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네덜란드 풍설서] 가족관계까지 일러바치는 VOC? (79-81) 松方冬子의 아란타 풍설서

▲찰스 2세와 브라간사의 캐서린


리턴 호 사건

네덜란드 풍설서는 실제로 막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던걸까? 영향을 미친 것이 확인되는 사례로, 리턴 호 사건이 있다.

1673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일본과 통상 재개를 요구하러 나가사키로 리턴 호(The Return)를 파견했다. 히라도(平戸)에 있던 상관을 1623년에 철수한 이래의 일이었다. 막부는 요구를 거절하지만, 그 이유는 영국 왕가와 포르투갈 왕가와의 인척관계였다. 이 인척관계는 사전에 네덜란드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것이었다. 

이 사건에 관한 네덜란드인의 정보활동을 보도록 하자. (나가즈미 요우코永積洋子 씨의 연구에 의존한다.) 청교도 혁명 후 왕정복고로 왕위에 오른 찰스 2세에 대해, 네덜란드인은 1662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용은 그 해의 풍설서에 담겨있다. 

지금 영국 왕[찰스 2세]은 포르투갈 왕의 여동생[캐서린 오브 브라간사]과 결혼한 바이며, 그로 인해 그에게는 결혼 지참금으로 고아와 마카오가 주어졌습니다.
(나가즈미 요우코 "17세기 후반의 정보와 통사" 참조)

실제로는, 캐서린의 지참금은 인도의 봄베이(지금의 뭄바이)였다. 고아와 마카오에는 영국 배가 입항하는 것이 허용된 것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 2년 뒤에 마카오에 입항한 영국 배는 교역조차 허용되지 않났다. "풍설서는 영국과 포르투갈 왕실의 결혼을 발빠르게 보고하는 동시에", "'고아' '마카오' 등 일본인에게 공포를 주는 말을 늘어놓아, 교묘하게 정보를 조작하고 있던 것이다"라고 나가즈미 씨는 설명하고 있다.[1] 

1664년에도, 슈몬아라타메(宗門改)[2] 담당관을 맡은 호우죠 우지나가(北条氏長)가 영국 왕실과 포르투갈 왕실의 인척관계에 대해 상관장 폴헤르[3]에게 자세히 질문했다.

이윽고 리턴 호가 나가사키에 입항했을 때, 통사는 선장 사이먼 델보(Simon Delboe)에게 내항의 목적에 대해 물은 뒤, 영국 왕과 포르투갈 공주는 결혼한지 몇 년이나 되었는지 물었다. 결혼했냐고 질문했더라면, 결혼하지 않았다고 거짓을 고할 수도 있다고 나가사키 부교는 생각한 것이리라. 결혼한 것을 전제로 질문을 준비한 것이다. 델보는 "우리 왕께서 결혼하신지 11년이 되었습니다"(나가즈미 번역)라고 대답하여, 여기서 1662년이라고 한 네덜란드 풍설서가 옳았음이 증명된다.

리턴 호 내항 전에 막부는, 거절의 방침을 확실히 굳히지 않았지만, 영국인이 오래도록 일본에 내항하지 않았던 것, 영국 왕실과 포르투갈 왕실의 인척관계를 이유로 삼아, 통상요구를 정식으로 거절했다. 

더욱이, 이 리턴 호 사건은, 가톨릭교 국가의 배가 아니더라도 신규로 무역을 요구하는 유럽의 배는 거절한다는 선례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막부의 "쇄국" 정책은, 이후 18세기 말에 러시아 배가 내항할 때까지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즉,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계획대로, 풍설서를 무기 삼아 유럽인 중에서 일본무역 독점을 성사시킨 것이다. 

그런, 이러한 사례가 다수 발견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막부의 정책 결정 과정이나 이유가 명백히 드러나는 경우는 대체로 없기 때문이다.


출처: 松方冬子, オランダ風説書, (中公新書, 2010), pp. 79-81 
====================================================================================================
 
"실제로 1620년경부터 40년경까지 20년 가량 마카오에서 지속적으로 선교사를 밀입국시키려다가 적발되는 사건들이 이어졌습니다."

[2] 이단심문관. 서유기의 성상밟기 항목 참조.

[3] Willem Volger: 부임기간은 1663년 10월 20일 - 1664년 11월 7일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