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베트남의 구미호 이야기 인도차이나 ~Indochine~

영남척괴열전 한국어 번역본을 구매했습니다.^^ 책을 손에 넣은 김에 기념 번역을 하겠습니다.

▲15세기 승룡성의 지도. 오른쪽에 서호(西湖), 이하(珥河), 소력강(蘇瀝江)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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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주검, 서호(西湖), 중세 베트남의 인구 구분

영남척괴열전(嶺南摭怪列傳)은 15세기에 집성된 짧은 이야기 모음집이다. (그러나 일부 내용은 더 이른 시기에 처음 작성되었을 수도 있다.) 오늘날 베트남 학자들은 영남척괴열전이 "민간"에서 수 세기에 걸쳐 전해내려온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남척괴열전이 "베트남 민족"의 오랜 역사를 증명해준다고 여긴다. 그러나 영남척괴열전을 읽어보면, 이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영남척괴열전에 실린 "여우의 정령 이야기(狐精傳)"를 보면서 이 점을 살펴보자. 

昇龍之城,昔號龍編地,上古無人居焉。李朝太祖泛舟珥河津,有雙龍引舟,因名焉,而都之,即今之京華城也。初,城之西有小石山,東枕蘇瀝江,山下之穴,有白狐九尾,壽千餘年,能化為妖怪,變化萬端。或為人為鬼,遍行民間。時傘圓山下,蠻人架木結草為屋。山有神靈異,蠻人奉事之。常教蠻人耕織,作白衣衣之,因名曰白衣蠻。九尾狐化為白衣人,入蠻眾中,與同歌唱,誘取蠻人男女,藏於小石岩穴。蠻人苦之。龍君遂遣水府六部眾引水而上,攻破小石岩穴。九尾狐走之,水府部逐之,破穴,獲狐啗之。其破處成深淵,今呼為狐屍潭(即今之西湖也)。遂立祠觀(今金牛寺),以鎮壓其妖。湖之西岸,原野平地,民田而耕,今呼為狐洞。土地高爽,民屋而居,今呼為狐村。其狐穴,今呼為魯卻村。

승룡성(昇龍城)은 옛적에 용편(龍編)이라고 불렀는데, 상고시대에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조(李朝) 태조(太祖)가 이하진(珥河津)에 배를 띄웠을 때 두 마리 용이 뱃길을 인도한 데서 '승룡'이란 이름이 붙었다. 태조는 마침내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으니, 곧 지금의 서울이다. 

원래 성 서쪽에 작은 돌산이 있었으며 그 동쪽으로 소력강(蘇瀝江)이 흘렀다. 산 아래 굴에는 흰 구미호가 살았는데, 나이가 천 살이 넘어 요상한 일을 일으키며 그 조화가 무궁했다. 구미호는 사람이나 귀신으로 화해 민간에 돌아다녔다. 

당시 산원산(傘圓山)에는 만인(蠻人)들이 나무를 엮고 풀을 꼬아 집을 짓고 살았다. 만인들은 이 산의 신령을 잘 받들어 섬겼다. 산신령은 만인들로 하여금 밭 갈고 길쌈을 해 흰 옷을 지어 입게 했다. 그래서 이 만인들은 백의만(白衣蠻)이라고 불렸다. 구미호는 흰 옷을 입은 사람으로 화하여 만인들 속에 들어가 함께 노래를 불렀으며 만인의 남자와 여자를 꾀어 돌산의 바위굴로 데려갔다. 이 때문에 만인들은 괴로웠다.

용군(龍君)은 마침내 수부(水府)의 병졸들을 뭍으로 올려 보내 돌산을 공격해 깨뜨려 버리게 했다. 구미호가 달아나자 수부의 병졸들은 그 뒤를 쫓았으며, 구미호를 잡아서 먹어 버렸다. 부서진 돌산은 깊은 못이 되었는데, 지금 여우 주검 못(狐尸潭)이라고 불린다. (지금의 서호西湖가 그곳이다.) 마침내 그 곁에 절을 세워 요사한 기운을 눌렀다. (지금의 금우사金牛寺다.) 못 서쪽 언덕의 평평한 들판에서는 농사를 짓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여우 동(狐洞)이라 부른다. 지대가 높은 곳에는 백성들이 집을 짓고 사는데, 그곳은 여우 촌(狐村)이라 불린다. 그리고 여우가 살던 바위굴은 지금도 노각촌(魯卻村)이라 불린다.[1]

논점: 

이 이야기는 여우 정령(狐精)에 대한 것이다. "여우 귀신"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여우는 전세계의 우화에 등장하지만, 이 이야기는 명백히 중국의 문학 전통에서 나오는 방대한 여우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구미호라던가 천년을 묵었다는 언급은 모두 이 이야기의 저자가 중국의 여우 이야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민간"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한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으로부터 나왔음이 명백하다.

