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15세기 베트남의 "검은 황제" 인도차이나 ~Indochine~

바로 앞에서 번역한 2. 도돌이표: 타이 언어와 비엣 언어 글에서 켈리 교수님은 "722년, 중국이 다스리던 지역의 남쪽 변방에서 매숙란(梅叔鸞)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역사적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또한 "매숙란은 매흑제(梅黑帝)라고도 불리는데, (테일러를 포함한)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반란이 비엣 민족이 아닌 참 족 같은 사람들이 일으켰다고 판단하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라고도 하시네요. 

이 "흑제" 매숙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비슷한 호칭으로 불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켈리 교수님의 블로그에서 번역해봅니다.

Liam Kelley 교수님의 Lê Lợi and the Black-Robed Emperor을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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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베트남의 "검은 황제"

역사 속의 "팩트"가 이미 오래전에 정립된 분야들이 있는가 하면 전근대 베트남 역사처럼 전혀 그렇지 못한 분야도 있다. 베트남 역사를 다루는 역사학자들은 이제 겨우 문헌 근거의 표면만을 살펴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모르는 것도 너무 많고, 우리가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 중에 사실이 아닌 것도 너무 많다.

전근대 문헌을 볼 때마다 이 점을 다시 깨닫곤 하는데, 다음과 같은 경우다.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에 마주치는 것이다. 그러면 필자는 관련된 다른 문헌을 찾아보는데, 그러다 보면 새로운 생각과 통찰이 떠오르는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관직명 하나를 이해할 수 없어서 찾아보다가 샛길로 빠지게 되었다.

15세기에 여리(黎利, 레 러이)가 명나라와 친명파 세력으로부터 베트남을 장악하려고 애쓰고 있을 무렵, 므엉 목(Mường Mộc)이라는 지역의 타이인의 도움을 받았다. 므엉 목이라는 곳은 이후에 목주(木州)라고 불렸고, 지금은 선 라 성(Sơn La省)의 현(縣)이다.

대월사기전서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았다.

[10/35b] 嘉興鎭木忙父道車可參等歸[10/36a]順。授可參入內司空同平章事、知陀江鎭。

"[10/35b] 가흥진(嘉興鎭) 므엉 목(木忙)의 부도(父道)인 차가참(車可參) 등이 [10/36a] 귀순하였다. 가참에게 입내사공(入內司空) 동평장사(同平章事) 벼슬과 타강진(陀江鎭) 지사 벼슬을 주었다."

"부도(父道)"는 타이 지도자를 부르는 호칭인 "푸 타오"의 소리를 옮긴 것이다. 타이 정치체는 "므엉"이라 불렸는데, 군사가 주둔하는 진(鎭) 내부에 므엉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홍하 삼각주 옆 산간지대에 위치한 가흥진이 어떤 곳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베트남인은 해당 지역을 진(鎭)이라는 행정 단위에 편입시킴으로써 그곳을 다스린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으나, 푸 타오가 다스리는 므엉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은 베트남인이 가흥진을 실제로 장악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차가참(Xa Khả Tham, 싸 카 탐)은 여리를 도운 공로로 상을 받았다. 그렇지만 차가참이 정확히 어떤 상을 받은 것인지는 불확실한데, 그가 수여받은 관직명을 풀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탈자가 있는 듯 한데 (이것은 대월사기전서에서 굉장히 흔한 현상이다.) 나와있는 글자만으로는 관직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원래 의미를 파악하고자 추측을 해야 했다.[1]

여리가 차가참에게 준 관직이 실제로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어서, 다른 사료도 찾아보았다. 대월사기전서가 이 정보를 담고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사료라는 것을 감안할 때, 후대의 사료가 더 정확하다고 할 수 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사료에는 뭐라고 써있는지 궁금했다.

19세기 대남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車可參佐黎太祖定天下、以功賜國姓、封司空、許木州爲食邑。子孫世襲。

"차가참은 여 태조(黎太祖)가 천하를 바로잡는 것을 보좌했다. 그 공으로 국성(國姓)을 하사받고, 사공(司空) 벼슬에 봉해졌으며, 목주(木州)를 식읍(食邑)으로 삼는 것을 허락받았다. 자손이 세습하였다."

여기에는 또다른 관직명이 있다. 위의 긴 관직명에 포함된 두 글자 관직명이다. 또한 여기서는 차가참이 이 관직에 "봉(封)"해졌다고 되어있다. 이 모든 정보가 위와는 다르다.[2] 이 문헌에 따르면 차가참은 황실의 성씨인 여(黎) 씨를 하사받았다고 되어있있는데, 이건 대월사기전서에서도 나중에 언급하기 때문에 다른 정보는 아니다.

차가참이 받은 관직이 무엇이었는지 아직도 불확실해서, 황종정(黃種政)[3]이 1778년에 쓴 흥화풍토록(興化風土錄)이라는 문헌도 참조했다. 이것은 베트남 북부의 산간지역에 대한 지방지(地方誌)인데, 차가참과 여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써있다.

