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1910년대 베트남의 국자감 스캔들! [과거시험과 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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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감과 1910년대 베트남의 학문사조 변화

1909년, 응우옌 조정의 개혁파 관료 팜 꽝 산은 가상의 과거시험 문제와 답안을 제공하여 서양 학문의 근원이 동양에 있으며, 동양인들은 자신들이 뿌린 지식의 씨앗을 거두기 위해 서양 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더욱이, 팜 꽝 산은 그렇게 함으로써 동양인들이 서양인들과 보다 학문적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경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년 뒤, 1910년에는 과거시험 전시(殿試)의 실제 시험 문제에서 서양 학문의 가치와 팜 꽝 산 같은 사람들이 내놓은 개혁파 신서(新書)의 가치를 논했다. 그 해 출간된 모범답안은 모든 지식은 궁극적으로 유교 경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서양 학문과 신서의 가치를 무시했다.  

그러므로 당시 기득권층 간에는 서양 학문에 대한 상이한 견해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191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그 기득권층이 대부분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필자의 생각에는 팜 꽝 산은 1909년에 책학신선(策學新選)을 펴냄으로써 일으키고자 한 변화 방향대로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즉, 옛 경전을 통해 서양 학문을 보고, 경전을 통해 서양학문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1911년에 나온 정부 출판물을 보면 2년 전에 개혁파 지식인 팜 꽝 산이 취한 방법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은 "책문신식(策文新式)"이었고, 베트남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에서 편집한 질문과 답변이 들어있었다. 

그러므로 팜 꽝 산의 개인 저서와 달리, "책문신식"은 수험생들이 써야 하는 답안에 대한 응우옌 조정의 공식 입장을 대변했다. 흥미롭게도 서양 학문에 대한 질문에서, 책문신식은 팜 꽝 산과 몹시 흡사한 사상과 접근 방법을 보여준다. 


1910년 과거시험에 출제된 역경(易經)과 지식 생산에 대한 주제를 똑같이 따라서, 1911년의 책문신식은 성현들이 "살핀" 뒤 "기물을 만든" 13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번 질문에서는 형상을 살피어 기물을 만드는 과정이 복희, 신농, 황제, 요 임금, 순 임금의 5대에 걸쳐서 일어났음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이 질문은 "시간"을 논의에 포함시켰고, 어째서 서로 다른 성현들이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기물을 만들었는지 물었다. 질문은 또한, 어떤 이유가 되었든지 그 시대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현이 만들지 못한 기물도 있는지 물었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十三挂制器尚象,皆通變宜民之事,必歷五聖而後備,將前此智慮有不及歟。兹欲與民宜之,當如何。

"13괘의 형상을 살피어 기물을 만든 것은, 모두 백성의 편의를 위해 통변(通變)한 것이다. 반드시 다섯 성현을 거쳐서 뒤에 갖추었다. 혹시 이전의 지혜로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는가?  지금 백성들이 이것을 누리게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어찌 해야겠는가?"

"통변의민(通變宜民, 통변하여 백성이 편의를 누리게 함)"과 "여민의지(與民宜之, 백성과 더불어 편의하게 함)"는 64괘의 형상을 살핀 뒤 기물을 만든 성현들에 대한 역경의 구절에 나오는 중요한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을 뒷받침하는 생각은, 성현들이 백성들을 돕기 위해 어떤 변혁을 해야하는지 아는 전문가들이었으며, 어떻게 변혁해야 백성들이 잘 적응할 수 있고 변혁에 휩쓸리거나 지치지(倦) 않을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책문신식에서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지 알아보자.

且隨時之義大矣哉。伏羲以前,干支定歲,而星曆之法所由興,架木為巢,而宮室之制所自始。一代之興,必有一代之制也。惟風氣之開以漸,聖人亦不能先天而強為,即尚象制器,如舟楫取渙,耒耜取益者,皆因時以施宜,而衣裳取諸乾坤,且必俟一元文明之會。通變宜民之事,必歷五聖而後備者,以時合如此變易耳。

"일찍이 때를 따르는 뜻은 얼마나 큽니까. 복희씨 이전에 간지(干支)로 해를 정했고, 별에서 달력을 만드는 법도가 여기서 말미암아 흥했습니다. 나무를 걸쳐 둥지를 지었고, 궁실의 제도가 비로소 생겨난 것입니다. 