이야기 결말을 보면 이 논점이 더욱 명백해진다. 이야기 마지막에 나오는 지명들은 모두 "여우"를 뜻하는 한자(狐)와 연관이 있다. 당시 베트남 식자층이 중국 문헌을 읽어서 이 글자를 알았을 것이고 "호(hồ)"라고 발음했을 것이다. 위에서는 지명들을 의미대로 번역했지만, 글자가 원래 어떻게 발음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이 이야기에 언어유희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우 시체 못(狐屍潭) = 호 터이 덤(Hồ Thây Đầm)

서호(西湖) = 베트남어에서는 호 떠이(Hồ Tây)지만, 한문에서는 반대로 써서 떠이 호(西湖)다. 

여우 마을(狐村) = 호 톤(Hồ Thôn)

"여우 동굴"과 "여우 마을"은 원래 "호 동굴"과 "호 마을"이라고 불렸는데, 사람들이 "호"의 의미를 몰랐을 거라고 필자는 추정한다. 이 지명에 익숙한 어느 학자가 지명의 "호(hồ)"와 서호(西湖)의 "호()"라는 한자를 연결한 이야기를 짓고는 여우 이야기를 지어내 위 지명들을 모두 엮었는데, 왜냐하면 1) 여우를 뜻하는 한자(hồ)는 "호수"를 뜻하는 한자(hồ)와 소리가 같을 뿐더러 동(洞)과 마을(村)의 이름도 역시 호(hồ)였기 때문이고, 2) 저자가 중국 여우 이야기를 잔뜩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그의 이야기에는 "서호" (호 떠이Hồ Tây)와 놀랍게도 유사하게 들리는 "여우 시체"(호 터이Hồ Thây)가 등장하게 되었다. [주석: 위 이야기에서 말이 되지 않는 유일한 이름은 노각촌(魯卻村)인데, 다른 사본에서는 호로(狐魯) 또는 로호()로 되어있다. 로(lỗ)는 베트남어로 "구멍"이나 "굴"이라는 뜻이고 호(hồ)는 여우를 뜻하는 중국어이기 때문에, "여우 굴" 같은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글을 읽는 사람만이 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고, 이것은 "민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그 내용을 보면 당시 홍하 삼각주에 살던 이들 사이에 구분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산원산의 "만인"에 대한 언급이 하나의 사례다. 서호 근처의 "동(洞)"에 대한 언급은 또다른 사례다. "동(洞)"이라는 용어는 비중국인이 다스리는 국경지대의 행정구역을 가리키기 위해 중국에서 만든 말이었다. 서호 근처에 동(洞)이 있었다는 것은 중국이 베트남 북부를 지배했던 시대에 생긴 지명이 이후로도 계속 쓰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당시 베트남 식자층이 해당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어딘가 이질적이라고 느껴서 그런 지명으로 불렀을 수도 있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여우 정령 이야기가 1) 식자층의 이야기라는 것이고, 2) 홍하 삼각주의 인구가 구분되어있었음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간"에서 전승된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단일한) "민간"이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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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희병 교수님 팀이 번역한 "베트남의 신화와 전설"(돌베개, 2007)의 국역문에 가장 가깝게 옮겼으나, 마지막에 등장하는 노각촌(魯卻村)은 켈리 교수님의 저본에 맞추기 위해 변경했다. 박희병 교수님 저본에서는 노호담(魯狐潭)이라고 되어있다. 또한 지명들을 뜻을 살리는 방향으로 고쳤다. 

P.S.
동물 이름에 얽힌 지명을 고증하는 대만의 "엇갈린 시작" 포스팅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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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진냥 2018/12/07 19:05 # 답글

    호오, 영남척괴열전은 저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런 시각에서 해석하는 점도 흥미롭군요!
    영남척괴열전에서 베트남의 전설적인 시조인 신용군이 염제의 후손이라는 서술도 있지요. 이 또한 중국 신화가 유래이니... 예전에는 한반도의 신화적인 시조로 치우를 비정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따르면 베트남과 한반도는 형제인가.. 라는 생각을 했었더랬습니다=ㅁ=/
  • 남중생 2018/12/08 12:32 #

    베트남에서 신농이 차지하는 위치도 흥미롭습니다! 전갈자리 별자리도 “신농 자리”로 부른다는군요.

    베트남의 시조설화에 대한 글도 기회가 되면 번역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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