車可參以兵佐高皇定天下、有功賜國姓、司徒國功公、許木州爲食邑、號黑衣帝、其子孫世襲。

"차가참은 고황제(高皇)께서 천하를 바로잡는데 병사로 보좌하였다. 공이 있어 국성을 하사받았으며, 사도(司徒) 국공공(國功公)으로, 목주를 식읍으로 삼는 것을 허락받았다. 흑의제(黑衣帝)라고 불렸다. 그 자손이 세습하였다." 

이 정보를 찾아보던 중, 필자는 베트남의 타이 민족을 연구한 대학자, 껌 쫑(Cầm Trọng)이 한 말이 떠올랐다. 1978년, 껌쫑은 "베트남 서북부의 타이인(Người Thái ớ Tây Bấc Việt Nam)"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북부의 타이인은 베트남 민족의 일부다. 그들은 통일된 베트남이라는 국가의식을 오랫동안 지녔다." (Người Thái ở Tây Bắc là một bộ phận của dân tộc Việt Nam. Ý thức quốc gia Việt Nam thống nhất ở họ đã có tử lâu rồi.)

1978년에 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상황의 골자는 똑같다. 안타깝다고 느끼는 이유는 타이 인과 베트남 인의 관계가 한 번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위 구절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재 베트남 영토 내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태초부터 베트남이 통일국가라는 확신을 유지했다는 민족주의 신화를 내려놓고 (베트남과 타이 측의) 사료에 실제로 기록된 바를 살펴본다면 과거가 훨씬 더 복잡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분명, 이와 같은 작업에 첫 삽을 뜬 저서가 있었다. 1977년에 당 니엠 반(Đặng Nhiêm Vạn)이 편집한 "타이 민족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자료(Tư liệu vể lịch sử vả hội dân tộc Thái)"에는 타이 언어로 된 사료에 대한 정보가 실려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 자료는 사료의 번역이 아니라 요약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이 쓰는데 필요한 만큼 정확하지가 못하다. 또 여기서도 타이인이 항상 통일국가 베트남의 일부였다는 주장을 위의 껌 쫑과 같은 집필진이 피력했기 때문에 과거가 얼마나 복잡했는지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러나 과거는 복잡했다. 차가참의 사례를 보면 이 점이 확실해진다. 차가참이 정말 흑의제라고 불렸더라면, 설령 차가참이 다스린 므엉 사람들만 그렇게 불렀더라도, 우리가 "베트남 역사"에 대한 이해가 통째로 바뀌고, 복잡함이 한층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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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켈리 교수님께서 이 글을 쓰신 2010년 이후로 디지털 인문학의 큰 발전이 있었다.
덕분에 남중생도 인터넷 검색으로 명실록(明實錄) 영락 9년 7월 17일조 기사를 보면, 명나라 군대가 베트남 저항세력을 격파하고 "입내사공(入內司空)" 도장을 빼앗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프 웨이드 교수님께서는 입내사공을 "왕을 접견하는 것이 허락된 사공(Grand Duke Conferred with Inner Access)"이라고 번역하셨다.

여기서 "사공"과 "동평장사"는 모두 명예직 관직명인데, (정1, 2품) 재상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2] 고려의 사공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여기서 유일하게 혼란스러운 것은 대월사기전서와 대남일통지에는 "사공" 벼슬을 받았다고 되어있는데, 흥화풍토록에는 "사도" 벼슬을 받았다고 되어있는 것이다. 

태위()·사도()와 함께 삼공()이라 총칭되었다. 언제부터 주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문종() 때 1인으로 하고 정1품으로 정비하였다. 충렬왕() 때 없어졌다가 1356년(공민왕 5) 다시 두었으며, 1362년 다시 없앴다. 주된 기능은 임금의 고문 역할을 하는 국가 최고의 명예직이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사공()이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것이 왕족에게도 수여되어 봉작()처럼 호칭된 때문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정연한 봉작제()가 시행되었으나, 봉작은 당대에 끝날 뿐이었고 상속되지는 않았다. 대신 모든 종친의 봉작자들의 아들과 여서(婿)에게는 봉작 대신 최고의 관직인 사도나 사공을 명예직으로 수여하였다.

사도나 사공은 관직이었으나 종친에게 수여된 사도나 사공은 실제로는 작위처럼 기능하였고, 다른 실직()을 갖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들 사도나 사공이 공주()와의 족내혼()을 통해 왕의 사위가 되면 백작()이 수여되었다.

고려의 공주들은 거의 전부 족내혼을 하였으므로 실제 이러한 사례는 많이 보이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봉작이 상속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종친들의 봉작이 연속될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공 [司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황종정은 황평정(黃平政)이라고 기록되어있기도 하다. 무언가를 피휘한걸까? 
또한 책 제목은 흥화처풍토록(興化處風土錄), 흥화풍토지(興化風土誌) 등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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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동두철액 2019/02/01 22:27 # 답글

    흑우제는 황제 제자를 쓰는데 신하가 썼다는게 신기하군요
  • 남중생 2019/02/01 23:22 #

    앗, 저도 번역하면서 흑우 드립을 칠까 했는데, 동두철액 님께서 대신 해주시는군요ㅋㅋㅋㅋㅋㅋ
    "황제"라는 표현은 확실히 튀죠. 켈리 교수님도 그래서인지 "므엉 목" 내에서만 황제라고 불렸더라도...라고 조건부를 거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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