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베트남의 청동북에 왜 한자가 써있을까? [청동북]

Liam Kelley 교수님의 Documenting the Destruction of Bronze Drums를 번역합니다.
원문에 링크가 잘못 걸려있거나, 링크 주소가 바뀐 경우, 또 한자가 잘못 표기되어있는 경우에는 번역에서 고쳤습니다.

이번 포스팅과 연관해서 읽을 과거 글은,

켈리 교수님께서 청동북에 대해서 쓴 이전 글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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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북을 파괴하려 했다는 기록

홍하 삼각주 지역에서 발견된 청동북 중에 한자가 적혀있는 것이 있다.

어떤 북에는 회하주(回河州)라는 지명과 함께, 북의 무게가 기록되어있다. 
(回河州鼓重兩千百八十二)

또다른 북에는 구진(玖甄, 끄우 쩐)이라는 지명과 함께, 북의 무게, 북의 이름(부, 富)을 기록하고 있으며, 11번째 북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玖甄重六均五斤八兩名曰富第未十一)


오늘날 "중국"이라고 부르는 지역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청동 제기(祭器)에 글씨를 새기는 전통이 있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겪었다. 주나라 시대 초기에는 상당히 긴 명문(銘文)도 종종 있었다.[1] 



필자는 청동기 명문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위 정보가 맞다면, 앞서 살펴본 두 청동북 명문은 제기(祭器)에 새기는 정보와 도량형에 새기는 정보가 혼합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기와 마찬가지로, 두 청동북은 회하주와 구진이라는 지명을 언급한다. 회하주라는 지명은 들어본 적이 없으나, 구진은 진나라 때 지명으로 오늘날 베트남을 가리킨다. 그러나 문헌에 기록된 구진이라는 지명은 다른 한자(九眞)를 쓴다.

지명에 더서, 두 명문은 모두 북의 무게도 언급한다. 이것은 독특한데, 필자가 배운 바로는 실제 도량형에만 무게를 기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제사에 쓰인) 청동북에 무게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을까?

케틀벨 트레이닝

이 두 개의 북은 녹여서 다른 것으로 주조(鑄造)하기 위해 가져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가설이다. 

한나라의 마원(馬援) 장군은 기원후 1세기에 청동북을 노획해 녹인 다음 청동 말의 모양으로 주조했다고 한다.

현지인으로부터 힘의 상징을 빼앗아가서 자신이 쓸 새로운 힘의 상징을 창조해내는 방법으로 보인다.

이 북들이 쯩 자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마원 장군의 원정 때의 것인지, 그보다 이른 시기의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북의 무게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볼 때 그 글자를 새긴 사람은 북을 제사에 쓰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추측할 수 있다.


두 북은 노획품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녹여지는 운명을 용케도 피한 한편, 나머지 북은 파괴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이렇게 되면 명문이 새겨진 청동북의 숫자가 매우 적은 이유를 설명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지명은 북을 노획한 장소를 가리키고, 무게는 북을 녹였을 때 얼마나 되는 청동을 얻을 수 있는지 보이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평정된 지명을 기록한 것이고, 새로운 힘의 상징을 주조하는데 쓰일 청동이 얼마나 되는지 보이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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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동 제기(祭器)에 글씨를 새기는 전통
"솥(향로)은 제국시대 이전 통치 방식의 적절한 상징물이었다. 당시의 왕은 청동기를 통해 제례를 수행했으며, 동시에 부와 권력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솥이 제국 이전의 통치("봉건" 통치라고 불리기도 한다)의 핵심에 있는 제례 질서, 천연자원과 인적자원의 통제, 혈연 및 의로 맺어진 혈연 관계를 상징했다면, 이를 대체한 통치 방식을 상징하는 물건으로는 도장만 한 것이 없었다. 상속받지 않는 관직 간의 더 추상적인 관계로 이루어졌으며, 규율과 기록으로 진행되는, 관료화, 법제화된 국가의 통치 방식을 말한다. 서주 왕조(약 1045-770 BCE)의 왕은 (봉건 군주들에게) 권력을 위임할 때, 청동 그릇의 안쪽에 위임하는 내용을 새겼다. 청동기에는 동맹이나 전투 같은 중요한 사건을 기록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행위의 목표는 황제와 (실제, 혹은 만들어진) 친족 간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시공을 초월해 확장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 브루스 러스크 교수, 진시황의 옥새를 발견했는데... 이제 어쩌면 좋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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