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중러무역 전쟁, 그리고 대황 수출금지령 Recipes Project: 사후약방문

----------------------------------------------------------------------------------------------------------------------------------

주소가(珠巢街)에서 저를 찾으셔요 - 청나라에서 만병통치약으로 통한 대황 환약 

허 비엔(He Bian)

18세기 말, 화기삼이라는 미국산 인삼이 청나라에서 새로운 틈새시장을 열고 있었다.[1] 그와 동시에, 청 제국의 북서부 지방에서 채취한 대황(大黃) 뿌리는 중국 상인들에 의해 동남부 연안까지 운반되어 칸톤에서 외국인 고객들에게 판매되고 있었다. (그림1) 대황 교역의 일부는 유구 왕국(오늘날 오키나와 열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유구국은 청나라의 조공국인 동시에 서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세계 무역의 주요 거점이었다.[2] 1789년 청나라 조정은 유구 국왕에게 조서를 내려, 청나라가 대대적인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던 상대인 러시아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황을 판매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청나라가 고안한 전략에서 대황은 무척이나 중요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는 유럽인들이 대황을 워낙 많이 수입해서 하루라도 대황이 없으면 못 버틸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림 1. 중국 대황 (혹은 터키 대황, Rheum palmatum): 열매가 열리는 부위인 꽃대와 이파리 그림. 
M. A. Burnett의 그림을 본 뜬 아연 판화. 1842년 경. 출처: 웰컴 도서관, http://wellcomecollection.org/works/cvty3qqk 

그렇다면 과연 근세 중국과 유럽의 의약학적 시각이 너무 다른 나머지 대황의 성질에 대해 동의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을까? 고전 중국 의서는 대황이 "몹시 찬" 성질을 띈 약재라고 기록하였고, 이후 여러 세대가 지나도록 의사들은 찬 성질의 대황을 차가운 기운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써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그렇다면 대황을 만병통치약처럼 쓰는 러시아인은 (그리고 이 근세 영국에서의 대황에 관한 글에 보이듯이, 다른 서양인도) 청대 중국인들과 체질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했다.[3] 다시 말해, 의약학 이론은 좁힐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차이를 가시화했다. 

그러나 최근 필자는 청대 약방문 책을 읽으면서, 청나라에서도 대황이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이 쓰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경(嘉慶, 1796-1829) 연간에 등장한 편용양방(便用良方)이라는 문헌을 읽어보면 이를 명백히 알 수 있다. (2권 분량 밖에 안 되게) 간결하고 (목판으로 찍어) 인쇄 품질이 아주 좋은 편용양방은 증상별로 환약, 가루약, 술에 타먹는 약, 탕약을 분류한다. 쪽수로는 120쪽 분량이고, 대부분의 약방은 몇 줄 길이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13쪽이나 차지하는 몹시 긴 약방문을 보고는 놀랐다. 비수청녕환(秘授淸寧丸)이라는 이 약방은 "수십 근"이나 되는 양질의 대황 뿌리가 주재료다. 껍질을 깨끗이 벗기고 쌀뜨물에 담군 다음, 채썰고, 햇볕에 말리고, 3일 간 "그을음 없는 좋은 황주(無炭好黃酒)"로 가공한 다음, 15차례 찜통에 들어가는 길고 정교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 매번 찔 때마다 다른 약초가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결과물로 나온 대황 반죽을 "누렁소의 젖"(우유가 없으면 대신 불에 익힌 꿀), 사내아이 소변, 생강즙과 섞어서 작은 환약으로 빚는다. 약방문에 따르면 두통에서 출혈 증상과 부인병까지 이르는 수백 종의 일반 병명을 비수청녕환으로 고칠 수 있다고 했다. 

그림 2. 나본립 편저. 편용양방. 2b권, 50b쪽. 1796-1820년경. 프린스턴 대학 도서관. 
http://pudl.princeton.edu/objects/fn107159v에서 PDF 다운로드 가능.

필자는 더 이른 시기의 중국 의서에서 이 약방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초탐(初探) 결과에 따르면 아무리 일러도 17세기부터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비수청녕환은 18세기에 널리 유행하였는데, 당시 약방을 기록한 서적들을 보면 얼마나 널리 퍼져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편용양방의 마지막 쪽(그림 2)을 보면, 편저자 나본립(羅本立)은 중국 남서부 귀주(貴州)에 파견나갔을 때 대황 환약을 잔뜩 만들어놓았다면서 긴급시에는 독자들이 "주초가(珠巢街)에 있는 우리집까지" 몸소 찾아와서 "병부에서 일하는 나씨네 집(兵部羅宅)"을 물으면 된다고 한다. 청대의 북경에 위치한 골목인 주초가는 자금성 근처였고 당시 부동산 가치로 따지면 노른자위 땅이었다. 국경 지방에서 복무한 무관이었던 나본립은 당대 의학적 관습에 덜 매여있었고 이처럼 정교한 환약을 제조하기 위한 금전적, 정치적 자본을 소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당시에는 나본립 같은 무관들이 이끄는 보건/의학의 하위문화가 고전적 처방과는 별개로 존재했던걸까? 

