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양자 악어 이야기 (1) - 핏타야왓 핏타야폰의 3단계 이동 가설 [특집]양자 악어 이야기

[특집 구성]이라고 거창한 이름까지 붙여놓은 "양자 악어 이야기"를 드디어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번역해온 핏타야왓 핏타야폰 교수님과 리암 켈리 교수님의 주장을 살펴보는 연재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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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악어 이야기 (1) - 핏타야왓 핏타야폰의 3단계 이동 가설

2009년, 언어학자 핏타야왓 핏타야폰은 서남부 타이 조어(PSWT)의 3단계 이동 가설을 내놓습니다.

3단계 가설이란, 현재 쓰이는 서남부 타이어의 특정 단어를 살펴보면 해당 단어의 대상이 풍부한 지역 --> 결여된 지역 --> 다시 풍부한 지역으로 언어가 이동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풍부하고, 결여되었다는걸까요?

이 3단계 이동 가설을 한 번 살펴봅시다.


우선, 출발점은 모든 타이 언어의 조상인 타이 조어(PT)가 쓰이던 중국 광시성 지역입니다. 

이 타이 조어를 쓰던 사람들 중 일부가 중국 운남성 및 베트남과 라오스의 북부에 걸친 지역으로 이주합니다. 이 사람들의 언어는 고향 사람들의 언어와 다르게 발달합니다. 훗날 "서남부 타이 언어"(SWT)라는 언어의 조상이 될 "서남부 타이 조어"(PSWT)입니다. 

광시성에는 석회암 지형이 발달해 있어서, 카르스트나 넓게 흐르는 강을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서남부 타이 조어가 발달한 동남아 북부는 카르스트와 강이 없는 고산지대였습니다. 그래서 이 새로운 지형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기존에 갖고 있던 "석회암 산"이나 "큰 강"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차차 잊어버렸습니다. 

이들이 동남아 북부 지역을 뒤로 하고, 동남아 남부(오늘날 태국 등지)로 이동하였을 때는 다시 석회암 산과 큰 강을 보게 되었는데, 이미 여기에 해당하는 개념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부르거나 "큰 강" 대신 "물"을 의미하는 일반명사로 부르거나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서남부 타이 조어 구사자들은 강과 석회암 산이 풍부한 지역 --> 결여된 지역 --> 다시 풍부한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것이 3단계 이동 가설의 요지입니다. 


위와 같이 "강"과 "카르스트"에 해당하는 두 단어를 살펴본 뒤, 핏타야왓 핏타야폰은 서남부 타이 언어들에서 "악어"를 가리키는 단어에서도 같은 변화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서남부 타이 조어 구사자들이 이동한 경로를 보면 악어가 풍부한 두 지역 사이에 악어가 없는 중간 구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양자강 악어(Alligator sinensis)는 역사적으로 양자강 중하류 유역의 호수와 늪지에서만 서식한 반면, 동남아시아의 악어들(Crocodylus prosus, Crocodylus siamensis, Tomistoma schelegelli)의 서식지는 동남아 반도의 중남부 전역에 걸쳐있었다. 이러한 분포로 인해 동남아 북부와 중국 남부는 악어가 없는 지역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과 카르스트가 없는 지역인 동남아 북부는 악어도 없는 지역이라는 것이고, 이곳에서 서남부 타이 조어 구사자들은 "강"과 "카르스트"에 대한 지역과 마찬가지로 "악어"에 대한 기억도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잠깐... 중국 남부에도 악어가 없었다고요? 아니, 그렇다면 타이 조어(PT) 구사자들은 애초에 어떻게 악어를 알았던거죠...? (동공 지진)


핏타야왓 핏타야폰은 중국 남부에 악어가 없었다는 점과 타이 조어를 쓰던 사람들이 원래 중국 남부에 살았다는 점 사이의 모순을 해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 이러한 모순점은 핏타야왓이 앞서 주장한 바와는 정면으로 충돌하지요.  

"퇴색된 단어가 있다는 것은 원래 그 단어가 지칭하던 대상이 과거에는 언어구사자들의 삶 속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했다가 언어가 발달하면서 후대에는 더 이상 안 중요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핏타야왓 핏타야폰, 2009)

핏타야왓에 의하면, 각종 타이 언어에서 "악어"를 가리키는 단어는 중국어에서 왔다고 합니다. 중국어에서 악어를 가리키는 말을 타이 조어 구사자들도 그대로 따라 썼다는 겁니다.

