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베트남의 캄보디아 병탄시기를 재고하다 (6): 의복에 대한 샴 왕국 측의 보고 [캄보디아 병탄기]

Liam Kelley 교수님의 Revisiting the Vietnamese Annexation of Cambodia (6): A Siamese Report on Clothing을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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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캄보디아 병탄시기를 재고하다 (6): 의복에 대한 샴 왕국 측의 보고

지난 포스트에 이어서, 캄보디아 관료와 백성들이 베트남 의복을 입는다고 언급하는 사료가 하나 더 있다. 안남-샴 전쟁(Anam Sayam yut, อานามสยามยุทธ)이라는 태국 사료다.

이 저작은 1907년 최초로 출판되었고, 1971년에 재출판되었으며, 작가이자 출판업자인 K. S. R. 꿀랍 끄릿사나논(Kulap Kritsananon)이 편집한 것이다.

역사서를 쓰는 사람들 대부분이 왕실 정부에 속해있던 시절에 일반인 신분으로 역사에 대한 글을 썼다는 점에서 꿀랍은 독특한 인물었다. 그러나 꿀랍은 19세기 전반 샴 왕국의 주요 무관이자 응우옌 왕조와의 분쟁에 중대한 역할을 한 짜오프라야[1] 보딘데차(Chao Phraya Bodindecha)가 수집한 문헌군에 접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크레이그 레이놀드의 "K. S. R. 꿀랍의 주장: 19세기 후반 태국의 왕실 역사서술에 대한 도전"을 참조.)



"안남-샴 전쟁" 중 한 구절에서 꿀랍은 베트남 의복을 입는 캄보디아 관료와 백성들을 언급한다. 이 구절은 1839년에 일어난 사건과 연관이 있다. 

이 시기 역사에서 중요한 점은 19세기 전반 내내 캄보디아 왕실이 분열되어 있었고, 종종 어디에 충성할지도 분열되어있었다는 것이다. 1806년에서 1834년까지 집권한 찬 왕은 "두앙"과 "임"이라는 두 아우가 있었다.[2] 아우들은 샴 왕국에서 여러 해를 보낸 한편, 찬 왕은 샴 왕국과 베트남 응우옌 왕조 양쪽의 조공국인 캄보디아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을 높이고자 하였다.

찬왕은 응우옌 왕조의 캄보디아 "병탄" 시기 중에 서거했는데, 응우옌 왕조에서는 찬의 남동생들이 왕위를 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친섬파(親暹派)"로 보았기 때문이다.

찬 왕은 딸이 셋 있었다. 응우옌 왕조는 장녀 밴 공주도 친섬파로 여겼으나, 둘째 공주인 메이 공주는 캄보디아 왕국의 허수아비 왕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였다.


1830년대 후반의 상황은 위와 같았다. 그리고 1839년, 바탐방에서 생활하던 임 왕자가 그곳에 주둔한 샴 왕국 부대를 공격해, 고위 관료들을 생포했다. 그리고는 그 관료들을 캄보디아로 끌고 와 응우옌 왕조에게 포로를 넘기고, 스스로도 투항했을 뿐더러 (그의 가족부터 임 왕자 세력을 수행할 것을 명령받은 병사와 일반 백성까지) 수천 명의 사람들을 데려왔다.

임 왕자는 어째서 이런 일을 했을까? 대남식록에 따르면, 임은 샴 왕국의 통제하에 놓인 것에 실증을 내고 샴 왕국에 대항했다.

한편 "안남-샴 전쟁"에서 꿀랍은 다른 설명을 내놓는다.


꿀랍의 기록에 따르면 임이 바탐방에 있었을 때, "그는 유온(현재는 멸칭으로 쓰이는 "베트남인"이라는 뜻[3])이 찬의 딸, 밴 공주를 프놈 펜 정권["무앙 프놈 펜"]의 우두머리로 삼고는 캄보디아["무앙 캄보디아"]를 다스리도록 했다고 들었다.[4] 

그러나 밴은 공주였기 때문에 유온 귀족이 그녀의 통치를 지시하고 도우러 왔다.

베트남의 지도자, 명명제로부터 명령이 내려와 프놈 펜의 크메르 귀족이 유온 처럼 옷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새로운 유온"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크메르인들은 유온 법을 따르도록 강요받는다. 

크메르 귀족과 백성은 유온의 백성이 되는 것이 큰 부담이기 때문에 기뻐하지 않는다. 모든 마을과 도시에 걸친 크메르인들은 들고 일어나기 직전이다." (831)


꿀랍은 이어서,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임 왕자는 자신이 캄보디아를 통치하면 베트남 세력에 반란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적는다.

