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베트남의 한풍은 캄보디아 문화를 도용한걸까? [캄보디아 병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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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베트남에서 말한 한풍(漢風)은 캄보디아 문화를 도용한걸까?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관찬 역사서, 대남식록전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난민 선단이 1682년, 베트남을 거쳐 (당시에는 캄보디아 땅이었던) 사이공에 정착했다는 내용입니다.

"노는 땅을 개척하고, 시장(鋪舍)을 세우니, 청나라(淸人) 및 서양, 일본, 자바 등 여러 나라의 상선이 모여들었다. 이로부터 한풍(漢風)이 사이공(東浦)에 조금씩 젖어든 것이다." (대남식록)

闢間地、構鋪舍、淸人及西洋、日本、闍(門+巴)、 諸國、商船溱集。由是、漢風漸漬、于東浦矣。

조금 앞선 시기에 펀찬된 사이공(가정성) 지방지, 가정성통지에는 같은 내용을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땅을 열어 황무지를 개척하고, 점포와 시장(庯市)을 세워서, 장사하고 교통하니, 당인(唐人), 일본, 자바(闍婆)의 선박이 모여들었다. 중국(中國) 화풍(華風)이 이미 사이공(東浦)에 조금씩 젖어들어 울창해진 것이다." (가정성통지)

闢地開荒、構立庯市、商賣交通、唐人、西洋、日本, 闍婆 商舶溱集。中國華風、已漸漬、蔚然暢然、于東浦矣。

두 사료에 대해서 놀라 쿡 교수님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해당 사건을 언급하는 대남식록전편(大南寔錄前篇)의 기사는 1830년대가 되어서야 집성되었고, 그 내용은 현지의 고관 정회덕(鄭懷德)이 1810년대에 집성한 가정성통지(嘉定城通志)에 실린 내용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가정성통지가 원출처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내력을 보건대 19세기 당시 베트남 측에는 중국 선단이 찾아온 것에 대한 공식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놀라 쿡, pp. 24) 

그러니까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사이공에는 개발이 이뤄지고 교역이 활발해졌으며, 응우옌 조정에서는 이것을 "한풍(漢風)"이 젖어든 모습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이 현상을 캄보디아의 시각에서 보면 어떨까요?




이번에도 "개정판 동남아시아사 - 전통시대"의 힘을 빌리자면, 캄보디아 지역은 전부터 여러 국가와의 교역량이 늘고 있었다고 합니다.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근거지로 삼기 시작한 1511년부터 서양인이 동남아시아 각지에 나타나면서 일어난 변화 중 하나는 신무기, 특히 총이 전쟁에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총이 소개되면서 국가 내에서의 통합이 촉진되었고 국가 간의 전쟁에서 결정적 우열이 판가름나곤 했다. 얼마나 많은, 그리고 좋은 총을 사들여 그것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가가 전쟁의 승패에 관건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는 것도 태국이 캄보디아에 앞섰는지, 이 세기에 아유타야는 캄보디아를 제압했다. 아유타야는 1592년 캄보디아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1594년에 캄보디아 수도(당시는 프놈펜 북부의 로벡)가 점령되었다.

이때부터 서양인의 캄보디아 관련 기록이 갑자기 늘어났다. 교역상이 많이 왕래하였던 수도에는 외국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프놈펜과 로벡, 그리고 이 시기 새로운 수도가 되는 프놈펜 북부의 우동(Udong)에는 중국인, 일본인, 아랍인, 스페인인, 포르투갈인은 물론 말레이인, 참인 등이 거주하는 지역이 따로 있었다. 그들이 캄보디아에서 사들였던 것은 금, 은, 보석, 비단, 목면, 향, 라카, 상아, 쌀, 과일, 코끼리, 코뿔소 뿔 등이었다. (Chandler 2008: 102-103).

(...)

교역은 17세기에도 계속 발전해서, "17세기 초 캄보디아는 해상 교역 국가가 되었다"(Chandler 2008: 105)고 평가될 정도였다. 그러나 해외 교역상 입장에서 보자면 해안에서 한참 떨어진 프놈펜이나 우동 또는 로벡까지의 여행이 그렇게 기꺼울 리는 없었다. 호이안, 아유타야에 비해 이들 캄보디아 중심지는 내륙으로 훨씬 더 많이 들어가 있다. 교역이 발전한 곳은 이러한 정치 중심지가 아니라 비교적 해안에 가까우며 메콩에 연한 도시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조건을 가지고 있던 도시 중 하나가 사이공이다.