핏타야왓이 모호하게 넘어간 부분을 제가 추측해보자면, 광시 지역에서 타이 조어를 구사하던 일부 사람들이 떨어져나갔을 무렵(8, 9세기) 중국어는 이미 전국적인 통일성을 갖추고 있었다고 핏타야왓은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문자 사용 덕분에) 중국인은 악어가 없는 지역에서도 "악어"라는 단어를 글을 통해 알 수 있었으리라는 거죠. 그리고 광시 지역에 살던 중국인(당나라 사람)들은 당 제국 내 살던 다른 식자층과 마찬가지로 "악어"에 대한 지식이 있었을거라는 겁니다. 타이어 구사자는 이들 식자층 중국어 구사자로부터 "악어"에 대해 들을 수 있었을테고요.

핏타야왓 핏타야폰이 이야기하지 않는 부분을 이렇게 추측하더라도 풀리지 않는 문제는 남아있습니다. 타이 조어 구사자들이 악어를 실제로 본 적이 없으면서 그저 '이러이러한 동물이 있다더라' 하고 건너들었을 뿐이라면, 어째서 이 단어가 동남아 북부까지 가서야 "뱀 같이 생긴 전설 속 수중생물"이라는 뜻으로 와전되었을까요?

그 전에 광시 지역에 있을 때 이미 전설 속 괴물처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확실히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직관적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전근대 베트남을 연구하는 리암 켈리는 핏타야왓 핏타야폰의 "3단계 이동 가설"을 바로 그런 식으로 오해해버립니다. 

"그래서 타이 조어 구사자들이 악어가 없는 광시 지방에 살고 있었을 때, 이들은 옛 중국어 구사자들로부터 악어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단어가 타이 언어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실제로 악어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악어를 '뱀 같이 생긴 전설 속 수중생물'로 상상한 것이다." (쩐 왕조의 이색적인 애완 악어)


네, 광시 지방에 있을 때 이미 "뱀 같이 생긴 전설 속 수중생물"로 와전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했군요. 하지만, 이것은 핏타야왓 핏타야폰이 주장하는 바가 아닙니다.


"'악어'에서 '전설 속 수중생물'로 의미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면 서남 타이어의 고향에 서식한 동물 중에 악어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상들로부터 들어온 악어는 신비로운 상상 속 생물체가 되어갔으리라. 그리하여 서남 타이어를 쓰는 사람들은 동남아시아 남부에서 악어와 재회했을 때에는 새로운 단어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로써 서남 타이어가 더 남쪽에서 발달했을 가능성은 없어진다. 그리하여 서남 타이 제어가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퍼져나가기 전에 발달한 장소로는 윈난 동남부, 라오스 북부, 베트남 북부를 잇는 지역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인 것이다." (핏타야왓 핏타야폰, 2009)


여기서 핏타야왓이 "서남 타이어의 고향"이라고 한 것은 광시 지방이 아니라, 동남아 북부(윈난, 라오스, 베트남 접경지대)입니다. 또한 핏타야왓은 중국인이 아니라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악어에 대해 들어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켈리 교수님은 두 부분에서 핏타야왓의 주장을 오해했습니다. 타이 조어 구사자들이 "광시 지방"에서 "옛 중국어 구사자"들로부터 들은 악어를 "뱀 같이 생긴 전설 속 수중 생물"로 상상했다는 것인데... 

"타이 조어 구사자들이 악어가 없는 광시 지방에 살고 있었을 때, 이들은 중국어 조어 구사자들로부터 악어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오해를 했는지, 이해할만도 합니다.
 
분명 광시성(중국 남부)에는 악어가 없다면서, 타이 조어 구사자들이 "악어"를 알고 있었다고 하는 바람에 모순이 생겼고, 그 모순을 해결하려다보니 위와 같은 오해가 일어난 것이지요.


이걸 보는 저는 상당히 민망한 기분입니다. 왜냐하면 켈리 교수님께서는 (특히 벤 키어넌이라는 역사학자가 쓴 "베트남 통사"라는 책을 비판할 때) 원전을 잘못 인용해서 원래의 의미에서 표류해버리는 문제를 줄곧 지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수님 본인도 그런 잘못을 저질러버리신 것입니다. (전근대 베트남사 연구에서 보이는 "문헌 표류 현상"이나 2. 도돌이표: 타이 언어와 비엣 언어 등 게시물 참조.)

그리고 심지어 핏타야왓 핏타야폰의 악어 이야기를 인용한 저 글도 사실 벤 키어넌을 비판하는 글이었거든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것은 누구라도 저지를 수 있는 실수입니다. 실수가 있다면 아무리 초보적인 실수더라도 "이러이러한 실수가 있다"고 알려줘서 고치면 될 일입니다. (안 고치고 고집을 부린다면 문제겠죠.)


다음 글에서는 핏타야왓 핏타야폰의 3단계 이동 가설에 남겨진 모순점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이어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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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동두철액 2019/01/29 20:52 # 답글

    도대체가 어느 정도 공부하면 이런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까요. 악어란 단어로 이런 논의를 할 수 있다니...정말 흥미롭습니다.
  • 남중생 2019/01/30 01:23 #

    후후, 악어에 대한 더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 기대해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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