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불교적 근대성3] "섬라왕이 월남국 부처임금님께 글을 보냅니다" [과거시험과 근대화]

Liam Kelley 교수님의 The Shared Worldview of the Siamese and the Vietnamese를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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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과 태국이 공유한 세계관

알렉산더 우드사이드의 "베트남과 중국식 모델"에는 응우옌 왕실과 차크리 왕실 사이에 오고 간 서한들이 언급되어있다. 두 왕국의 정사 역사책에도 물론 양국 관계에 대한 정보가 실려있지만, 우드사이드가 언급한 서한이 두 왕국이 주고 받은 실제 문서라면 대남식록에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교류의 요약 뿐이다.

그러니 이 문서들은 한결 복잡하다. 베트남 측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은 가륭제가 라마 2세에게 보낸 편지 몇 편과 차크리 왕실이 베트남 조정으로 보낸 문서의 번역본이다. 이 문서들은 고전한문과 쯔놈이 혼용되어있고, 다시 말해 태국어로 쓰인 편지 원본을 번역한 것이다. 태국에서 보낸 원본 편지 몇 편 정도는 방콕에 있는 국립도서관에 있을 법하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것은 훌륭한 연구 주제인 것이다. 태국의 원본 편지를 1) 고전한문/쯔놈 번역본과 비교하고 2) 섬라와 베트남 양국의 편년체 정사에 궁극적으로 쓰인 내용과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으리라.

1989년 마이클 에일란드(Michael Eiland)는 "용과 코끼리: 1782-1847년 베트남과 시암의 관계"라는 학위논문을 썼다. 이 논문에서 에일란드는 시암과 베트남이 판이한 세계관을 갖고있었다고 주장하며, 양국 간의 분쟁이 일어난 하나의 이유는 서로 다른 문화적 관점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필자는 이 논문이 설득력이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생각하면 할 수록, 지정학적 힘이라는 실질적인 문제 외에도 바로 유사한 세계관을 공유했다는 점 때문에 시암과 베트남 관계가 분쟁으로 번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베트남과 시암 모두 "외교 관계"라는 것을 위계적이거나 불평등하다고 보았다. 한쪽이 왕이면 다른 한쪽은 신하인 것이다. 평등의 개념은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시암과 베트남 사이의 문제는 실질적으로 대등한 관계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대남식록이나 프라랏차퐁사와단을 읽어보면, 위계적인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베트남 사료에서 태국으로 사신단을 보내는 것을 언급할 때는 선물을 "증(贈)"한다고 되어있다. 즉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런데 태국의 역사서를 보면 베트남인들은 선물을 "타와이(ถวาย)"하러 온 것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모순이 있다. 양측은 스스로를 높이는 식으로 정보를 기록하였으나, 공식적으로는 어느 한 쪽도 상대에 비해 높지 않았다. 더욱이, 두 왕실이 주고 받은 편지(베트남 측에 남아있는 몇 편)에 쓰인 그대로 보자면, 양국이 교류할 때 위계질서 없이 교류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서한에 쓰인 언어는 공손하되 위계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래에 실은 두 편지는 라마 2세가 가륭제에게, 가륭제가 라마 2세에게 보낸 편지인데, 각 편지의 첫번째 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섬라왕이 월남국 부처임금님께 글을 보냅니다. 폐하(陛前)께서 옥람(玉覽)하시옵고...

暹羅王書達越南國佛王,陛前玉覽 . . .

월남국왕이 섬라국 부처임금님께 공손히 글을 올립니다. 폐하(臺前)께서는 옥람(青覽)하시옵고...

越南國王肅書于暹羅國佛王,臺前青覽 . . .

말했듯이, 이 편지들은 공손하지만, 위계질서를 표현하지는 않는다.

두 군주가 서로를 "부처임금님 (佛王)"이라고 부른 것은 분명 흥미롭다. 일종의 대등함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겠다.

결론적으로, 베트남 측과 시암 측이 공식적으로 만났을 때 실제로 일어난 일과 나중에 양측이 회담에 대해서 기록한 바는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두 민족 간의 "충돌"이 서로 다른 세계관 때문이 아니라, 유사한 세계관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실질적인 단계에서는 두 민족이 서로 교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등한 관계로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측 모두 대내적인 사정으로 이 관계에서 상위에 있음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같은 필요는 시암과 베트남이 마찬가지로 갖고 있었으며, 결코 달성할 수 없었는데, 양자관계에서 두 명의 갑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베트남과 시암 사이의 판이한 세계관이 갈등으로 이어졌다기 보다는, 이 공통된 인식이 갖는 모순이 두 민족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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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바람불어 2018/10/18 17:49 # 답글

    아...동남아 나라들끼리 저렇게 외교한 걸 한문으로 보다니 참 신기하군요. 게다가 만났을 때는 대등, 혼자서 내 역사 쓸 때는 내가 위. 그건 아무래도 나의 '국내적 위상'땜에. 재미있습니다.
  • 남중생 2018/10/18 18:52 #

    "불왕"이라는 표현을 찾아 썼다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불교적 근대성...의 실마리!! (하악하악)
  • 2018/10/19 19:5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10/19 20:1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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