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그런 논문이 아닙니다 2부: 더 멀리 떠내려가는 문헌 표류 현상 창작물의 원형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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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논문이 아닙니다 2부

지난 글(1부)에 PKKA님께서 달아주신 링크를 따라가 역개루 카페에서 이완범 교수의 글을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상당한 당혹스러움을 느꼈는데요... 시사저널 기사와 마찬가지로 고시로의 논문을 잘못 이해한 부분이 보여서 그랬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사저널의 기사와 너무 닮아있는 모습도 보였고요. 

이 당혹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추가 포스팅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래 본문에서 제가 들여쓰기로 인용한 부분은 이완범 교수가 저서 원고의 일부라고 올린 내용입니다. 그중 빨간색 표시는 시사저널 기사에서 쓴 표현과 글자그대로 동일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밑줄 친 부분은 고시로의 주장이 아닌 것을 고시로의 주장이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글 전체를 낱낱이 분석하기는 싫고, 제일 처음 세 문단만 보겠습니다.


③'일본의 미국 견제를 위한 소련초청설'

재미 일본인 학자 고시로 유키코(小代有希子)는 '일본의 미국 견제를 위한 소련초청설'을 구체화했다. 그녀의 해석은 1945년 3월 13일 일본 해군성 교육국장 다카키 소키치(高木憁吉) 소장이 작성한 "中間報告案"에 의거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동북아 지역에서 일본이 누렸던 기득권을 송두리째 미국에 넘겨줘 미국이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소련을 끌어들어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문건은 항복 선언에 즈음한 일본의 '이중 플레이' 원칙을 제시했다. 다카키는 패전 후 일본의 재기를 위한 일종의 '보험'으로 소련과의 제휴를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보험의 내용인즉, 그때까지 일본이 관할하고 있던 사할린 남부 지역 등을 미국에 넘기지 않고 소련에 넘긴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추후 동아시아 질서에서 미・소가 양립하는 세력 균형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건의서는 한반도와 타이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 유지를 주장하므로 1) 38선을 획정해 넘겨주자는 생각이 나와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전쟁이 극히 불리해지면서 한반도 지배권 유지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발생하자 다카키의 안은 소련을 만주와 한반도에 끌여들여 미국을 견제하는 안으로 변형되었다. 포츠담 선언 당시 이미 패전을 받아들였어야 했던 일본은 소련의 한반도 진압을 기다리느라 항복을 늦췄으며 결국 1945년 8월 9일 참전한 소련에 대해 일본은 소극적으로 대응하여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에 쉽게 진공할 수 있었다. 소련은 계속 남하하여 이 지역을 독점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은 38선을 획정했다는 것이다.

밑줄: 한반도로 끌어들이는 안으로 변형되었다는 언급은 고시로의 논문에 없습니다. 왜 없는 말이 삽입되었을까요? 시사저널의 엉성한 논리 공백을 메꾸려다보니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카기도 한반도와 대만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전략가들도 다 그렇게 주장했다는데, 어느 시점에서는 계획이 변경되어야 일본의 계략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니까요... 


고시로의 해석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대본영은 소련이 만주로 남하할 것을 예상했음에도 이를 막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못했고] 그 결과 소련의 남하와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사이에 38선 합의가 만들어지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당시 만주 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소련의 침공 루트로 이동시키지 않는 등 소극적으로 대응했으므로 교전 당사국인 소련조차도 의아심이 들 정도였다고 고시로는 주장했다. 강대국끼리는 서로 견제하고 한반도는 분할되는 것이 자신들에게는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 일본 군부는 필사적으로 노력했다는 해석이다. 그렇지만 고시로는 일본이 직접 38선을 그었다는 물증을 제시하고 있지않다. 2) 따라서 이는 하나의 배경을 설명하는 가설일 뿐이다. 최대한도로 확대 해석하더라도 일본이 38선 분할을 유도했다는 것에 불과하다. 다카키 소장의 입장이 구체적으로 정책에 반영된 과정을 설명하는 증거도 없으며 단지 추정일 뿐이다. 

