로 해로를 경유했겠지만, 육로도 통해) 락의 땅으로 피난하게끔 밀어냈을 것이다. 여기서 락인의 농경 설화는 바다에서 온 '수달 용의 군주'에 대한 유사한 지역 전승과 혼합되었다." (48-49)


와우!

그렇다면 이제 위 인용문을 살펴보도록 하자.

키어넌의 책에 "Tai-fu Chung"이라고 표기한 "대부종(大夫種)"은 기원전 5세기 월나라에서 대부 벼슬을 한 문종(文種)이라는 사람이다. 

문종은 원래 내륙의 초나라 출신이고, 바다나 "수달 용의 군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또한 문종은 월나라에 농경을 도입하지 않았다. 월나라는 문종이 벼슬하러 오기 전부터 오래도록 있어왔고, 월나라 백성은 바로 그 초창기부터 수렵채집을 일삼지는 않았으리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미 그 당시에도 수천년간 벼농사를 해온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문종이 들판을 개간했다는 구절은 월나라가 이웃하는 오나라에게 전쟁에서 패한 다음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문종은 농경을 "도입"하려던 것이 아니라, 월나라의 기간을 "재건"하고 "확장"하려 했던 것이다.

키어넌이 인용한 구절 다음에 나오는 문장을 보면 문종이 군과 백성을 이끌어 월나라의 패권을 (재)성립하고자 하였다.

大夫種為越王墾草耕邑,必地殖谷,率四方士,上下之力,以禽近吳,成霸功。


리고 마침내, 지난 글에서도 보았듯이 락룡군은 "신화 속" 인물이 아니다. 기원후 15세기 상류층 문인 문화에서 창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문학적 창조물은 수달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비록 기원전 1천년기 양자강 이남 지역에 문화적 공통성이 있었다는 것이 아주 일반적인 단계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수많은 차이점도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으로는 언어적 차이가 있었다.

몇몇 고고학적 근거에 따르면 1,2천년기 동안 양자강 이남 지역과 홍하 삼각주 지역 사이의 남북 교류를 볼 수 있지만, 대대적인 이주가 일어났다는 근거는 없다.

그리고 "바다에서 온 수달 용의 군주가 농경을 도입"한 것을 기리는 공통 문화 전통에 대한 근거는 단연코, 단연코, 단연코 없다. 사실, 그러한 전통이 어디에서도 존재했다는 근거조차 없다. 
============================================================================================================



덧글

  • 김대중협정 개정 2019/09/03 12:59 # 답글

    원숭이는 네 발로 걸어다니죠. 두 발로 걸을 수도 있지만 두 발로 걷기 불편한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죠. 원숭이의 특성은 네 발로 걸어다니는 것입니다. 사람도 네 발로 걸어다닐 수 있지만 사람의 특성은 두 발로 걷는 것이죠.
    http://qindex.info/i.php?f=6913
  • 남중생 2019/09/03 13:10 #

    음... 글쎄요.
    어떻게든 최신글에 답글을 달아서 자기 존재감을 비벼보는게 특성이라고 말하는거네요...
    그것보단 그래도 한 주제에 대해 집요하게나마 논의를 통해 해답을 보려는게 특성이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떳떳했을텐데 말이죠.

    차단 드립니다.
  • 김대중협정 개정 2019/09/03 13:01 # 답글

    공산주의의 몰락과 단군릉
    http://qindex.info/i.php?f=2336#1316
    혹시 먼산족이 오면 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