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도돌이표: 연재 시작 [도돌이표]

Liam Kelley 교수님의 Going Backwards: A Series를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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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돌이표: 연재 시작

학술서라고 해서 모두 동격인 것은 아니다. 문제가 있는 책과 논문이 출간되기도 한다. 어떤 학술 성과를 믿어도 되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학자로서 할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사 학자 키스 테일러(Keith Taylor)는 "베트남의 탄생"이라는 책을 쓰면서, 레오나르 오루소(Leonard Aurousseau)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1923년 오루소는 기원전 1천년기에 오늘날 중국 저장성 지역에 있던 월(越, Yue) 민족이 남쪽으로 이동해 베트남 홍하 삼각주로 옮겨갔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썼다.

테일러는 오루소가 펼친 주장의 논리를 반박하지 않았는데, 다시 말해 오루소가 주장을 전개한 방식을 반박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인구집단 하나가 통째로 남방 이주를 했는 주장에는 반대했다.

테일러는 자기 책에 "월 민족 이주 가설(The Yue Migration Theory)"이라는 제목의 부록을 달아, 베트남 민족은 베트남 땅에서 유래했지만 몇몇 "지배 계층의 사람"이 북쪽에서 홍하강 유역으로 이주해왔을 수는 있다고 했다. (315)

다시 말해, 테일러는 사람 몇 명이 홍하 삼각주로 이주해왔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오루소가 주장한 것 처럼 "월 민족"의 지파 하나가 이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테일러는 오루소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러나 테일러가 이 책에서 내놓은 주장 중에도 문제가 있다. 이 책의 첫 장을 보면 홍하 삼각주의 초기 역사에 대해 매우 (베트남) 민족주의적인 개괄을 보여준다. 기원전 1천년기에 베트남 고유 문화가 형성되었고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하면서 테일러는 15세기에 발명된 이야기들과 20세기 베트남에서 만들어진 민족주의 역사 연구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했고, 이 둘을 혼합해 변하지 않는 베트남 문화와 정체성이 1천년 동안의 중국 지배를 "살아남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였다.

북미의 베트남사학계에서는 더이상 그런 식으로 베트남 역사를 이해하지 않는다. 심지어 테일러 본인도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베트남 역사를 이해하지 않는다. 테일러는 그 이후로 베트남 역사 개론서를 하나 더 썼는데 중국과 접촉하기 전의 베트남사에 대해서는 매우 간소하게 언급할 뿐이다.

다시 말해, "베트남의 탄생"에는 여전히 믿어도 되는 부분도 있지만, 제1장은 그러면 안 된다.


타이 역사언어학 분야에 여러 편의 글을 쓴 제임스 R. 체임벌린이라는 언어학자가 있다. 체임벌린의 글을 보면 종종 키스 테일러의 "베트남의 탄생"에 강하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체임벌린은 타이 언어 구사자들의 전승에 (신화 속) 웅왕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 연구는 문제가 있는데, 왜냐하면 이 연구가 의존하고 있는 테일러의 책에 실린 정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1976년에 제리 노먼과 메이쯔린은 오스트로아시아어족 언어가 중국 남부에서 쓰였던 적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문은 매우 영향력 있었다. 그러나 2008년 로렌트 사가르라는 언어학자가 반대 근거를 들어 노먼과 메이의 주장을 크게 반박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노먼과 메이가 내놓은 사례를 "팩트"로 인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례들을 반박하는 반례가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초기 역사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면, 위와 같은 내용을 모두 알아야 한다. 그러나 벤 키어넌의 "베트남 통사"를 읽어보니, 책의 저자는 베트남사 학계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어떻게 발전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앞에서 말한 구시대의 학문이 모두 "귀환"했기 때문이다.

오루소의 "월 민족 이주 가설"이 돌아왔다. 테일러의 "베트남의 탄생" 1장이 돌아았다. 제임스 R. 체임벌린의 저술이 돌아왔다. 그리고 노먼과 메이가 쓴 논문도 돌아왔다. 

앞으로 필자는 위 사안을 포함해 여러 문제를 "도돌이표"라는 제목의 연재에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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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mori 2019/01/24 22:30 # 답글

    진짜 뭐 하나 방심하지 않고 읽으면 안 되는 거군요;;
  • 남중생 2019/01/24 23:27 #

    네... 제가 곧 이 글을 쓴 켈리 교수님도 같은 방식으로 반박할 예정이기 때문에... 결론은 그렇습니다;;ㅎㅎㅎ
  • 동두철액 2019/01/25 15:01 # 답글

    베트남 사학계는 중국의 월족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분명 베트남 사학계는 미국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를텐데 말이죠.
  • 남중생 2019/01/25 15:37 #

    그것도 그렇네요! 베트남도 디아스포라가 널리 퍼져있는 만큼 뭔가 담론이 있을텐데 말입니다.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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