꿀랍에 의하면, 임은 프놈 펜의 응우옌 관료에게 편지를 써, 캄보디아의 통치자가 되고 싶다고 했으며, 응우옌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바탐방의 최고위 샴 관료를 끌고 오고 가족과 추종 세력도 데려오겠다고 썼다.

또 꿀랍에 따르면, 응우옌 관료가 편지에 답하길 임이 샴 영토를 벗어나 캄보디아로 온다면 응우옌 왕조가 그를 왕으로 임명할 것이라고 했다. 캄보디아 왕국 내에 남성 왕족이 없고, 그래서 공주를 왕위에 옹립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한 사실 여부는 확정짓기 어려우나, 사실이라면, 캄보디아 관료들만 "베트남" 의복을 입어야 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일반 백성의 의복 습관을 바꿔야 한다는 명령은 없었다. 

꿀랍이 기록하는 정보는 임 왕자가 "들었다"고 하는 데서 오기 때문에 검증할 수는 없으나, 캄보디아 집권층에서 응우옌 왕조와 협조하지 않는 이들(혹은 샴 왕국에 맞서싸우지 않은 탓에 응우옌 왕조가 해고하도록 명령한 이들 - 이전 포스팅 참조)은 응우옌 왕조와 협조하는 캄보디아 집권층을 싫어했을 것이다.

그리고 응우옌 관료들과 의례를 행할 때 "화풍" 의복을 입었다는 사실 만큼이나 이 관료들이 협조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새로운 유온"이라는 용어가 실제로 당시에 존재했더라면, 거기에 담긴 멸시를 감안할 때 협조하지 않은 이들이 협조적인 관료들을 지칭하는데 쓰였을 것이다. 

그러니 캄보디아 집권층 중에서 응우옌 왕조와 협력하지 않는 이들이 협력하는 이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만한 것이라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리고 임 왕자가 이러한 정보를 1839년에 "들었다"면,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임 왕자가 와서 그들이 권력을 얻는 (또는 회복하는) 것을 돕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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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국의 2품 관등, 유럽의 공작 작위와 동격이다

[2] 캄보디아 왕족 가계도. 왼쪽을 보면 찬 왕(Ang Chan)과 두 딸, 두 동생이 표시되어있다. 철자는 크메르식 표기와 태국식 표기가 다른 것으로 추정한다. 



[3] "캄보디아인들은 베트남을 멸시하여 '노예'라는 의미로 유온(Yuon)이라고 부른다.
(두산백과: 캄보디아의 주민 항목)

[4] 프놈 펜 정권과 캄보디아가 대치되는 이유(그리고 켈리 교수가 이 둘의 원문을 대조하면서 강조하는 이유)는 프놈 펜으로의 수도 이전 또한 베트남과 태국 사이의 알력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찬’ 왕은 1812년 베트남의 도움으로 수도를 우동에서 프놈펜으로 옮겼다.

친태국 성향을 가지고 있던 ‘찬’ 왕의 형제들은 방콕으로 피신했고, 그의 형제들이 태국의 도움으로 왕권을 차지할까 두려웠던 ‘찬’ 왕은 친베트남 정책을 강화한다. 

(...)

베트남은 베트남 남부와 서부의 방패로 캄보디아를 사용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보다 체계적인 관리 하에 캄보디아를 묶어두려고 하였다. 캄보디아에 다시 돌아온 왕은 건강이 약해져 1835년 갑자기 죽게 된다. 총독은 아들이 없던 ‘찬’ 왕의 둘째 딸을 여왕으로 둔다. 첫째 딸은 친태국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뉴스 브리핑 캄보디아의 [캄보디아역사탐방] 앙코르 시대 이후의 캄보디아 5


또한, 이 글도 챈들러의 책을 참고자료로 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A History of Cambodia에서 데이비드 챈들러는 "1834년 초, 텅 빈 폐허가 된 왕궁에 돌아간 찬 왕은 베트남의 더 강력한 통제 하에 놓였다. 태국이 육로를 이용한 공격에 성공함으로써 명명제는 크메르인들이 베트남 남서부 국경에 믿음직한 '울타리' 노릇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문회의 난을 진압한 뒤, 명명제는 통제력을 강화하고 집중하고자 하였다." (제 1판의 123-124쪽; 제 4판의 149-150쪽)

베트남의 캄보디아 병탄시기를 재고하다 (4): 권력 구조의 재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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