밑줄1: 고시로는 소련군을 저지할 능력이 일본군에게는 없었다고 분명히 이야기한다. 
"Although Japan's new military planning for Korea ostensibly aimed to coordinate a two-front attack, the Japanese army had no resources or objectives for fighting the United States in southern Korea and the Soviet Union in northern Korea. By late February 1945, based on intelligence reports from Europe and the Soviet border, the Japanese army confirmed that the Soviet army had already sped up procurement of troops and ammunition for the Soviet Far East, but added that the Kwantung Army could in no way stop the Soviets. 85)" 
(Koshiro, 441)

밑줄2: 고시로는 그런 해석을 내리지 않는다. 1945년이 되어서야 소련이 한반도 북부까지 진격해 들어오리라는 예상은 하지만, 일본 측의 희망사항은 (친영미파 평화주의도) 일관되게 한반도를 포함한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일본은 천연자원이 없으니, 전후 재건을 하려면 식민지라도 있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다카키 소장은 일본 '제국 해군'의 지도적 전략가로 활약했으며, 1939년께부터 일본의 세계 전략으로 추축국(독일・이탈리아・일본)과 소련을 묶어, 영・미 동맹에 대항하는 방안을 입안해 추진했던 인물이다. 그는 1943년 이후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전쟁 조기 종결을 주장하며 적어도 겉으로는 '친영・미파 부전론자'로 행세했으나 뒤로는 패전 이후 예상되는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을 약화하기 위해 소련과 손잡는 전략을 비밀리에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항복의 조건을 내세울 형편이 못될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해서 만주를 포함한 조선의 이북을 관동군 지휘 하에 두어 소련의 공격에 대비했으며, 38도선 이남은 대본영 직할 제17방면군 지휘 하에 미군의 상륙에 대비하도록 했다고 고시로는 지적했다. 일본이 패전 마지막 순간까지 '대동아 공영권'의 훗날을 기약하며 조선반도 분할을 상정하고 이를 위해서 기민하게 움직였다는 것이다. 3)

밑줄: 관동군과 제17방면군이 38도를 경계로 관할 구역을 분할했다는 이야기는 고시로의 논문에 나오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처음의 세 문단입니다. 
그럼 뒤로 넘어가 이완범 교수가 고시로의 주장에 대해 내린 결론을 보지요.

또한 소련이 화평조약의 중재자로 나서는 상황을 희망해서 소련을 자극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미국이 제안한 포츠담 선언 수락 요구를 지연시켜 세력균형을 결과했는데 이는 소련참전을 의도적으로 초대한 것이 아니라 소련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에 최후까지 기대했던 것이며, 소련참전으로 이 기대가 꺾이게 되자 거의 즉각적으로 항복한 것이다.

아뇨... 고시로 논문의 2번째 페이지에는 아래와 같이 써있습니다.

"일본 군대와 일본 정부는 미국과의 평화를 중재하는데 소련이 도움을 건네리라고 희망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고 비판받아왔다. 그러나 소련을 향한 이와 같은 비방은 일본이 취한 대소련 전략의 복합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1941년 이래 일본의 군 지도자, 외교 관료, 학자, 국제 언론인 등이 보관해오던 잘 알려져있지 않고 인용도가 낮은 문서군이 있는데, 이를 보면 일본 측은 미국과 평화를 체결하는데 소련이 중재 역할을 해주리라는 희망을 조금도 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t was the Soviet Union that gave Japan strategic versatility in exiting the world war. The Soviet entry into the war during its last phase is portrayed simply as a betrayal to Japan in light of the Neutrality Pact. Conversely, the Imperial Japanese Army and government have been criticized for wasting time in hoping for the Soviets to help broker peace with the United States. Such vilification of the Soviet Union, however, has obfuscated a complex strategy Japan adopted toward the Soviets. A body of little-known and rarely used documents, kept since 1941 by Japanese military leaders, diplomatic officials, and scholars and journalists of international relations, reveals that these Japanese did not adhere to any hopes for Moscow to mediate peace with the United States. 4)
(Koshiro, 418)


그러니까 고시로의 논문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시사저널이 고시로의 논문을 곡해해서 세운 음모론을 고시로의 논문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비판한 것이지요.

할 말이 많지만 굳이 하지 않겠습니다.
학계 분들, 취미가 분들에게 생산적인 자극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중간보고안을 작성한 사람의 이름은 "다카키"가 아니라, "다카기(Takagi)"입니다. 고시로도 논문에서 Takagi라고 쓰고 있고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요?

음모론의 근원이 시사저널의 기사였던걸 감안할 때, 잘은 모르겠지만 다카키만 보면 미워하고 싶어하는 마음부터 잘못된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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