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베트남 청동북을 녹이려 했다? [청동북]

제가 작년 연말에 영어로 썼던 글을 다시 한국어로 풀어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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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청동북을 녹이려 했다?

리암 켈리 교수님의 글에 "대해서" 제가 글을 쓰는 것은 처음이네요. 저는 여태껏 켈리 교수님의 블로그에서 60여편의 글을 번역했습니다. 한국인들이 베트남사에 관한 (전문 역사학자가 쓴) 좋은 글을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건데요.

Le Minh Khai 블로그에서 제가 가장 최근에 번역한 글은 "베트남의 청동북에 왜 한자가 써있을까?"입니다. 켈리 교수님께서는 이 글을 2015년에 쓰셨으니 지금은 이 주제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계실 가능성도 있겠네요. 그럼에도 워낙 재미있는 주제라서 감히 첨언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우선, 켈리 교수님께서 쓴 내용을 요약해보겠습니다.

1) 한문이 새겨진 "베트남" 청동북이 몇 개 있는데, 개수 상으로는 매우 적다.

2) (교수님께서 글에서 언급하시는) 북 2개에 적힌 한문은 특정한 형식을 따른다. 지명과 북의 무게를 기록한다는 것.

3) 지명이 새겨진 청동기는 일반적으로 제사용이고, 2개의 북에 적힌 지명은 오늘날 베트남의 지명을 가리킨다.

4) 청동기의 무게를 기입한 것은 이상한데, 무게추로 이용한 청동기에만 그런 명문이 새겨져있기 때문이다.

5) 그러므로 이 북은 2가지 서로 다른 성격의 정보를 담고 있다. 지명(제사용 목적)과 무게(실용적 목적).

6) 켈리 교수님은 이 북은 "녹여서 다른 것으로 주조하기 위해 가져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7) 어쩌면 이 북들은 마원(馬援) 장군이 오늘날 베트남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정복한 뒤 청동북을 녹여서 말 동상으로 만들었다는 한대(漢代)의 전설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8) 해당 전설은 기존 힘의 상징인 청동북을 정복자가 자신의 힘의 상징으로 재주조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9) 그렇다는 것은 이 2개의 북은 녹여서 재주조하는 과정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몇 안되는 케이스다. 


제가 처음으로 이 가설에 대해서 읽고는 굉장히 신이 났습니다. 불가사의한 명문이 새겨진 청동북, 상징적 힘 사이의 갈등, 문명의 파괴, 유물을 통해 증명해내는 전설... 흥미진진하죠!

그래서 저는 청동북에 새겨진 명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습니다. 켈리 교수님께서는 고고학자 응우옌 비엣 박사님의 웹사이트로 이어지는 링크를 제공해주셨더군요. 여기서 응우옌 박사님의 일부 논문을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2개의 청동북은 아래와 같은 명문이 새겨져있습니다. (여기서는 편의상 A와 B라고 부르겠습니다.)

A)
回河州 / 鼓 / 重量千百八十
지명 / 용도 / 무게

B)

玖甄 / 重六均五斤八 / 名曰富 / 第未十一

지명   /   무게    /    이름    /    번호

네, 북 두 개 모두 지명도 적혀있고 무게도 적혀있네요.

그런데 응우옌 박사님에 따르면 이것과 아주 유사한 형식을 따르는 한문이 적힌 청동 유물은 2개가 더 있다고 합니다. 단지 이번에는 청동북이 아니라 청동 항아리입니다.

응우옌 박사님은 명문을 아래와 같이 해독했습니다.

C)
龍縣 / 重六 (衡) / 名曰果 / 第未五十二 / 容一廿一斗七升半升
지명  /  무게   /   이름   /   번호   /   용량    

D)
累樓  /  壺  / 容 一石 / 名曰萬歲 / 第未十六
지명 / 용도 / 용량 / 이름 / 번호  


제가 보기에 가장 이상한 점은 항아리 용량(얼마나 되는 부피를 담을 수 있는지)을 기재한 부분입니다. 

