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네덜란드 풍설서] 쇄국정책과 쇄국체제는 다르다 (97-98) 아란타 풍설서




쇄국조법관(鎖國祖法觀)의 탄생

일본으로 눈을 돌려보자. 17세기 후반에 삼번의 난이 수습되고 대만 정씨 세력이 항복한 것을 계기로 하여 동중국해가 평화로워지자, 대외관계도 안정되어갔다. 17세기에는, 제1장에서 서술한 "4개의 창구"(쓰시마 창구, 사츠마 창구, 마츠마에 창구, 나가사키 창구)를 통해서, 제각각 관장하는 이씨 조선, 유구, 아이누, 중국(인) 및 네덜란드(인)하고만 관계를 이어나간다는 틀이 정립되었다. 이 틀은 18세기에 실태로 정착되고, 고정되어갔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러시아인이 치지마(千島), 사할린(카라후토華太)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 영국, 프랑스의 측량선이나 영국, 미국의 포경선과 모피무역선이 일본의 근해에서의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 때, 전통적인 관계가 있는 국가나 사람만으로 교섭상대를 한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규범의식(후지타 사토루藤田覚 선생님은 "쇄국조법관"이라고 부른다)이 생겨났다. 이 장에서 다루는 것은, 그러한 "쇄국"의 실태가 체제로 서서히 정착하고, 외부로부터의 새로운 자극에 의해 그 체제가 지켜 마땅한 것으로 변해간 시대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17세기의 "쇄국"이 키리시탄 금교의 일환으로써의 정책 단계의 문제였던 것에 비해, 그 정책이 실태로 정착한 것에 발맞춰 18세기 말의 "쇄국"은 체제로서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18세기 말에 네덜란드 공화국이나 동인도 회사가 소멸해버렸을 때조차, 나가사키의 상관(商館)은 네덜란드 국기를 게양한 채 존속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수 많은 상관 중에서, 회사보다 장수한 것은 나가사키 뿐이다.


이러한 시기에 네덜란드인이 풍설서를 통해 알리고자 한 것, 혹은 실제로 알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종래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풍설서의 내용이 형식화되고 간략해졌다"(국사대사전國史大辭典)고 간단하게 이야기해왔다. 실제로, 에도시대 중에서도 이 시기의 대외관계는, 비교적 안정되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일본만을 생각한다면, 형식화되고 간략해졌다고 말해도 지나친 위화감은 없다. 그러나 이 시기 세계는 크게 움직이고 있었고, 네덜란드는 그 파도에 휩쓸렸다. 혹시 그것을 전달하지 못했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출처: 松方冬子, オランダ風説書, (中公新書, 2010), pp. 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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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동두철액 2019/01/12 16:47 # 답글

    풍설서가 간략히 적혔다는건 단순히 네덜란드가 일본에게 상세힌 정보를 주기 싫어서 라고만 생각했는데 시야를 확대하여 네덜란드의 정세도 고려할 필요가 있군요.
  • 남중생 2019/01/13 16:45 #

    오호호, 그 점에 대해서도 곧바로 나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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