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19세기 베트남에서 한족(漢)이 된다는 것 [캄보디아 병탄기]


19세기 베트남에서 한족(漢)이 된다는 것


혼밥왕 가륭제 포스팅에서 켈리 교수님께서는 19세기 베트남에서 "한족(漢)"이라는 명칭은 민족집단이 아니라 문화집단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여기서 "한족"은 민족집단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문화집단을 일컫는 것이었다. 한족 문화집단은 자신과 다른 문화집단(만주족)이 한족 문화의 세계에 침입했을 때 자기정체성을 수호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한족 문화집단은 오늘날 중국이라고 불리는 지역에서는 오랑캐에게 지배당했지만, 위 인용문이 가리키듯이 19세기에도 한족 문화집단은 여전히 번성했으며 사람들은 오늘날 베트남이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한족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한족(漢)"이라는 개념을 근대적 개념인 "문명(civilization)"과 동일시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베트남의 캄보디아 병탄기를 재고하다 (2): 둔전과 베트남화에서 교수님이 펼치시는 주장이지요.

굳이 서양과 비교하자면 "문명" 보다는 "기독교"와 유사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한(漢)이라는 개념은 먼 옛날를 지향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베트남의 한(漢, 또는 화華, 하夏)이라는 것은 "고대 중화 세계의 문화적 중심에 살아간 식자층의 문화 세계"를 가리키며...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서 고대 예루살렘이 중요하듯이, 명명제의 세계관에서도 옛 "성지"가 있었다. 하(夏)의 옛 세계였다. 더욱이 옛 성지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 양식이라고 인식한 것을 명명제는 자신의 시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따르기를 원했다. 

(중국/동아시아 문화의 성격을 과거지향으로 일축하는 경향에 대한 크레이그 클루나스의 비판 참조.)

베트남의 캄보디아 병탄기를 재고하다 (5): 의복 포스팅에서 리암 켈리 교수님은 정회덕이라는 사람이 쓴 "가정성통지(嘉定城通志)"라는 19세기 지방지를 인용하면서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1816년에 열린 행사에 대한 언급에서, 정회덕은 찬 왕이 응우옌 왕조로부터 특별한 관복을 하사받은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을 7월 6일, 고만국(高蠻國, 캄보디아) 문무 관료에게 관복을 하사했다. 이때부터 고만의 관민(官民)이 의복과 기물에 모두 화풍(華風)을 본받았고, 꼬치머리(串頭衣), 둘러입는 치마(幅圍裙), 엎드려 절하기(膜拜), 손으로 집어먹기(博食)의 모든 오랑캐 풍속(蠻俗)이 점차 혁파되었다."

秋七月初六日、欽頒高蠻國藩燎文武朝服。從此高蠻官民衣服器用皆效華風, 而串頭衣、幅圍裙、膜拜、博食諸蠻俗漸革矣。

이제 해당 구절을 분석하면서 무슨 뜻인지 살펴보자.

우선, 정회덕은 "만속(蠻俗)"과 "화풍(華風)"의 차이를 인식했다.

정회덕이 언급한 "화풍"이란 무엇이었을까? 응우옌 왕조 관료처럼 하는 것이었다. 즉, 특정한 의복을 입고, 고전한문을 읽고 쓰며, 상고시대에 기록된 특정 의례 절차를 따르는 것 등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정회덕에게 중요했던 것은 당시 중국과 조선의 식자층에게 중요했던 것과 일치한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보편적 절차였다.


그런데 정말 화풍은 그저 고리타분하게 "특정한 의복을 입고, 고전한문을 읽고 쓰며, 상고시대에 기록된 특정 의례 절차를 따르는 것" 만을 의미했을까요? 그렇다면 적어도 정회덕 본인은 "화풍(華風)"을 꾸준히 같은 뜻으로 썼겠지요? 그렇다면 가정성통지의 다른 구절을 살펴봅시다.

(양언적과 진상천이 각각 이끄는 선단이 당시 캄보디아 땅이었던 곳에 정착한 뒤) "땅을 열어 황무지를 개척했고, 점포와 시장을 세워서, 장사하고 교통하니, 당인(唐人), 일본, 자바의 선박이 모여들었다. 중국(中國) 화풍(華風)이 이미 동포(東浦)에 조금씩 젖어들어 울창해진 것이다."

闢地開荒、構立庯市、商賣交通、唐人、西洋、日本, 闍婆 商舶溱集。中國華風、已漸漬、蔚然暢然、于東浦矣。

여기서의 "화풍"은 무슨 뜻일까요? 아마도 바로 앞에 쓰였듯이 황무지를 개척하고, 개항을 하고, 활발한 상업 활동을 벌이며, 외국과 교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저는 해석하겠습니다. 

의복, 문자, 의례로 정의되는 "중화(中華)" 개념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중화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회덕이 생각한 "화풍"이란 개척, 개항, 세계화와 같은 개념과 맥락을 같이 했나 봅니다.

그렇다
면, 가정성통지에서 두 차례 언급된 "화풍" 사이의 공통분모를 좁혀볼 수 있을까요?

앞에서는 "관복을 입는 것", "의복과 기물을 오랑캐와는 달리하는 것", "꼬치머리, 둘레치마, 엎드려 절하기, 손으로 집어먹기 등을 안 하는 것"이 화풍입니다. 후자의 화풍은 "황무지 개척", "개항지 건설", "(중국 뿐 아니라) 다양한 외국과 교류"였지요.

