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19세기 조선의 물담배... 그리고 안동소주! 용틀임하는 동아시아 근세

앞서 소개드린 오주연문장전산고 인사편-용기류 마당에는 피클드 헤링과 훠로우 만드는 법만 실려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도 이규경이 변증하는 재미난 물건을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



작년에 아래와 같은 1910년 베트남 과거시험 전시(殿試) 문제와 모범답안을 소개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실런지요.

[문제]
역경(易)이라는 책은 광대하고 두루 갖추었다. 13괘를 상상(尙象)해서 제기(制器)하였으니, 계사(繫辭)에서 말한 바가 상세하다. 지금 역경을 공부하는 자는, 64괘에서 취해서 제기(制器)하는 정심(精心)을 볼 수 있는가? 근래 신서에서는 묵적(墨翟)을 중국 격치가(格致家)의 시초(初租)로 밀고, 역경은 다루지 않는다. 그리 말하는 것은 타당한가? 부당한가?


[모범답안 中]
서양인이 말하는 이(理)는, 사행(四行)보다 정밀한 것이 없으니, 선천정위(先天正位)한 음양사상(陰陽四象)의 괘입니다. 서양인이 말하는 기(氣)는, 십자(十字)보다 정밀한 것이 없으니, 하도오수(河圖五數)의 종횡십자(縱橫十字)의 설입니다. 이를 미루어보면, 건(乾)이 말하는 바는 '하늘의 운행은 굳셈'(天行健)이니, 곧 천문으로 고증할 수 있고, 곤(坤)이 말하는 바는 '두텁게 물건을 실음'(厚載物)이니 지리에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칭(稱)은 '물건을 고르게 펼침'(物平施)이니 중학(重學)의 시초이고, 리(離)는 '겹친 빛이 이어서 비춤'(重光繼炤)이니 광학의 시초이며, 물과 불에는 기제(旣濟)와 미제(未濟)가 있으니 또한 화학의 시초가 아니겠습니까? 


"물과 불에는 기제와 미제가 있으니 또한 화학의 시초가 아니겠습니까?"


이때 설명드렸다시피, 주역에서 미제는 불이 위에, 물이 아래에 있는 상태를 일컫고, 
기제는 그 반대로 불이 아래, 물이 위에 있는 상태입니다.

미제 상태에서는 위로 타오르는 불과 아래로 흐르는 물이 제각각의 성질만을 따라서 화합이 이뤄지지 않고,
기제 상태에서는 불과 물이 화합을 이루는 좋은 상황이라는 것인데요.

수증기가 올라가 구름이 되어 비를 내리고...
이렇게 물의 순환이 이뤄짐으로써 만물이 소생하는 현상을 "기제"의 가장 직관적인 형태라고 설명하기도 하더군요.



오늘 소개하고 싶은 기록은 바로 이 "기제" 현상에 대한 글입니다.

이름하야,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수화기제로변증설!


다만 잘 띄어 읽으셔야 합니다.

수화기_제로_변증설이 아니라, 수화_기제_로_변증설입니다.^^ 

-------------------------------------------------------------------------------------------------------------------------------



명물학(名物學)에서는 아무리 작고 지엽적인 것이더라도 군자가 하나라도 모르는 걸 부끄러워 했으니, 곧 상세하지 않으면 쓸모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수화기제로(水火旣濟罏) 같은 것이 있다. 의서(醫書)를 보면, 후대 사람이 무슨 기구인지 몰라서, 제약(製藥)하는 자는 이것을 버리고 익히지 않았다. 

