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가륭제와 쯔놈 [과거시험과 근대화]

Liam Kelley 교수님의 Gia Long and Nôm을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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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륭제와 쯔놈


1971년에 펴낸 책 "베트남과 중국식 모델"에서 알렉산더 우드사이드는 (동남아시아적) "베트남"과 19세기 응우옌 왕조가 도입하려 한 식자층의 문화사상과 관행에 기반한 "중국식 모델"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우드사이드는 이 주장을 하면서, 중국식 모델을 따르게 하려는 인위적인 노력이 들어가지 않는 한 베트남 사람들은 따르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한다. 베트남어를 기록하는데 쓰인 민중문자, 쯔놈 문제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18세기 말, 떠이 썬의 난이 일어나 "중국식 모델"을 강요하기 어려웠던 혼란기에는 놈 문자를 사용하는 것으로 다시 돌아갔으며, 응우옌 왕조 초기의 가륭제 연간에는 계속해서 놈을 썼다는 것이다.

우드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놈은 19세기 초두에 그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 가륭제는 놈을 장려했고, 스스로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1814년 법령에 따르면 북부 현 지방 정부에 서기실(書寫司, thư tả ty)를 만들었을 때, 50명의 관료가 특히 '남조와 북조의 글자체를 쓰는데 능숙해야 한다'고 적고 있었다. 남(쯔놈)이 북(중국어) 보다 우선한다는 것이 시대정신이었다." (54)

다시 말해, 우드사이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든 사람이 "중국식 모델"을 따르고 고전 한문으로 글을 쓰는 것을 가륭제가 선호했겠지만서도, 떠이 썬의 난이 일어난 이후 몇 년 동안은 놈이 "인기의 절정"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륭제는 이러한 현실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다.

1814년에 설립한 관직에 "남조와 북조의 글자체" 양쪽 모두를 쓰는데 능통한 사람들을 뽑으라고 명령함으로써 순응한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남조"의 글자체가 먼저 언급되었다는 사실이 우드사이드에게는 동남아시아적 요소가 부상해 한화된 식자층이 도입하고자 한 "중국식 모델"을 밀어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역사 사건을 더 면밀히 보도록 하자.


응우옌 왕조 초기에는 왕국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있었다. 조정은 중부 후에(Huế)에 위치했고, 북부와 남부는 군벌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왕국의 북부는 그 지역의 정치적 중심지인 하노이에 있는 성을 가리켜 북성(北城)이라고 불렸다.

우드사이드가 언급하였듯이, 가륭제는 1814년 북성에 관직을 설치하는 것을 윤허하였다. 우드사이드는 이 관직을 "서기실(secretariat)"이라고 불렀지만, 이들의 직책은 문서 사본을 작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 필자는 직책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 "서사관(copiers office)"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북성의 서사사(書寫司) 설치에 대한 정보는 행정 문서와 규정 모음집인 "흠정대남회전사례(欽定大南會典事例)"가 출처다. "흠정대남회전사례"는 베트남어 번역본이 있는데, 이 번역본은 우드사이드가 이해한 방향과 다르게 번역되어있다. 베트남어 번역본 작성자들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가륭제] 13년 (1814년), 명령이 내려와 북성에서 글을 잘 쓰고 글자체에 밝은 사람들을 가릴 수 있도록 하였고, 서사사를 세우는데 남과 북에서 50명의 사람을 뽑도록 하였다."

[Năm thứ 13, (1814) theo lời tâu chuẩn cho Bắc Thành xét thực người viết tốt, tự thể tinh khéo trong Nam ngoài Bắc lấy 50 tên, lập làm ty Thư tả.]

그리고 나서 번역가들은 주석을 달아 이 구절을 두 가지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1) 남조의 글자(쯔놈)와 북조의 글자(한문)을 모두 잘 쓰는 50명이 뽑혔다

2) (베트남의) 남과 북에서 글씨를 잘 쓰는 50명이 뽑혔다.

우드사이드는 서사관들이 쯔놈과 중국어를 모두 알아야 했다는 식으로 이 구절을 이해한 반면, 베트남어 번역가들은 서사관이 왕국의 북부와 남부에서 모두 뽑혔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필자는 두 해석 모두 틀렸다고 보며,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큰 맥락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성에 서사사가 세워지기 1년 전, 수도 후에에도 서사사가 세워졌다.

이 서사사 설립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글을 잘 쓰고 재주가 좋은 50명을 가려뽑아 서사사를 세운다"고 되어있다.

다시 말해, 이 기록에는 "남조/남부"나 "북조/북부"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북성에 서사사가 설치된 것에 대한 기록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겠다.

"[가륭제] 13년 (1814년), 명령이 내려와 북성에서 글을 잘 쓰고 남북의 글자체에 밝은 사람들을 가리고, 50명을 뽑아 서사사를 세우도록 하였다."

[十三年奏準北城核實善書南北字體精工五十名立為書寫司。]


여기서 핵심은 북성 서사사의 관료들이 "남북의 글자체에 밝은" 사람들이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이들이 놈을 알아야 했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1) 당시 놈은 대개 "소리(音)"나 "말(語)"이라고 언급되었지 글자(字)가 있는 글(文)이라고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2) 베트남 북부는 당시 전국에서 경학의 중심지였다. 그러니 북성에는 쯔놈을 아는 관료들이 필요한데 다른 곳에는 필요가 없었을 이유가 있겠는가?

"남북의 글자체(南北字體)"라는 말은 한문을 쓰는 다른 양식을 의미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19세기 초까지 수세기 동안, 홍하 유역은 남부지역과 정치적으로 동떨어져있었다. 이 기간 동안, 글자체가 분화되어 버린 탓에 19세기 초 응우옌 왕조가 메콩강 유역부터 홍하 유역까지 아우르는 영토를 다스리게 되자 자신들이 한자를 쓰던 방식과 북성 사람들이 쓰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많은 중국인들이 응우옌 권역으로 이주하였고 글자체 같은 문화관행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기 때문에 놀라울 일은 아니다.)[1]

그러니 북성 지방에는 후에 조정에서 ("남방식" 글자체로 쓰인) 명령을 가지고 북방의 여러 군현들로 보내기 위해 ("북방식" 글자체로) 복사해서 보내야 했기 때문에 두 가지 글자체에 모두 밝은 서사관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더욱이, 1820년에 명명제가 왕국의 모든 사람들이 강희자전의 글자를 따라쓰도록 명령한 것도  이 두가지 한자 글자체가 존재했기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이전 포스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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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메콩강 유역)과 북(홍하 유역)으로 나뉜 상황에서 응우옌 왕조는 남부 출신이었다. 중국인이 응우옌 권역(남부)에 영향을 준 사례는 혼밥왕 가륭제 포스팅 참조.


하노이에 서사사를 설치하는 사안은 중요한 구분을 보여주는 것은 맞지만, 우드사이드가 생각한 것 처럼 쯔놈과 고전한문 사이의 구분은 아니다.

보편 중화 문명이라는 것에 참여한 두 식자층 공동체 사이의 구분을 말한다.

한 식자층 공동체는 오늘날 베트남 남부에 근거지를 두었고, 다른 하나는 북부에 두었다. 두 공동체 모두 고전한문으로 글을 썼지만, 19세기 초에는 서로 다른 글자체를 썼다.

남쪽 사람들은 자신들의 글자체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지만, 가륭제 연간에는 두 글자체가 공존할 수 있게 하였다. 명명제는 왕국을 통합하고 싶어하였고, 모든 사람이 강희자전의 글자체를 따르게 함으로써 글자체 통일을 하는 것은 그가 통합을 추구한 한가지 방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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