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근세 일본과 약용 수은 이야기 (2) Recipes Project: 사후약방문

Recipes Project 합동 블로그의 Seiseinyū and secrets: problems of recipe attribution in early modern Japan를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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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유의 비밀: 약 제조법의 저자를 둘러싼 문제

다니엘 트램바이올로

▲매독 의사 토쿠지츠 쥰쵸쿠(篤實淳直)[1]. 후나코시 킨카이(船越錦海)의 "회본매창군담(絵本黴瘡軍談, 1838)"의 주인공. 
와세다 대학 도서관 제공.

지난 글에서는 근세 일본 의사들이 진사성(陳司成)의 매창비록(黴瘡秘錄, 1636)에 처음 등장하는 생생유(生生乳)라는 수은 약물 제조법을 알아내려고 하면서 마주친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비록 일본 의사들은 궁극적으로 생생유 제조법을 알아내기는 하였으나, 중국, 유럽, 일본 사이에서 서적과 사상이 복잡하게 이동하던 당시 상황으로 인해 제조법을 아는 의사들도 제조법의 출처에 대해서는 혼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장 상세한 생생유 제조법으로 손꼽히는 사본은 18세기 말에 하루히 겐안(春日元庵)이라는 의사가 썼다. 자신의 조상 하루히 겐료우(春日元亮) 시절부터 가문에 대대로 전해내려온 제조법이며, 하루히 겐료우는 1711년 나가사키에서 "세이루켓탄"이라는 네덜란드 의사로부터 제조법을 전수 받았다고 하루히 겐안은 주장했다. 하루히 겐안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이 비법을 공유하기를 꺼렸다고 믿었고, 자기 가문이 이 제조법을 알고 있다는 데에서 큰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니 하루히 겐안이 일본에서 재판된 진사성의 "매창비록"에 하루히 가문이 몇 대째 비법으로 간직해온 것과 동일한 제조법을 발견했을 때 느낀 당혹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금 고민한 뒤, 하루히 겐안은 일의 전말을 설명하였다. 세이루켓탄으로부터 조상님이 비법을 전수받았을 무렵, 중국인들도 17세기 초 유럽인 방문객들로부터 비법을 배웠고, 전사성은 자신이 고안한 비법인 것처럼 포장하려 한 것이다.분명 중국 의사와 유럽 의사 모두 매독이 나타난지 얼마 되지 않아 매독 치료에 수은 약물을 이용하기 시작하는 점은 흥미롭고, 해상 접촉을 통해 수은을 사용한다는 생각을 서로 주고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유럽과 동아시아의 수은을 이용한 매독 치료법은 세부 사항에서 차이가 있고, 개별적으로 발달하였다고 결론짓는 것이 안전해보인다.

▲매독 치료제로 이뤄진 군대가 매독 귀신을 물리치고 있다. 후나코시 킨카이, 회본매창군담(1838). 
와세다 대학 도서관 제공.

그렇지만 하루히 가문이 베일에 싸인 네덜란드 의사 "세이루켓탄" 앞으로 생생유 제조법의 출처를 돌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확답을 내놓기는 불가능하지만, 18세기 동아시아에서의 의서 유통 및 활용에 대한 배경 지식이 조금 있다면 타당한 가설을 제시할 수 있다.

매독 치료를 받고자 한 환자들은 "양과(瘍科)" 전문가를 찾곤 했는데, "양과"란 증상별 치료와 외과 시술을 적용하는 분야였다. 18세기 유럽의 외과수술과 해부학은 당시 동아시아보다 발달해있었고, 일본 의사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일본 양과 의사가 보기에 매독 치료법이 중국보다는 유럽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럼에도 일본 양과 전문가들은 중국의 수술 전통에 대해서도 알았을 것이고 서재에 수술 관련 중국 고전 몇 권은 비치해두었을 것이다. 일례로 창양경험전서(瘡瘍經驗全書)라는 책이 있다. 창양경험전서의 초판은 1568년에 나왔고 1717년 증보판에는 "매창비록"이라는 장이 추가되어있었다. 청양경험전서의 증보판을 내면서 전시성의 책을 저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끼워넣은 것이었다.

근세 일본의 의사들은 흔히 청양경험전서 같은 의서를 베껴 사본을 만들곤 했는데, 접할 수 있는 판본이 나가사키를 통해도 수입된 고가의 책 뿐이었을 땐 더더욱 그랬다. 책 여러 편에서 부분부분을 베껴 한 권의 사본으로 만들 수도 있고, 한 권의 책을 여러 권의 사본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 결과, 저자 진위나 방대한 문헌에서 따온 부분의 출처는 불명확해지기 십상이었다. 하루히 가문의 창양경험전서 사본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라면, 생생유 제조법의 원출처는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었고,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의사로부터 나온 가문의 비법이 등장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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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의사의 이름은 아니고, 독실하고 순직하다는 의미의 가명을 써서 후나코시 킨카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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