서충(徐充)의 <난매유필(暖妹由筆)>에서 이르기를, "우리나라(國朝, 명나라)에서 만든 기물 중에 이전 시대에 없었던 것들은, 유건(儒巾), 난삼(襴衫), 접선(摺扇, 쥘부채), 위병(圍屛, 두르는 병풍), 풍령(風領, 추울 때 두르는 옷), 주반(酒盤), 사방두건(四方頭巾), 망건(網巾), 수화로(水火罏)이다."라고 하였으니, 수화기제로(水火旣濟罏)가 황명(皇明)에서 만들어져 나왔음을 누가 알았으며, 또 수화로(水火罏)가 우리나라(我東)의 속칭으로 고리(高里)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일찍이 옛날 중국에서는 어찌 이런 제도가 없었겠는가? 단지 제도와 모양과 명칭이 조금 달랐을 뿐이다. 수화로(水火罏)는 생각컨대, 옛날의 솥(鼎) 종류로 내(鼐)와 자(鼒) 따위이다. <삼재도회(三才圖會)>에는 "솥(鼎) 중에 큰 것은 내(鼐)라고 부른다. 둥글게 위에 덮는 것(圜弇上)은 자()라고 부르는데, 위를 덮는 것으로 주둥이가 작은 솥이다. 바깥에 달린 손잡이는 익(釴)이라고 부른다." 또 복(鍑)이라는 것이 있는데, 가마(釜)와 비슷하나 주둥이가 좁다. 주둥이 위에 덮어놓는 역()이 있다. 복(鍑)은, 위로는 증(甑)처럼 구울 수 있고, 밑으로는 역()처럼 삶을 수 있다. 

(...중략...)

서현호 광계(徐玄扈 光啓, 서광계)가 쓴 <감저소(甘藷疏)>는 다음과 같다. "고구마 술로 만드는 소주법. 고구마 술을 냄비에 넣는다. 주석 투구를 덮는다. 찐다."

웅삼발(熊三拔, 사바티노 데 우르시스)의 <태서수법(水法)>에는, 약을 증류하는 법(取藥露法)이 있다. "먼저 구리 냄비를 만드는데, 바닥은 평평하고 주둥이는 똑바르게 한다.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고,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크기는 상관없고, 전체 높이는 4~5 촌이다. 다음으로는 주석 투구를 만든다. 주석(錫)을 쓰거나 은(銀)을 쓰는 것이 가장 좋다. 투구처럼 만들어, 위에는 손잡이(提梁)가 달렸고, 밑에는 주둥이가 있다. 

(...중략...)
  
지금 수화로(水火罏)의 제도를 생각컨대, 놋쇠와 구리로 만드는 것을 상(上)으로 치고, 그 다음은 자기(瓷)로 만드는 것을 중(中)으로 치고, 그 다음은 오자(烏瓷), 석간(石間), 주자(硃瓷)를 하(下)로 치는데, 도기(陶土)로 빚은 것을 최하(最下)로 친다. 또는 떡갈나무(堅木)와 느티나무(黃楡)로 만드는데, 속칭으로는 귀목(龜木, 느릅나무)이라고 한다. 대개 옛날의 유목언(柳木甗, 버드나무 언)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우리나라(我東)에서는 고리(高里)라고 부른다. 그 모양은 위아래로 머리가 둘 달렸는데, 크기는 항아리(甁腹)만하다. 그 허리는 꿀벌 허리처럼 가늘다. 그 속은 위아래로 구멍이 뚫려 서로 통하게 되어있다. 그 허리 중간에는 대롱을 달아놓아 비스듬하게 흘러나오는데, 이름을 병도(柄道)라고 한다. 곧 이슬이 나오는 관이다. 대개 바깥에서 이것을 보면, 장고언(杖鼓甗) 같다. 즉, 요고통(腰鼓桶)이다. 가운데 허리가 미세하게 바깥을 향해 굽어있어서, 편하게 이슬(露)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소주를 증류할 때, 수화로(水火罏)를 쓰는 것은, 온갖 약을 증류하고자 할 때, 주석 투구를 쓸 수 있는 것과 같다. 


중원(中原)에도 수화로(水火罏)라고 칭하는 것이 있다. 곧 담배 피우는 통(煙盃)이다. 통(盃) 아래에 물그릇(水盒)을 놓는데, 그 기구는 모두 황동(黃銅)으로 만든다. 얼핏 보면 소총(小銃頭)을 닮았다. 형상이 심히 기이(弔詭)하다. 일본인 겐타쿠 오오츠키(玄沢大槻)의 저서 <언록(蔫錄)>에 실려있는 바에 따르면 무굴 제국(大莫臥兒國)의 물담배 기구와 서로 견주어 변증하니, 서로 혼동해서 오인하면 안 된다. 듣기로, 중원(中原)의 갈보집에서 이 제도를 많이 쓴다고 한다. 우리나라(我東)에서도 어쩌다 나온 적이 있다. 그래서 나도 볼 수 있었다. 한번 빨아보았는데, 평소에 쓰는 것보다 나을 바가 없었다. 