물론 청동 "항아리"도 상징적 제사 도구였을 수 있습니다. 사실, 중국의 청동기 중에는 항아리(솥)가 정말 많죠.

그리고 이 청동기들을 모두 재주조하려고 했다면, 무게를 기록하는 것은 말이 됩니다. 켈리 교수님께서 주장하셨듯이, 이걸 녹였을 때 청동을 얼마나 얻게 되는지를 기록하기 위함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용량을 기재하는 건 녹인다고 할 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보기에는 실용적인 정보 (무게와 용량)가 새겨졌다고 해서 이 청동기들이 파괴될 운명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D를 보면, 무게 정보는 없고 용량만 기재되어있기도 하죠.

그러니 보다 유력한 해석은 아마도 새로 획득한 물건에 여러가지 치수를 적어놓은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명문을 새긴 사람은 이 물건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었던 거죠. 이름, 용도, 어디서 왔는지, 등등.

그리고 번호까지 붙여서 기록한거죠. 11번 물건은 북, 16번 물건은 호리병, 52번 물건은 항아리...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모든 청동기에 번호를 매기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처음에는 이런 물건을 몇 개만 수집할 생각이었다가 너무 많아진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저도 이 물건들이 현지인들에게 상징적인 물건이었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래서 부(富), 만세(萬歲), 결실(果) 같은 강력한 상징적인 이름들을 갖고 있던거겠죠.

그리고 베트남 북부 현지에 대해서 잘 모르는 (정복자는 아니더라도) 강력한 외부인이 수집했다고 생각합니다. 
(응우옌 박사님도 명문에 "이름"이 기재되어있는 점에 대해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이 물건들이 파괴된 뒤에 다른 물건으로 재주조될 계획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항아리를 보면 계속해서 쓸 목적의 정보가 기입되어있거든요. 예컨대, 이 호리병에는 물을 얼마나 많이 담을 수 있나, 같은 거요.

또 어쩌면 "외부인"이 새롭게 획득한 물건의 문화 역사적 지식의 일환으로 기록을 하고 있었던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나는 유사 사례로는 15세기 중국인이 고동(古銅)에 대해 쓴 글이 있습니다.

참칭자 진우량의 후손들은 황주(黃州) 지역에 흩어져 살았고 모두 비루한 사람들이다. 그 중 한 집안이 유(卣, 돔 모양의 뚜껑이 달린 술주전자)를 갖고 있었는데 그 제도가 몹시 오래되었다. 나의 벗 오원벽이 황주부(黃州府) 판관으로 부임했을 때, 채단(彩段) 한 단()을 주고 바꿔왔다. 좁쌀이 한 말(斗)이나 들어갈 만큼 크고, 안팎으로 황토색이 많은데, 간간이 붉고 푸른(朱翠) 색이 들어갔다. 금은동(金銀銅)으로 도금되어 있었다. 이미 변해 있었는데, ()자형 글자가 많이 새겨져 있었다. 참으로 상()대의 물건이다.

主陳友諒之苗裔,散處於黃,皆樸魯之人。有一家藏一,其制甚古,吾友吳元璧判府,以彩段一端易之。大可容粟,內外多黃土色,間有朱翠,錯以金銀銅之質。已化矣,文多丁字,商物也。

크레이그 클루나스의 장물지(pp. 99)에 인용된 구절입니다. 


마지막으로, 켈리 교수님께서는 식자층이 "정보를 기록하려는 학구열이 넘쳐서" 무언가를 기록했다는 생각을 꺼리신다는 걸 알지만, 또 모르는 일이죠. 어쩌면 외부 침입자들이 그날따라 특히 기분이 좋았는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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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19/01/21 20:50 # 답글

    아니 짤 때문에 하지마루도옹!! 이 자동재생됬잖아
  • 남중생 2019/01/21 21:11 #

    비트를 타면서 읽으시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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