한 시대가 흥함에는, 반드시 그 시대의 제도가 있습니다. 단지 풍기가 조금씩 열리기 때문에, 성인도 선천(先天)에 강요하여 행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형상을 살펴 기물을 만든 것이란, 환(渙) 괘를 취한 배 젓는 노, 익(益) 괘를 취한 밭 가는 쟁기인데, 모두 때로 인해 편의를 베푼 것이고, 건(乾)괘와 곤(坤)괘를 모두 취한 윗도리와 치마는 예로부터 보다 문명된 기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통변하여 백성이 편의를 누리게 하는 일은, 반드시 다섯 성현을 거친 뒤에야 갖추어야 했고, 때를 이처럼 맞추어 변역(變易)한 것입니다."[1]

여기서 우리는 왜 성현들이 5대에 걸쳐 형상을 살피고 기물을 반들었는지 알 수 있다. 성현들은 "때에 따르고" (隨時) 때에 맞춰 변화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현들은 필요한 모든 변화를 끝냈을까? 이 주제는 모범답안에서 아래와 같이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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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 성인들은 소리개의 꼬리를 보고 배를 만들었고, 쑥대가 날고 송곳자루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수레를 만들었으니, 그것을 볼 때, 반드시 기구를 만들어 편리하게 사용토록 하여 뒷세상까지 그 은혜로움을 남겼을 터이나, 지금까지 전해온 것이 없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정약용의 기중도설 中)



曾謂前此皆開物成務之聖,而智慮有不及哉。試時知化,古今無異道也。與民宜之,使民不倦,其在  今日乎。環球交通,文明開化,今又非黃農虞夏之時也。弧矢舟楫,昔可以威天下,可以濟不通,而今砲非火不宜,船非汽不宜矣。乘車耒耜,昔可以興農利,可以致遠途,而今車非電氣不宜,農非機器不宜矣。 

일찍이 일컫기를 전에 이것(역경에서 논한 과정)은 모두 세상을 열고 할일을 다하는 성스러움인데, 지혜로 살펴서 미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때를 시험하여 변화(化)를 아는 것은, 고금이 다르지 않은 도(道)입니다. 백성과 더불어 알맞게 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지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에 일어나고 있습니까? 

환구교통하고 문명개화하는 지금은 또 황제와 신농, 우 임금이 다스리는 하나라의 시대가 아닙니다. 활과 화살, 배와 노는, 옛날 천하에 떨칠 수 있었고, 통하지 않던 곳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포()가 불이 붙지 않으면 알맞지 못하고, 배가 증기선이 아니면 알맞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 타는 수레(車)와 밭가는 쟁기는 옛날에 농리(農利)를 흥하게 할 수 있었고, 먼 길을 다다를 수 있었으나, 지금 차(車)는 전기가 없으면 알맞지 못하고, 농사에 기기가 없으면 알맞지 못한 것입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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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동차 개발의 초창기(19세기~20세기 초)에는 전기자동차가 오히려 주류였다. 그러나 1908년 포드가 컨베이어벨트를 도입해 대량생산으로 T형차(내연기관 자동차)를 선보이면서, 전기자동차는 인기를 잃는다.

"왜 이들이 전기농업기계에 대해 보인 지대한 관심과 달리 정작 "군함"에 대해서 보인 관심은 크게 주목할만한 기록이 없는 걸까요?" (적륜재의 1883년 9월 24일 브루클린(下) - 개화문명이란 도대체 뭔가? 포스팅 中)



"기본적인 플롯은 문명의 힘으로 전 지구에 광명을 비춰 최고의 상태로 이끈다 입니다. (엑셀시오는 최상의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한편 뉴욕주를 스테이트 오브 엑셀시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뮤지컬의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전기 조명입니다. 이 뮤지컬에는 기술 담당 합작이 한명 더 있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발명왕 토마스 알바 에디슨씨입니다. 에디슨 조명회사에서 이 전기장치를 제작하였을 뿐 아니라 에디슨씨가 직접 카랄피 형제와 합작으로 중요한 등장인물과도 같은 조명을 제공하였습니다. 엄청난 PPL입니다만 ^^ 


(...)