(번역은 제가 했기 때문에, 오역은 모두 제 탓입니다...)
============================================================================================================================================



이 기록은 재미있는 점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소개한 증류법, 소총처럼 생긴 청나라의 아편 파이프와 무굴 제국의 물담배, 그리고 일본 난학자 오오츠키 겐타쿠의 이름은 왜 거꾸로 썼는지...ㅋㅋ

하지만 하나만 뽑아서 이야기해보자면, 
이규경이 (과거에도 비슷한 원리의 기구는 있었겠지만) 수화기제로를 "황명"의 발명품이라는 점에서 감동하고 있고, 이것을 조선의 소줏고리와 직결해서 이해한다는거죠. 

반청복명 의식과 조선의 향토 문화에 대한 인식, 일본과 예수회를 포함한 더 넓은 세계로부터 지식을 얻고자하는 갈증... 이 모든 것에 대한 열망이 부글부글 끓다 못해 수화기제로 변증설 속에 자욱하게 맺혀있는 듯 하네요.


제가 과거에 이 블로그에서 이야기한 여러가지 로(爐/罏)도 있었는데요.

명나라 선덕 황제가 주문제작했다는 설정의 가짜 유물 "선덕로(宣德爐)"는 청나라 골동품 시장에서 대유행했다고 하지만, 명나라의 유물이라는 이유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조선인들도 선덕로를 수집했습니다.

한편 이규경 같은 호기심 넘치는 학생도 안전한 화학실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든 네덜란드인의 화로, 포이로(布爾爐)도 있었지요. 

저는 수화로(水火罏)도 이 두 화로와 함께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덕로처럼 명나라에 대한 그리움을을 불러일으키는 "유물"이면서도 동시에 실생활에 유용한데다가 과학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도구"이기도 했기 때문이죠.
===================================================================================================================================


P.S. 그리고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구글도 이규경 선생님과 동의한다는 겁니다.ㅋㅋㅋㅋㅋㅋ



P.S. 2 
안동소주와 소줏고리에 대해서 더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필로테스 님의 <소주> 이야기
등의 글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핑백

  • 남중생 : 이덕무와 소주 2019-02-09 21:43:57 #

    ... 지난 번</a>에는 이규경이 이야기한 안동소주라면, 이번에는 이규경의 할아버지 이덕무가 이야기하는 세계각국의 소주입니다.^^--------------------------------------------------------------------------------------------------------- "수화기제로(水火旣濟罏)가 황명(皇明)에서 만들어져 나왔음을 누가 알았으며, 또 수화로(水火罏)가 우리나라(我東)의 속칭으로 고리(高里)라 ... more

  • 남중생 : 10만 누적 방문객, 그리고 19세기 조선인이 본 무굴 제국 2019-03-09 00:36:01 #

    ... --------------------------------------------------------------------- 10만 HIT 달성 기념 아무글 대잔치 지난 글에서 이규경이 오오츠키 겐타쿠의 "언록(蔫錄)"이라는 책을 인용한 것을 흥미롭게 보았는데요.그렇다면 언록이라는 책은 어떤 책인지, 혹시 인도 사람들이 담배를 ... more

덧글

  • 동두철액 2019/09/11 18:56 # 답글

    이규경은 도대체 어디서 이런 책들을 구했을까요? 다양한 문헌을 인용하는 모습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 남중생 2019/09/11 18:58 #

    그러게요! 참 대단한 것 같아요.
  • 남중생 2019/09/11 21:19 #

    아, 생각해보니 나름대로의 답이 있었네요ㅋㅋ 이규경의 할아버지가 이덕무였습니다!^^
  • 동두철액 2019/09/11 21:37 #

    아...이덕무라 하면 청장관전서 속 인용서적을 참고했을 수도 있겠군요.
  • 남중생 2019/09/11 21:39 #

    뿐만 아니라 방대한 양의 서적을 보유했거나, 보유한 사람들과 인맥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해요 ㅎㅎ
  • 동두철액 2019/09/11 22:12 #

    생각할거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