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베트남의 가장 위대한 유사역사학자 인도차이나 ~Indochine~

Liam Kelley 교수님의 Vietnam's Greatest (unknown/unrecognized) Historian을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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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가장 위대한 (유사) 역사학자

필자는 낌 딩(Kim Đinh)이라는 사람이 쓴 글을 읽으면서 올 여름을 보내고 있다. 낌 딩은 가톨릭 신부였고, 철학자였으며, 역사학자로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남베트남에서 방대한 양의 글을 썼다. 낌 딩의 글을 읽고 있자니, 낌 딩이 베트남 역사상 가장 대담하고 창의적인 역사학자라는 결론을 금방 내릴 수 있었다.

짧게 말하자면, 낌 딩은 천재였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아무도 낌 딩의 작업에서 천재성을 발견한 사람이 없으며, 동시에 다른 천재들이 대개 그렇듯이 낌 딩도 자신의 주장을 너무 멀리 밀고 나갔다.

그 결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낌 딩이 누구였는지 모르거나, 낌 딩의 학술적 성과를 무시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크나큰 실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설명하겠다. 


낌 딩의 글을 읽기 전까지, 필자는 낌 딩의 이름만 들어보았고 다른 사람들이 낌 딩에 대해 쓴 글만 읽어본 상태였다. 이렇게 얻은 정보로 필자가 떠올린 낌 딩이란 인물은 유교 경전(오경五經)이 궁극적으로 비엣 민족의 저작이며, 그 결과 우리가 지금 "중국" 문화라고 여기는 것은 사실 원래 "비엣" 문화라는 정신나간 주장을 한 극단적 민족주의자였다.

낌 딩이 궁극적으로 이와 같은 주장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낌 딩이 그러한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지적 여정은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학문 사상들을 거친 것이었고, 그래서 필자는 낌 딩이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베트남 역사학자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최고"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낌 딩의 지적 여정은 마르셀 그라네(Marcel Granet)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라는 두 프랑스 석학의 글을 거쳐갔다.

마르셀 그라네는 중국학자인 동시에 사회학자였다. 그라네는 한문 고전에 나와있는 것에 사회학적 설명을 찾아내고자 한 최초의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 작업을 통해, 그라네는 (중국 안팎의) 사람들이 고대 중국을 바라보는 방식을 뒤바꿔놓았다.

그라네는 시경(詩經)을 재해석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수 세기 동안 중국의 학자들은 시경을 도덕의 맥락에서 해석햇다. 그러나 그라네는 시경을 지역 제례와 축제의 산물로 보았으며, 중국 학문 전통에서 나온 도덕적 해석과는 무관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어쩌면 낌 딩의 저술에 더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은 그라네의 중국 사상(La pensée Chinoise)이었다. 이 빽빽하고 방대한 저술을 통해 그라네가 증명해보이려 한 것은 음양 이원론이나 오행(五行)의 수리적 원리 등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개념들이 사실 수리적인 개념일 뿐 아니라 사회 구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구조주의자들이 "기호"라고 부른다.) 그리고 친족 관계나 혼인과 같은 현상을 관찰하면 이들 사회 현상이 배열되고 실행된 방식에서 위 개념들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라네의 중국학 관련 저술은 서로 다른 시기의 문헌을 구별하지 않은 것으로 베른하르트 칼그렌(Bernhard Karlgren) 등의 학자들이 비판했지만, 사회과학자로서의 작업은 구조주의 인류학의 주인공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학자들의 작업에 영향을 주었다.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은 브로니스와프 말리노프스키 등의 학자들의 사상에 대립하면서 등장하였다. 말리노프스키는 사회를 관찰하고 관찰 내용을 해석함으로써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레비-스트로스는 전세계적으로 사회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표면보다 깊이 내려가 사람들의 행동에 밑거름이 되는 사상의 "구조"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른 이해가 가능해지며, 전세계적으로 공통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낌 딩이 1960년대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글을 읽었을 때, 낌 딩은 표면 아래에 있는 "구조"가 무엇인지는 마르셀 그라네가 이미 밝혀냈다고 생각했다. 바로 음양이나 오행 같은 것이었다.

