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사이공을 물들인 한풍: 베트남의 대안적 중화관에 대해서 [캄보디아 병탄기]




사이공에는 어떻게 해서 한풍이 물들었나?


제가 앞서 19세기 베트남에서 한족(漢)이 된다는 것이라는 글을 썼는데, 너무 산만하게 쓰기도 했고 길이 글어져서 요약본을 다시 작성해봅니다. 제가 원래 하려던 말은 그러니까,

19세기 동아시아 국가가 "한풍(漢風)"을 실천한다는 것은 나라의 문을 걸어잠그고 서양과 통상을 배척하는 길 뿐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19세기 동아시아를 보고 있자면, 넓은 세계와 소통하는 것을 가능한 한 미루고 미루다 결국 외세에 의해 강압적으로 개통당해서 하응~!! 하는 시나리오가 공통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양이(洋夷)와 소통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라면서 강경한 쇄국 정책을 펼치는 것이 당시로서는"한풍"과 "중화"를 지키는 길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실제 역사가 흘러간 방향 때문에 우리가 "한풍"이나 "중화"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방향도 제한되어왔을지도요...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초반 베트남은 아시아 국가의 "중화관"에 대안적인 방향성을 제시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베트남에서 말하는 한풍은 위에서 언급한 한풍과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의 한풍은 사이공과 같은 변방 지역을 묘사하는데 자주 쓰이는데, 원래 오랑캐 땅이었던 곳이 한풍에 물들었다는 서술이지요.


그렇다면 베트남의 사이공은 어떻게 한풍에 물들었는가? 한번 살펴볼까요?

17세기까지만 해도 사이공은 크메르 "오랑캐"의 땅이었습니다. 경작하지 않고 내버려둔 토지가 많았고, 사람들은 오랑캐 풍습을 그대로 유지했죠. 자연상태를 개발해서 인간의 편의를 위해 쓰고 있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초 베트남 지식인은 그것을 바로 "오랑캐"라고 정의했지요.

17세기 후반까지도 이랬던 사이공이지만, 명나라의 유민과 베트남 이주민이 자리 잡고 나서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노는 땅을 개척했고, 시장(鋪舍)을 세우니, 청나라(淸人) 및 서양, 일본, 자바 등 여러 나라의 상선이 모여들었다. 이렇게 해서 한풍이 사이공(東浦)에 조금씩 젖어든 것이다.
(대남식록)

闢間地、構鋪舍、淸人及西洋、日本、闍(門+巴)、 諸國、商船溱集。由是、漢風漸漬、于東浦矣。



그렇다면 사이공에 물든 "한풍"은 무엇이었을까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관"에 따라 "조공 무역"에 참여하고 "상고 시대"를 우러러보는 것이었을까요?

즉, 리암 켈리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듯, "고대 중화 세계의 문화적 중심을 살아간 식자층의 문화 세계"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재하는 중화제국이 아니라, "청나라(淸人)" 상인들을 포함해 세계 각국의 선박이 사이공 무역항에 찾아왔고, 이로부터 (由是) 한풍이 물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반대로, 베트남이 새로운 중화제국이고 이들 국가가 베트남에 조공을 바쳐야 한다는 뜻일까요? 이것 역시 아닙니다. 19세기 베트남인에게 "한풍"이란 청나라를 포함한 여러 외국과의 교역(그리고 어쩌면 황무지 개척과 같은 문명 행위)을 통해 서서히 물드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19세기 전반 베트남의 "대안적 중화관"을 살펴보는 것은 동아시아 근대사를 이해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중국에는 3천년 묵은 "천하(Tian-Xia)" 시스템이 있어서 중국과 외교를 할 때는 그걸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서구권 학자들과 중국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 "천하관"이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면서, 중국과 비슷한 나라일수록 국가 등급이 높고 중국과 다를 수록 등급이 낮은 "오랑캐"가 되는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런 중국 학자들은 어용학자, 서구권 학자들은 "시진핑의 편리한 바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3천년 동안 변하지 않은 전통 세계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동양은 수백 수천년이 지나도 제자리라고 말하는 인종차별에 불과합니다.

저는 베트남의 사례를 들면서 이런 주장을 반박하겠습니다. 베트남의 "한풍"은 크메르 이적의 땅을 교화시켜 "세계"와 통상하게 하는 것이었지, 중국에 조공 바치는게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 대안적 중화관은 베트남사를 이해하는데에도 중요합니다. 19세기 베트남이 조공을 바치는 대상이 청 제국에서 프랑스 제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역사적 연속성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것도 마찬가지로 얄팍한 인종차별입니다. 베트남이 청의 조공국이기 시작한 17세기부터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령 및 식민지가 된 19세기 후반 사이에 바로 이 "사이공에 물든 한풍" 담론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17세기까지 크메르 이적의 땅이었던 사이공 및 메콩강 삼각주는 점차 한풍(漢風)에 물들어 19세기 초에는 알아주는 국제 교역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편 문명의 실천, 자연상태의 개발이라는 뜻으로 쓰인 "한풍(漢風)". 

응우옌 왕조 시대 베트남에 이 "대안적 중화관"이 정착됨에 따라 중국인은 청인(淸人)이라는 국적(nationality)이나 당인(唐人)이라는 민족성(ethnicity)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반대로 한(漢), 화(華), 하(夏)는 (만주족과 대비되는 한족을 의미하는 등의 예외를 제외하고) 보편 문명의 의미를 띄었지요.

이와 결을 같이 하는 현상은 에도시대 일본과 (늦게나마) 조선에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 19세기 초반 베트남의 중화관은 괄목할 만한 대표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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