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1682년, 캄보디아 왕은 왜 도망쳤나? [캄보디아 병탄기]


리암 켈리 선생님께서는 19세기 베트남을 통일한 응우옌 왕조가 스스로를 "한족(漢)"이라고 여긴 이유를 설명하는 글에서 베트남을 찾아온 "반청복명 세력(Ming Loyalist)"을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말이 된다. 베트남 지역 식자층이 (조선의 식자층과 마찬가지로) 명나라를 청나라 보다 정당성 있다고 여겼다는 것을 감안하고, 반청복명 세력이 메콩강 하구로 피신한 것을 감안했을 때, 충분히 가륭제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고 생각한다."
(2013년, 혼밥왕 가륭제 中)

마츠카타 후유코 선생님의 책에는 이들에 대해 보고를 한 네덜란드 풍설서 내용이 인용되어 나옵니다. 그다지 얌전한 피난민들이 아니었나 봅니다.

"타르타르인[청나라]에 의해 아모이(廈門)에서 추방된 중국인[삼번 정남왕靖南王의 지배 하에 있던 자들]이 해적이 되어, 캄보디아에 근거지를 세웠다. 적지않은 중국인이 이주하여 자기 집 앞마당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캄보디아 왕조차도 도망갔다. 왕의 소식은 현재로써 불확실하다."

도대체 얼마나 무례한 손님들이었기에 집 주인이 도망을 간 걸까요? 
네덜란드인들이 설명해줄 수 있는건 저 정도인 것 같으니, 이번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놀라 쿡(Nola Cooke) 선생님의 "17세기 후반의 참파-베트남 교류: 프랑스 선교사 기록을 통해 새롭게 조명하다 (Later Seventeenth-century Cham-Viet interactions: New light from French missionary sources)"에서 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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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칠된 역사: 캄보디아, 1682년  


안타깝게도 파리외방전교회(MEP)의 사료는 이 무렵에 일어났을 법한 사건들을 암시하는 정도밖에 되지 못하는데, 1682년에서 1700년 사이 참파 교구를 관리한 투이상 페레(Toussaint Feret)의 1680년대 서한이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MEP 문서에 기록된 내용을 짜맞추어 보면 1682년 광동지역에서 출발한 실향민 선단이 도착한 뒤로 문제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잘 알려진 대남식록전편의 기사에 따르면 1679년,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彦迪)이 공동으로 이끄는 중국 선단에 속한 선박 50척과 사람 3000명이 도착했다고 한다. 대남식록전편에 의하면 이들 광동인 집단은 망명하길 원했으나, 언어와 풍습이 너무 달라서 거절 당했다. 그러나 현주(賢主) 완복빈(阮福瀕)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이들이 (당시 캄보디아 왕국 영토였지만) 가정(嘉定)-동 나이(同奈) 지역으로 남하한다면, 캄보디아의 번왕 앙 논에게 말을 넣어 실향민이 정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실향민들은 여기에 동의하였고,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두 집단으로 찢어졌다. 양언적이 이끈 집단은 미 토(Mỹ Tho)를 설립하였고, 다른 집단은 훗날 사이공이 될 장소 근처인 비엔 호아(Biên Hóa, 邊和)로 간 것이다. "노는 땅을 개척하고, 군사기지(鋪舍)를 세워, 청나라(淸人) 및 서양, 일본, 자바(闍婆) 등 여러 나라의 상선이 모여들었다"는 것이 대남식록전편이 기록하는 행복한 결말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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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사(鋪舍)는 성곽시설의 일종을 가리키는 단어지만 맥락 상 "가게 건물", "점포"라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런데 쿡 교수님은 "도로와 마을(roads and villages)"을 건설했다고 번역했다. 이것은 오역으로 보인다. 
장보고의 청해진 같은 것을 세웠다고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겠다.



여기서 문제점은 당대 기록 중 어느 것도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청나라의 1차사료에 따르면 양언적이 코친차이나에 도착한 것은 청에 의해 군사력이 궤멸된 이후의 1682년 초라고 한다. 통킹의 영국 상관에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1682년 3월에 200척의 중국 정크선이 홍하 유역에 느닷없이 나타나 큰 불안을 일으켰으나, 한 달 정도 지나자 남쪽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 기록은 드 쿠르톨랭(de Courtaulin)과 바셰(Vachet)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두 인물 모두 1679년에 베트남에 있었음에도 중국 선단이 왔다는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1682년에는 둘 다 그런 사건을 기록하였으며 평상시와 다르고 불안 요소가 있는 사건으로 다뤘다. 이 모든 사료가 1682년이라는 연도에 동의하는 것을 볼 때, 양언적의 해적 선단이 도착한 연도에 대한 베트남 측의 기존 기록은 틀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물론 진상천 선단과 양언적 선단이 보다 이른 시기에 찢어져서 진상천 선단이 1679년에 도착했을 수도 있다. 해당 사건을 언급하는 대남식록전편의 기사는 1830년대가 되어서야 집성되었고, 그 내용은 현지의 고관 정회덕(鄭懷德)이 1810년대에 집성한 가정성통지(嘉定城通志)에 실린 내용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가정성통지가 원출처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내력을 보건대 19세기 당시 베트남 측에는 중국 선단이 찾아온 것에 대한 공식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2개 (이상의) 선단이 방문했다는 기억의 혼란이 일어난 것이며, 그에 따라 세부사항은 틀린 것일 수도 있다. 2건의 19세기 사료가 1679년도에 대해 기록한 바와 MEP 기록이 1682년의 실향민 선단에 대해 쓴 내용이 거의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은 이 관점을 강력히 지지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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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러니까 1679년이라는 기록은 잘못된 것이고, 1682년이 맞다.
최병욱 교수님의 개정판 동남아시아사 - 전통시대(2015)에는 대남식록 기록만을 참조한 1679년으로 되어있다. (최병욱, pp. 214) 