더욱이, 낌 딩은 이 모든 것이 "비엣" 민족의 것이라고 여겼다. "중국"의 것이 이후에 베트남으로 "유입"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엇다. 낌 딩이 저술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낌 딩이 중요한 이유는 뭘까? 우선, 필자가 아는 한에서 근대 베트남 역사 상 진정으로 다학제적(multi-disciplinary)인 역사학자는 낌 딩이 유일하다. 학문이 다학제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주 많이 언급되는데, 다학제적이려면 다양한 학문 분야의 "최신"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 베트남 학계에서는 이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많은 학자들은 그저 여러 분야에서 정보를 "선별"해서 기존에 갖고 있는 (대개 국수주의적) 자기 주장에 끼워맞춘다.

반면에 낌 딩은 여러 분야의 최신 학문성과를 알고 있었다. 낌 딩은 소쉬르(언어학), 레비-스트로스(인류학), 그라네, 크릴(Creel), 니덤(모두 중국학), 푸코(철학) 등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학자들의 주장에 기반해서 자기 주장을 세웠다. 진정으로 다학제적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낌 딩의 저술에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마르셀 그라네의 저술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낌 딩은 문헌들을 구별하지 않았다. 낌 딩에게는, (기원전에 쓰인) 사마천의 사기(史記)나 시경(詩經)에 담긴 내용은 15세기에 쓰인 영남척괴 등에 담긴 내용과 마찬가지였다. 낌 딩이 보기엔 이 모든 문헌에 담긴 정보를 써서 문헌 기저에 놓인 의미 "구조"의 존재를 보일 수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반면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인류학자들은 당대 ("원시적인") 사회들을 조사함으로써 주장을 세웠고, 사용한 정보가 서로 다른 시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러한 점이 인류학자들의 주장을 훨씬 더 설득력 있게 했다. 


학자들이 이론을 써서 대담한 주장을 할 때 학문이 진보한다. 종종 주장이 "지나치게" 대담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다른 학자들이 그 주장을 반박하고 보다 합리적인 이해를 세운다. 결국 학문이 진보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에드워드 사이드, 베네딕트 앤더슨, 제임스 스콧 같이) 대담한 주장을 하는 학자가 있는 것은 좋다. 왜냐하면 다른 학자들이 그 주장을 반박하고 수정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대담한 주장을 반박하는 학자도 원래의 주장을 내놓은 학자만큼 이론들을 잘 알아야 한다. 

낌 딩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낌딩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대담한 주장을 해서 베트남 역사의 이해를 (지나치게 멀리) 진전시켰다. 그러나 당시에는 낌 딩만큼의 이론 지식을 보유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낌 딩의 생각에 대한 생산적인 반박이나 수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결과 낌 딩은 무시당하거나 조롱당했을 뿐이고, 낌 딩의 생각을 잘못 이해한 경우도 있었다.

이는 안타까운 일인데, 필자가 보기로 근대 이래 옛 비엣(남) 역사를 진정으로 새롭게 해석해낸 베트남 역사학자는 낌 딩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낌 딩의 주장을 무효화하려면 낌 딩의 주장과 소통해야 한다. 현재로썬 아무도 그것을 해내지 못했다. 누군가 그것을 해낸다면 (마치 오늘날 학자들도 여전히 마르셀 그라네의 저술에서 통찰력을 발견하듯이) 낌 딩의 주장에서 통찰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 통찰을 통해 역사학계가 진일보할 것이다.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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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마르셀 그라네의 시경 해석을 소개한 deokbusin 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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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트남의 가장 위대한 (유사) 역사학자</a>"였다. 비록 낌 딩은 철학 전공이었지만 고대 동아시아사에 대한 글을 방대하게 썼는데, 요약하자면 비엣 민족은 중국 한족 보다 먼저 중국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비엣 민족이 오늘날 사람들이 "중국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지적 전통의 근간을 창조했다는 것이었다. 위의 글에서 필자가 주장하고자 한 바는 비록 낌 딩이 (기록에 없는 정보에 기반한 주장을 내놓는 등) 전문 역사학자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여러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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