흐음... 그러니까 정회덕이 보기에는 "옛 글에 적혀있는대로 하는 것"이 화풍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자연상태를 개발함으로써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이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이것은 몇 십년 뒤 일본에서 "문명개화"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것과도 결을 같이 합니다. 여기서 제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서양 근대의 충격"을 받은 동양 문명 만이 civilization의 번역어로 "문명"을 강구해내거나, "개발", "발전", "근대", "산업"을 개념화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810년대를 살아가던 정회덕이 보기에는 (자연상태의, 미개발된) 오랑캐 풍습대로 살아가는 것은 "화풍"이 아니었습니다. 정회덕이 보기에는 제대로 된 의복과 기물을 사용하는 것, 한문으로 글을 쓰는 것 뿐만 아니라, 황무지를 개척하는 것, 외국을 향해 개항하는 것, 세계 각국의 상선들이 몰려드는 것이 "화풍"이었습니다.

이것이 정회덕 개인 만의 의견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1830년대 베트남 조정에서 실록을 편찬한 사관도 이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기고 있거든요. 다만 여기서는 "한풍"이라는 표현을 썼네요.

"노는 땅을 열었고, 포사(鋪舍)를 세워, 청인(淸人) 및 서양, 일본, 자바 등 여러 나라의 상선이 모여들었다. 이로부터 한풍(漢風)이 동포(東浦)에 조금씩 젖어든 것이다."

闢間地、構鋪舍、淸人及西洋、日本、闍(門+巴)、 諸國、商船溱集。由是、漢風漸漬、于東浦矣。


놀라 쿡 교수님이 주장하셨듯이, 대남식록의 기록이 가정성통지를 베끼다시피 한 거라면 왜 굳이 표현을 바꿨을까요? 제가 감히 추측해보자면 베트남을 "한()"으로 내세우는 것이 이 당시 국책 사업의 일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최병욱 교수님께서 설명하시는 "한이유한" 정책 참조.) 그러니까 화(華) 보다는 한(漢)이 정치권에서 공식적으로 쓰이는 표현에 더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1836년 베트남의 황제 명명제도 당시에 진행중인 상황을 언급하면서 "한풍"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다만 정회덕이 중상학파라면, 명명제는 중농학파인 것 같군요.ㅋㅋ 

"진서는 비로소 개척되기 시작했다. 밭은 비옥하고, 노는 땅이 많다. 짐은 이미 방변과 병사에게 400여 무의 둔전을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더 넓은 지역을 점차 개간한다면, 토지는 나날이 열리고 쌀이 남아돌아 천만세에 걸쳐 무궁한 이로움을 줄 것이다. 그러니 탈영병 등의 범죄자를 오래도록 구속해도 이익이 없음을 감안할 때, 이들을 둔전에 충당하여 땅을 근면히 일구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한 (진)랍 백성들 사이에 섞여서 살아 한편으로는 이것을 사용해 한풍(漢風)에 물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하(夏)를 써서 오랑캐(夷)를 바꾸는 하나의 방법이다."


모든 언어표현이 그렇듯, 명명제 연간의 "오랑캐"도 "자연 상태를 개발하지 않은 야만인"이라는 뜻으로만 쓰인 것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유연하게 쓰인 표현이었지요. 이를테면, 명명제가 1836년에 캄보디아 식민지의 마약/도박 문제를 주제로 신하와 문답한 내용을 보죠.

황제께서 들으시길, [캄보디아를 다스리는] 옥운 군주가 청나라 사람의 상포(商鋪)에서 아편을 마련하고 팔 수 있도록 허락하여 이익을 취하고, 성 안에 속한 토민(土民)들이 많은 도박장을 차리기에 이르렀으니, 장군 장명강(張明講)과 참찬(參贊) 양문풍(楊文豊)에게 사안을 검토한 뒤 보고하도록 명했다. 

장명강 등이 보고하길, "번속(藩俗)이 종래 이 두 가지로 이익을 보는 것이니, 무릇 병량을 지급하는 것부터 기계와 선박을 짓는 것까지 모두 여기서 취하는 것인 탓에, 이를 따르고 아직 혁파되지 않은 것입니다." 

황제께서 가라사대, "아편 독약과 도박 놀이판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을 중독(蠱溺)시킬 수 있으니, 돈을 부어넣어 파산하게 한다. 거기에 한 번 빠져들면 매번 헤매기만 하고 깨닫지 못하니, 이로써 조정은 법을 세워 두 가지를 가장 엄하게 금한 것이다. 진서(鎭西, 캄보디아)는 이미 우리의 판도(版籍)에 종속되었으니 마땅히 스스로 법과 기강을 따라서 조금의 어긋남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들은 단지 작은 이익을 볼 뿐이고 잘못된 풍속의 해로움이 얼마나 큰 지 모르는 것이다. 현재 성에는 병사와 관료를 주둔시켜 지키고 있고 한민(漢民)이 왕래하며, 장사(商賣)가 천만 단위로 움직인다. 만약 엄금하지 않는다면 토인(土人)만이 빠져드는 것이 날로 심해질 뿐 아니라 병사와 백성에게도 악습을 전염시켜 기강(憲章)을 범하고 해로움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한편에는 캄보디아의 토민/토인이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베트남의 "한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토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아무런 문명 활동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기계와 선박이 있었고, 군대를 운용했죠.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화풍"에 물들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미개와 문명의 중간 단계, "반개(半開)" 상태라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한민과 토민을 나누는 구분선은 자연을 개발했는지 여부는 아닙니다. 도덕성이나 윤리의식이 있는지, 악습에 쉽게 빠져드는지 여부였습니다. 한민은 저 시점까지는 아편이나 도박에 중독되지 않았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지요. 하지만 계속 토민과 섞여 살다가는... 위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19세기 베트남에서 "한(漢)"을 정의하는 물질적, 윤리적, 문명론적 담론을 살펴보았는데요. 종합해봤을 때, 베트남의 "한(漢)" 의식은 (굳이 비교하자면) 18, 19세기 영국이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청나라, 북미 원주민 등을 대한 태도와 가장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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