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주역을 읽으면 증기선을 만들 수 있을까? [과거시험과 근대화]

Liam Kelley 교수님의 A 1910 Vietnamese Defense of Yijing을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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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베트남 과거시험의 모범답안은 왜 역경을 옹호했나

산업화하는 서양에서 증기선을 타고 오는 사람들은 동아시아의 식자층에게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들 식자층은 당시 동아시아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하고 진보한 기술을 발명한 사람들이 세상 저편에 있는 이유를 이해하고자 했다. 

많은 학자들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공부하던 옛 경전을 살펴보고는 서양 기술 중에 고전에 존재하지 않는 (혹은 등장할 잠재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노력에 있어 역경(易經)은 특히나 중요했는데, 역경을 보면 상고 시대 성현들이 64괘의 형상을 살핌(尙象)으로 기물을 만들었다(制器)고 써있었기 때문이다. 

역경에서 이 절차를 다룬 구절은 계사하(繫辭下)편의 둘째 마당, 둘째 꼭지였는데, 옛 성현들이 64괘를 살핀 뒤 그 중 13괘를 본따서 기물을 만든 사례들이 나와있었다.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증기선과 기차를 포함한 모든 것은 결국 형상을 살피고 본따서 만들 수 있고, 따라서 서양이 잘난 점이 하나도 없다는 느낌이 들게 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사람들이 모두 이런 생각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는데, 중국의 개혁파 사상가 양계초가 대표적인 인물이다.역경에서 서양과의 대등함을 본 사람들과 양계초는 모두 중국 동포가 서양인과 대등한 지적인 힘을 발견하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유사했지만, 양계초는 역경에서 서양 사상과의 대등함을 찾지는 않았다. 

대신, 양계초는 1904년에 전국시대 철학자 묵적(묵자)의 사상에서 서양 사상의 논리와 흡사한 논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글을 썼다. 

이 글은 당시 신서(新書)라고 알려진 문헌군의 일부였다. 

1910년 베트남 궁궐에서 열린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서 첫 문제는 이 사안에 대한 것이었다. 시험을 치른 뒤, 질문과 "모범 답안"이 출판되었고, 이 문헌은 당시 베트남 사상계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易之為書廣大悉備,十三卦尚象制器,繫辭言之詳矣。今之學易者,能於六十四卦,以有所取以觀制器之精心乎。近者新書有推墨翟為中國格致家初租,而不及易,其言當否。


역경이라는 책은 광대하고 두루 갖추었다. 13괘를 상상(尙象)해서 제기(制器)하였으니, 계사(繫辭)에서 말한 바가 상세하다. 지금 역경을 공부하는 자는, 64괘에서 취해서 제기(制器)하는 정심(精心)을 볼 수 있는가? 근래 신서에서는 묵적(墨翟)을 중국 격치가(格致家)[1]의 시초(初租)로 밀고, 역경은 다루지 않는다. 그리 말하는 것은 타당한가? 부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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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격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줄임말로, 근세~근대기에 "(서양) 과학"의 대역어로 쓰였다.  


모범 답안은 다음과 같다. (주역을 인용한 부분은 꺽쇄로 표시했다.)

且聖人作易也,萬事萬物之理,埃排出來,其為書也。有天道焉,有地道焉,有人道焉,廣大莫不悉備矣。易有以窮天下之赜,以制器者尚其象,始於漁佃之取離。終於書契之取夬。十三卦之發其凡無非通變宜民之道也。繫辭言之詳矣。學易者誠神而明之,則終日談易,而天下之理不離乎是。


일찍이 성인이 역경을 만들었습니다. 만사만물의 이치가 조금씩 배출되어 이 책이 된 것입니다. 하늘의 도가 있고, 땅의 도가 있고, 사람의 도가 있으니, 광대하고 두루 갖추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계사 하편 10]

역경은 천하의 오묘함을 꿰뚫은 것으로 [계사 상편 8], 그 형상을 살피어 기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리(離)를 취해서 물고기 그물(漁佃)을 만든 것에서 시작해서, 쾌(夬)를 취해서 서계(書契)를 만든 것으로 끝났습니다. [계사 하편 2] 13괘의 나타남은 무릇 통하고 변하여 백성을 편하게 하는 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계사전의 말이 상세합니다. 역경을 공부하는 자는 성신(誠神)으로 이를 밝힐 것이니 [계사 상편 12], 곧 하루종일 역경을 이야기하더라도 천하의 이치에서 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모범 답안은 "형상" 즉 64괘를 "살핌"으로써 만들어진 "기물"들을 검토한다. 해당 정보는 역경의 설괘(說卦)에 나온다.

모범 답안은 이 정보를 따라서 여객선이나 기차와 같은 현대 기술의 형태도 역경의 형상을 살핌으로써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離為兵戎,艮為門闕,溝瀆為坎,大輿為坤,與夫繫乘舟者有之,繫大車者有之,推之於六十四卦,亦有所取,以觀制器之精心矣。


리(離)는 검과 창(兵戎)이요, 간(艮)은 문과 대궐(門闕)입니다. 수렁과 개울(溝瀆)은 감(坎)이고, 큰 수레(大輿)는 곤(坤)입니다. 아울러 여객선(乘舟)의 제작에도 이을 수 있고, 기차(大車)의 제작에도 엮을 수 있습니다. 이를 64괘에 미루어보면, 또한 64괘를 취하여 제기(制器)하는 정심(精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객선이나 기차와 같은 새로운 현상을 제작하는데 역경의 64괘가 지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뒤, 모범 답안은 서양 지식과 과학도 역경에서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觀此則易為究神盡變之書,其歐亞家格致之大尊乎。西人言理,莫精於四行,即先天正位陰陽四象之挂也。西人言器,莫精於十字,即河圖五數縱橫十字之說也。推而至於乾曰天行健,則可考夫天文,坤曰厚載物,則可察夫地理。謙以稱物平施,則重學之始乎。離以重光繼炤,則光學之始,既濟未濟之水火,又非化學之始乎。

이를 보면 역경은 신묘함을 궁리하는 변화무쌍한(究神盡變)의 책이요, 유럽과 아시아 격치가의 대존(大尊)입니다. 