마지막으로 이 약방문을 통해 근세 중국에서 서로 다른 문화세계가 연결되어있었다는 힌트를 찾아볼 수 있는데, 중세 문헌을 꼼꼼히 살피며 고대 문헌의 흔적을 추적한 손성연(孫星衍)이라는 유명 학자가 학술 서적을 내면서 똑같은 비수청녕환 약방을 출판했다는 것이다. 고대 문헌 사이에 청대 문헌을 끼워넣었다는 것 때문에 현대의 문헌학자들은 혼란을 겪었고 심지어 비수청녕환의 약방문을 쓴 주인공이 7세기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손성연은 이것이 당대의 약방문이는 것을 명확히 밝혔을 뿐 아니라 대황이 뜨거운 기운과 찬 기운의 질병을 모두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의 효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정교한 학술적 주장을 덧붙였다. 손성연은 또한 "상스러운 의사들"은 비수청녕환을 싫어한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누구나 다 이 처방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의사로서의 생업이 끊기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황을 놓고 볼 때는 청나라에서 러시아인들에 대해 상상한 것 만큼 당대 중국의 문인과 무인도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
* 원주: 이 흥미로운 사건에 대해서는 창 처챠(Chang Che-Chia)가 쓴 훌륭한 글(페넬로피 바렛 번역)을 추천한다. 

(역주: 창 처챠의 글에서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청나라 조정은 대황이 변비약이라는 중의학 이론에 따라 러시아의 대황 수입을 이해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생선을 주식으로 하는 러시아인이나 육류와 유제품을 먹는 영국인의 식습관 때문에 대황과 차를 많이 필요로 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정작 서양 의학에서 대황은 변비약을 포함한 다양한 약에 들어가는 재료였을 뿐이다. 이렇듯 중국과 유럽의 의학 이론의 차이에 따라 대황의 효능에 대한 생각이 크게 달랐다는 주장에 대해 허 비엔은 자신의 주장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역주:
[1] 18세기 말의 화기삼 교역에 대해서는, 적륜재에서 1784년 화기국 뉴욕, 화기삼(花旗蔘)의 출현... 참조.

[2] 유구국의 약재 교역에 대한 또다른 에피소드는 [느릿느릿 유구만화 21] 유구의 다시마 편 참조.

[3] 서양과 동양의 서로 다른 체질, 그리고 먹거리에 대해서는 역시 적륜재의 18세기 동아시아 크로스보더 파티장 - 왜관 그리고 데지마 (下) 를 참조.
"자, 이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타이먼 스크리치는 이런 설명을 위의 책에서 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외국인들을 접하면서 이들이 어떻게 그들과 다른지 같다면 어떻게 같은지와 같은 의문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체신서와 같은 네덜란드 외과의학서가 번역되고 난학자들이 주로 난방의(蘭方醫)들의 분야에 천착하면서 해부와 분석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의견에 동의하는지는 차치하고, 음식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의문이 되고 해석이 됩니다. 이방인들은 일본인이 몸에 안좋다고 꺼리는 음식(주로 육식이겠지요)을 먹는데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다른 인종의 외양이 다른 것이 요리 탓이라면 다른 나라 음식을 먹으면 결국 이방인의 신체가 되는가? 그런데 우선 점차 중국요리가 퍼지면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구나 하는 이해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통신사가 가는 루트를 통해 조선 음식의 조리법이 전해지게 된 것도 조금씩 이해가 확장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란다 음식의 경우는 여전히 상당히 이해가능한 레벨 저 너머에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4] 저자는 고전 의서에 기반한 문인 및 유의(儒醫) 들의 세계와 구분되는 실용주의적인 무관들의 의약 문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가 거두어들인다. 
개인적으로는 손성연이 말하는 "상스러운 의사"와 대항하는 새로운 의학 지식의 세계는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보이는 일본의 난학과 유사한 맥락에서 말이다. 


P.S. 사실 영어로 "중국(China)"이라는 말을 처음 쓴 책에서는 "대황" 이야기 바로 밑에서 중국을 언급하고 있다. (기사)




핑백

  • 남중생 : RECIPES PROJECT 원문 게재 순서 2018-11-18 23:21:02 #

    ... 아 전기2017년 9월 26일 - 14세기 중국의 외과 수술과 마취제2017년 12월 14일 - 19세기 중국의 불임치료 2018년 5월 15일 - 중러 무역전쟁, 그리고 대황 수출 금지령2018년 8월 2일 - 그리스 로마 및 이슬람 세계에서는 어떻게 열을 조절했나? 2018년 8월 14일 - 중세 처방전으로 보는 열과 여성 ... more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