문득 리서치를 하다가 이 장면을 보면서 훗날 조선으로 돌아간 그 다음날 아침 함께 동행한 포크 소위에게 인사차 민영익이 찾아와서 "나는 암흑에서 태어나 광명의 세계로 나갔다가 다시 암흑으로 돌아온 것 같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이 왜 나온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됩니다. 왜 전기에 그토록 다들 알고 싶어하고 갈망했는지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적륜 님의 이어지는 포스팅, 1883년 9월 25일 (4) - 브로드웨이 뮤지컬!!! 中 뮤지컬 "엑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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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성현들께서 모든 필요한 변화를 주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성현들이 살던 시대에 따른 변화를 주었지만, 현대는 상고 시대와 달랐고, 그러므로 새로운 기기를 제작할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새로 제작하는 기기들은 모두 서양의 발명품이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서양의 방식을 수용하는 것은 때를 따라서 변화를 주는 것이고, 성현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부적절해서 변화하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수용해도 된다는 논리다. 

그리고 나서 결론부에서는 경전 속 지식과 서양 학문을 합칠 것을 주장한다. 현대 용어와 고전 용어를 혼합해서 말이 다소 복잡하지만, 서양 학문으로 경전에서 나온 지식을 보충하라고 주장하는 글인 만큼 이는 의도한 바라고 생각한다. 


處競爭世界,而思以競舞臺之優勝,六學即文明攝影,固當會五洲哲理,補包犧河馬之陳編,當半開時代,而思以開智腦之精英,百工皆道器所行,尤當吸歐美全神,花雄貉仙龍之祖國。十三卦尚象,法乎聖人之意,而神化乎十三卦之義。是所望於  新政府與保護政府之籌劃特為開民智計也。

경쟁 세계에서, 경무대(競舞臺)에 올라 우승하고자 하면, 육경(六學)은 즉 문명의 촬영(撮影)이요, 고로 마땅히 오주(五洲)의 철리(哲理)를 모아, 복희(包犧)가 황하에서 나온 용마(河馬)를 보고 얻은 옛 지식(陳編)을 보충해야 합니다.  

반개(半開) 시대에서, 지뇌(智腦)의 정영(精英)함을 열고자 하면, 백공(百工)이 도()와 기(器)에 모두에 힘써, 가장 마땅히 구미(歐美)의 모든 정신()을 흡수해야, 웅락선룡(雄仙龍)의 조국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13괘의 형상을 살핌은, 성인의 뜻을 법으로 삼아, 13괘의 뜻을 변화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소망하는 바로써, 신정부(新政府)와 보호정부(保護政府)[3]의 계획(籌劃)으로, 특히 백성을 개화하는 지략(智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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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당시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총독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주제에 대해 팜 꽝 산이 쓴 글 만큼 분명하고 설득력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두 글 모두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베트남은 서양 학문을 수용하고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주장이 불분명하게 전개된 이유에는 국자감의 관료 세계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시 응우옌 조정 관료제에 속해있던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는데 반대했던 것(1910년 전시 시험 참조)을 감안한다면, 국자감 소속 사람들은 팜 꽝 산이 했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화낼 것에 대비해 덜 직설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 문헌은 응우옌 조정 관료 세계가 서양 학문 도입을 승인하고 있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이 문헌이 중요한 또다른 이유는 (문명이나 사회 간의 경쟁이라는 사회적 다윈주의 사상 등) 서양 개념이 1911년 경에는 이미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통적 기득권층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전통적 지식이 "실패"하고 응우옌 조정이 시대에 뒤쳐진 반면, 올바른 길을 알아본 혁명가들이 이들을 대체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판 보이 쩌우, 팜 꽝 산 처럼 사상이 급변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 대다수에게 있어서, 기존 학문은 "소멸"하고 대체되어야 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존 학문이 서서히 서양 학문으로 변화했다. 

경전을 통해서 서양 학문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면서 점점 더 많은 서양 개념들이 전통 기득권층에게도 일반상식이 되었고, 마침내 1919년 계정제가 최후의 전시 시험 문제를 공포하였을 때는 세계를 "상식적"(서구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만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고방식은 (1911년에 문명이나 사회적 다윈주의 투쟁 같은 개념이 그랬듯) 일반상식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이것을 "서양" 사상으로 보지 않았다. 

전통 지식이 새로운 형태로 변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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