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일본이 들은 아편전쟁의 소식 (2) - 아파르트 늬우스를 작성하라. (146-148) 아란타 풍설서

마츠카타 후유코 선생님의 "네덜란드 풍설서"를 발췌/번역합니다.

앞서 번역한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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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의 결정

야스오카 아키오(安岡昭男) 씨는 일본어 사본(和文写本, 당시의 통사通事에 의한 번역)을 기반으로 별단풍설서(別段風說書)의 개요를 소개하였다. 야스오카 씨의 연구는, "통상적" 풍설서와 별단풍설서를 구분해 다룬 점에서 획기적이다.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를 장단점으로밖에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니 여기서는 네덜란드어 사료를 이용하여 둘 사이의 차이를 명확히 해보이겠다. 

1840년 5월 26일,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은, 대일무역을 총합적으로 재검토하는 듯한 결정을 내렸다. 그 중에, 다음의 1개 조항이 있다.

금년의 일본행 선박이 출범하기까지, 칸톤, 싱가포르, 그 외의 지방의 정기 간행물을 수집시켜, 중국의 아편 문제가 불러일으킨 여러 사건에 관한 포괄적이되 일본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한 보고를, 상관장의 이용에 제공하기 위해 송부할 것을 식민국 장관(植民局長官)에게 명한다. 송부할 때에는, 같은 상관장이 별단풍설서[Apart Nieuws]라는 이름으로 일본 당국에 그 보고를 통지할 것, 또한 그 통지는 배가 도착한 뒤 바로 통상적 풍설서의 제공과 함께 서면의 형태로 행할 것, 이라는 [식민국 장관으로부터 상관장에게 부치는] 명령을 첨부할 것을 식민국 장관에게 지시한다.

이 결정에서 눈을 끄는 것은, "정부 내에서" 해외 정보를 기록해 "서면으로" 작성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상적" 풍설서는 나가사키 데지마에서 작성되는 것으로 바타비아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결정, 결의에 기반해, 바타비아에서 작성된 서면이 일본으로 보내졌다는 것이, 별단풍설서가 "통상적" 풍설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보를 "벌단풍설서"라고 부르라는 것까지 정부가 내린 명령인 것이다.[1] 더욱이, 네덜란드어의 Apart에는 "별도의"와 "특별한" 이라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별단풍설서가 성립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정부가 직접 정보를 선택할 것을 결정한 것도 중요하다.

이 결정이 이뤄진 과정을 직접 보여주는 사료는 없으나, 동인도 정부가 아편전쟁을 막부에게 정확히 전달할 만한 사건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2] 상관장이나 통사 레벨에서 일어나는 정보 조작을 배제하기 위함이라는 측면도 있었으리라. 식민국은 정부 내에서 일본무역을 담당하는 부서였기 때문에, 이 일을 위탁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식민국 장관 휘하에서 작성된 최초의 별단풍설서는, 1840년 7월에 바타비아를 출범한 코르넬리아 엔 헨리엣테 호에 실려 나가사키로 전달되었다. 

출처: 松方冬子, オランダ風説書, (中公新書, 2010), pp. 146-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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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상적 풍설서에는 네덜란드 측에서 부르는 이름이 없었다는 것이 마츠카타 선생님의 주장.

"풍설서에는, 원래 네덜란드어 문서가 있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측에는 "풍설서"에 해당하는 특정한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식(nieuws)' 따위의 몇몇 일반적인 용어가 쓰였다. 그렇다는 것은, 네덜란드 측에는 특별한 문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닐까?"

[2] 프랑스 혁명 같은 경우에는 당시 네덜란드 측에서도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마츠카타 선생님은 주장하신다.

"일반적으로, 머나먼 유럽의 소식이더라도 1년 후에는 풍설서에 언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의 보고는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에서 5년 가까이 걸렸다. (...)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것은 1793년이었는데, 네덜란드인도 그때까지는 보고할 만한 대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근대적인 의미의 '혁명'이라는 말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그곳에서 일어난 일의 의미 같은 것을 충분히 파악했을리도 없기 때문이다."
에도 막부가 보고받은 프랑스 혁명 (12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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