그런데 사이공은 17세기 후반에 베트남 차지가 된다. 캄보디아에는 불행하게도 해상 교역 국가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띠게 되는 세기에 그동안 남진을 거듭하던 베트남이 메콩 델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아유타야를 만나 서쪽이 봉쇄되자 남쪽으로 정치 중심지가 이동하면서 대외 교역을 발전시키려던 캄보디아였지만 이번에는 동남쪽으로부터 베트남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캄보디아는 강대국 사이에 끼인 모양새가 되었다. 캄보디아 내부의 권력 다툼이 양국에 의지하여 전개되었고 세력 균형을 위해 두 명의 왕이 서는 경우도 생겨났다. (최병욱, pp. 212- 213)

그리고 사이공이 베트남 영토로 넘어간 뒤에도 캄보디아는 꾸준히 교역 국가로 성장해나갑니다. 캄보디아와 차별화된 베트남 고유의 "한풍" 때문에 이러한 발전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걸 알 수 있지요. 

주요 대외 교역로였던 메콩 강이 베트남인에 의해 봉쇄되기는 했지만 캄보디아는 결코 죽은 땅이 아니었다. 아직도 중국인들이 부지런히 캄보디아와 외국을 연결하며 무역을 하고 있었고, 19세기 중엽 중국 대륙을 빠져나온 이주민들의 목적지 중에 캄보디아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 메콩을 통한 왕래는 힘들어졌지만 대신 서남부 해안 지대 깜뽓(Kampot)으로 서양배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메콩 델타의 새 주인이 된 베트남인의 왕래도 잦았다. 특히 베트남 남부의 개간에 많이 소요되었던 물소는 대부분 캄보디아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메콩을 따라서만 아니라 사이공 북서부의 떠이닌 지역을 통한 육로 무역도 성했다. 챈들러는 경제 활동에서 보이는 민족적 다양성도 주목하고 있다. 국내외 교역과 채소 재배 같은 것은 중국인이나 중국인 후손에 의해서 통제되었고가축 교역, 직조, 어업 등은 말레이 반도 쪽으로부터 이주해 온 말레이인, 참파에서 이주해 온 참인의 활동이 돋보였다고 한다. 아울러 16, 17세기부터 살아온 포르투갈인 후손들은 통역 업무나 포대(砲隊) 운영을 맡고 있었다(Chandler 2008: 120-121). (최병욱, pp. 217-218)

그렇다면 베트남 사료에서 "한풍이 젖어들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현상은 캄보디아(혹은 16세기 말에 캄보디아를 정복한 태국?)의 영향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군요. 사이공과 메콩강 유역은 명나라 유민과 베트남 이주민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주요 교역항으로 쓰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놀라 쿡 교수님께서 추정하시듯이, "19세기 당시 베트남 측에는 중국 선단이 찾아온 것에 대한 공식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대남식록의 집필진에게는 명나라 유민의 이주와 교역항 사이공의 발전 사이의 선후관계가 모호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9세기 당시 사이공의 모습이 "한풍"과 어긋나는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19세기 베트남인은 어떻게 가정성(사이공)이 태국과 캄보디아를 통해 국제 무역항이 된 모습을 "한풍"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걸까요?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한풍"이 더 이상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특정 지역/국가의 문화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보편 문명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개척, 개발, 국제화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국적과 무관하게 한풍은 한풍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세계를 볼 때, 국적과 무관하게 문명 활동이 일어나는 것을 문명이라고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할리우드가 아니라 볼리우드 영화가 세계로 진출하더라도 "세계화"라고 부르고, 싱가포르가 스마트화/디지털화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요.

정회덕이 "중국" 화풍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화풍은 이미 세계 보편적인 "문명"을 뜻하는 단어였고, 그랬기 때문에 그는 중국 문명이 중국 유민을 통해 사이공에 퍼졌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중국계 베트남인이었던 본인이 가정성으로 발령받았다는 것에서 과거와의 연속성을 발견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19세기에 이미 화풍 또는 한풍은 세계 보편적인 개념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중국 화풍"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한풍 개념이 어디까지 확장되어서 쓰였는지는 아직 확실한 범위를 못 잡겠지만, 서양 한풍이나 천축 한풍 같은 개념을 상상해보는 것 만으로도 즐겁네요.


1971년에 "베트남과 중국식 모델: 19세기 전반 응우옌 왕조와 청 왕조의 통치 방식 비교 연구"라는 책을 낸 알렉산더 우드사이드는 이제 더 이상 동남아시아 베트남에 덧씌워진 "중국식 모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대신 "국제화를 겪은 국가(internationalized states)"와 "국가 간 문화 전파(transnational transmissions)"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런 시각을 1592년 이후 동아시아의 모든 영역에 적용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592년, 아유타야는 총을 들고 캄보디아를 공격하기 시작하고, 일본은 총을 들고 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화약 무기는 중국에서 발명되었지만, 유럽에서 더욱 개량되는 과정을 거친 뒤 아시아의 변방이었던 국가들을 강력하게 만들었고, 해당 지역의 역학관계를 뒤바꿔놓았습니다. 그리하여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에도 "한풍"이 서서히 물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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