서양인이 말하는 이(理)는, 사행(四行)보다 정밀한 것이 없으니, 선천정위(先天正位)한 음양사상(陰陽四象)의 괘입니다. 서양인이 말하는 기(氣)는, 십자(十字)보다 정밀한 것이 없으니, 하도오수(河圖五數)의 종횡십자(縱橫十字)의 설입니다. 이를 미루어보면, 건(乾)이 말하는 바는 '하늘의 운행은 굳셈'(天行健)이니, 곧 천문으로 고증할 수 있고, 곤(坤)이 말하는 바는 '두텁게 물건을 실음'(厚載物)이니 지리에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칭(稱)은 '물건을 고르게 펼침'(物平施)이니 중학(重學)[2]의 시초이고, 리(離)는 '겹친 빛이 이어서 비춤'(重光繼炤)이니 광학의 시초이며, 물과 불에는 기제(旣濟)와 미제(未濟)[3]가 있으니 또한 화학의 시초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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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학(重學)은 무거운 물체를 옮기는 건축공학/기계공학의 근세적 표현이다. (적륜 님의 거중기와 기기도설 포스팅 참조.)

[3] 미제괘는 불이 위에, 물이 아래에 있는 상태. 위로 타오르는 불과 아래로 흐르는 물이 제각각의 성질만을 따라서 화합이 이뤄지지 않는다. 기제는 반대의 상황. 

마지막으로, 모범 답안은 묵자 사상에 서양 과학과 대등한 것이 있다는 양계초의 주장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이 주제는 이미 역경에 나타나있다고 결론 짓는다.

聖人既有以開戶牖于斯民,後人始因之而研夫哲理。均髮均懸,以言重學,臨鑒立景,以言光學,言化學則鑠金離木之說也。墨子所論原不外乎竹易之書。近者新書有推墨翟為中國格致家初租,而不及易,此後儒不究深淵之論也,豈足為當論哉。


성인이 앞서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니, 후대 사람이 비로소 이로 인해 밝은 이치를 닦을 수 있었습니다. 균발균현(均髮均懸, 머리카락에 무게가 균등하게 매달림)은 중학(重學)을 말한 것이고, 임감입경(臨鑒立景, 오목거울 앞에서 형상이 뒤집힘)은 광학을 말한 것이고, 화학을 말했으니 삭금이목(鑠金離木, 쇠를 녹이고 나무를 태움)의 설입니다.[4] 묵자가 논한 바의 근원은 주역 책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근래 신서에서는 묵적을 중국 격치가의 시초로 밀고, 역경을 다루지 않는데, 이는 후대의 유학자가 연원을 탐구하지 않은 이론입니다. 어찌 타당한 이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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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모두 묵자에 나오는 말이다. 

“균등하다는 것은 머리카락이 균등하게 힘을 받는다는 것이다, 가볍거나 무거워서 머리카락이 끊어지는 것은 균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볍거나 무거워서 머리카락이 끊어지는 것은 균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균등한 경우엔 끊어지지 않는다. (均髮均懸 輕重而髮絶 不均也 均 其絶也莫絶)”(<묵자> ‘경설하’) 

두 사람이 거울을 마주하고 서면, 그 모습이 뒤집어지고 커지면서 희미해지는데, 그 원인은 오목거울에 달려 있다”(二臨鑑而立, 景到, 多而若少, 說在寡區)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모범 답안에 적힌 내용에 동의했을지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이 문헌이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첫째, 이 답안은 지극히 복잡한 사상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비록 그 사상계는 20세기에 끝내 사라졌지만, 이 문헌은 1910년 식자층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 사상계가 얼마나 깊이 박혀있었는지 보여준다.  

둘째, 이 답안에 담긴 사상은 복잡한 동시에, 지극히 보수적이기도 하다. 이 답안은 반-서구 반-개혁의 성격을 띤다. 한편, 답안에서 중학과 광학과 화학을 언급한다는 점은 당시 베트남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일원들도 어느 정도는 "근대화"해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흥미로운 문헌은 우리가 여전히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다. 그 세계를 이해하는데 이 답안이 공헌하는 바가 작지 않은데, 오늘날 사람들이 이런 글에 담긴 언어와 사상을 접근하고 이해하기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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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까마귀옹 2018/09/03 09:39 # 답글

    이게 '남의 일'이 아니었죠. 구한말 조선의 지식인들 역시 '근대화'와 '자주' 사이에서 엄청난 고민을 했을테니까요.
  • 남중생 2018/09/03 10:39 #

    분명 조선에도 유사한 사례의 글이 남아있을텐데, 한 번 기회가 되면 비교해보고 싶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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