MEP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682년 초, 바셰의 궁중 정보원에 따르면 70, 80 척의 범선과 갤리선으로 이뤄진 중무장 함대가 통킹을 거쳐 코친차이나 근해에 나타났다. (쿠르톨랭이 보고한 시점에서 함대의 규모는 300척으로 불어나있었다.) 선단에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탑승해있었다. "노병, 상인, 부인, 소녀" 뿐만 아니라 군인들도 타고 있었는데, 모두 해적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청나라 세력에 의해 광동에서 축출당한 뒤 망명할 곳을 찾고 있었다. 중국이 정(鄭)씨 가문의 동맹 세력일 수 있다고 염려한 현주(賢主) 완복빈은 수 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직접 해안가에서 상황을 살폈다. 한때 이들을 말살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중국의 반응을 염려한 완복빈은 캄보디아 번왕을 지원하도록 이들을 설득하는 것으로 해결을 보았다. 당시 캄보디아 왕, 앙 난(낙 논)은 완씨 세력이 다스리는 지역의 변방인 "푸모이"(Fumoy, 오늘날의 푸 옌)에서 500명 정도의 인원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마침 중국인 선단이 망명을 신청해온 덕분에 완씨 세력의 인력을 소모하지 않고도 앙 난을 지원할 기회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3] 실향민 선단은 항구에 정박해있는 몇 달 동안은 여기에 동의하는 참을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남쪽으로 향하면서 태도를 바꿨고 코친차이나와 참파 해안을 노략질하기 시작하면서, 제멋대로 약탈과 살인을 행하였다. 바셰의 보고에 따르면 "이들이 자행한 학살행위는 과장할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해적들이 베트남 연안의 해운에 미친 위협이 얼마나 심했는지, 이로부터 수 개월이 지난 뒤에도 호이안을 떠나는 선박들은 15척 내지 16척 씩 호송단을 꾸려서 항해에 나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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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니까 VOC가 보고한 "도망친 캄보디아 왕"은 베트남이 보호하고 있던 "망명 정부 캄보디아 왕" 앙 난과는 다른 인물이다. 

당시 캄보디아에는 두 명의 왕, 앙 소르(체이 쳇타 4세)와 앙 난(파두마라자 3세)이 있었다. 앙 소르와 앙 난은 캄보디아 내 서로 다른 지역을 거점으로 두었으며, 둘 다 코친차이나 완씨 정권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앙 난은 앙 소르를 몰아내기 위해 완씨에게 개입을 요청하였다. 이때 "마침 중국인 선단이 망명을 신청해온 덕분에 완씨 세력의 인력을 소모하지 않고도 앙 난을 지원할 기회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 쿡 교수님의 설명이다.

앙 난의 거점은 프레이 노코르(가정, 사이공, 호치민 시)로, 코친차이나와 가까운 곳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오늘날의 푸 옌 지방은 사이공(가정성)과는 상당히 떨어져있는데, 그렇다면 1682년 시점에 앙 난은 다시 코친차이나에 망명을 와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앙 소르와의 내전 때문이 아닐까. (본 주석의 내용은 대체로 영문 위키피디아를 참조함.)


이 당시 일본의 주인선(朱印船) 2척이 나가사키에 보고하기를, 중국 해적 선단이 메콩강을 타고 올라가 캄보디아를 공격했다고 했다.[4] 한 프랑스 선교사의 기록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다. 1682년 10월, "중국인들은 참파 왕국에서 살인과 노략질, 그리고 각종 무단 행위를 저지른 뒤 강 하구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 들려온 소식에 따르면 이들은 크메르 촌락 2곳을 폐허로 만들었고, "팔아넘기거나 자신들의 짐승 같은 욕정을 충족시킬 만한 적령기 소녀들만 제외하고는 봉쇄한 지역의 모든 남자, 여자, 어린 아이를 가리지 않고" 죽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단은 프놈펜에 도착해서 앞으로 4년 간 이어질 전쟁에 불을 붙였다. 사쿠라이 유미오는 이 집단이 양언적의 선단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는 즉슨, 대남식록전편과 가정성통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이들이 1679년에 미 토 지역에 평화로이 정착한 것이 아니라, 1682년 선단의 대부분이 캄보디아 왕국에 도착하자마자 전과 같이 해적질을 이어나가다시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중국 해적단의 위협은 가공할 만한 것이어서, 1683년 초 시암의 나라이 왕은 이들이 시암을 공격할 경우에 대비하기 시작하였다.[5] 

Cooke, Nola. (2010). Later Seventeenth-century Cham-Viet interactions: New light from French missionary sources. Annalen der Hamburger Vietnamistik, 4-5, pp.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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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실 이미 부교는 이 해의 당선 풍설서(唐船 風說書)를 통해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다." (똑바로 서라, 카피탄! 中) 

[5] 이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시암 궁정에서 행한 의술과 연금술에 대해서는,
타라 알버츠 교수님의 
(시암의 나라이) 왕을 위한 황금 음료를 대령하라 참조.



"해적선을 막을 방법이라... 아르키메데스 전법을 보여줘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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