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베트남의 캄보디아 병탄 시기를 재고하다 (5): 의복 [캄보디아 병탄기]

Liam Kelley 교수님의 Revisiting the Vietnamese Annexation of Cambodia (5): Clothing을 번역합니다.

시리즈는 각 링크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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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캄보디아 병탄 시기를 재고하다 (5): 의복


캄보디아와 베트남 사이의 역사는 길고 복잡하며, 오늘날 사람들이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분노하거나 기분 나빠하는 요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과거는 종종 역사학자들이 보고 기록하는 과거와 같지 않다. 그러므로 전문 역사학자들이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 한 가지는 과거를 최대한 정확하게 설명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과거에 대해서 생각을 할 때 실제 과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캄보디아-베트남 관계사 중에 캄보디아인들을 몹시 분노케 하고 역사학자들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사안이 있는데, 바로 응우옌 왕조의 명명제 치세(1820-1841)에는 캄보디아 사람들이 머리모양과 옷차림을 바꾸도록 강요당했다는 생각이다.


A History of Cambodia에서 데이비드 챈들러는 이와 같은 "문화 개혁"에 대해 적으면서, "크메르인이 치마 대신 바지를 입고 짧은 머리 대신 긴 머리를 해야 한다는 명령이 여기에 포함되었다"고 설명한다. 

더욱이 챈들러는 "옆트임이 없는 옷을 입거나, 훈도시를 입거나,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먹거나, 바로 서서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어서 하는 등 어느 베트남 문인이 말한 기타 '야만스러운' 캄보디아 풍습"을 언급한다. (제 1판의 126-7쪽; 제 4판의 153쪽)

챈들러는 "크메르인이 치마 대신 바지를 입고 짧은 머리 대신 긴 머리를 해야 한다는 명령"이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챈들러는 "크메르인이 치마 대신 바지를 입고 짧은 머리 대신 긴 머리를 해야 한다는 명령"이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기타 '야만스러운' 캄보디아 풍습"에 대한 출처를 찾아보자면, 1830년대 베트남의 캄보디아 병탄과는 다른 시기와 맥락에서 나온 출처다. 챈들러는 해당 사료를 잘못 이해했는데, 조악한 번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오바레(Gabriel Aubaret)가 1867년에 번역한 정회덕(鄭懷德)의 가정성통지(嘉定城通志)다. 

오바레는 한편 이 구절에 대해 몇 가지 섣부른 가정을 함으로써 19세기에 베트남인들이 캄보디아 풍습을 바꾸려고 했다는 생각에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정회덕이 쓴 내용과 오바레가 쓴 내용을 비교해보자.

정회덕(1765-1825)은 중국계 혈통으로, 굉장히 박식한 응우옌 왕조의 관료였다. 정회덕은 명명제(明命帝)가 1820년에 왕위를 승계했을 때 가정성통지를 헌상했다고 한다. 1820년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병탄"이 시작하기 14년 전이었다. 챈들러에 따르면 "크메르인이 치마 대신 바지를 입고 짧은 머리 대신 긴 머리를 해야 한다는 명령"이 있기 전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회덕은 1820년에 헌상한 책에 과연 뭐라고 썼을까?


정회덕은 당대까지의 캄보디아와 베트남 사이의 역사를 저술하는데 가정성통지의 한 부분을 할애했다.

1806년 캄보디아에는 찬 왕(1830년대 집권한 찬 왕과 동일 인물)이 즉위했다. 찬 왕의 즉위는 샴 왕국이 지지했으나 샴 왕국은 찬 왕의 두 아우에게도 호의를 보였다. 

자신의 권력 장악을 견고히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는지, 찬 왕은 응우옌 왕조의 번왕이 되기를 자처했고 (동시에 샴 왕국의 번왕이기도 했다), 1807년에 공식 행사를 통해 번왕의 자격을 승인받았다. 

이 시점부터 찬 왕과 관료들이 응우옌 왕조 관료들과 접견할 때는 응우옌 왕조의 관례를 따르는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회덕은 위와 같은 사건을 언급한 것이었다. 뭐라고 썼는지 확인해보자.


1816년에 한 행사에 대해 언급하면서, 정회덕은 찬 왕이 응우옌 왕조로부터 특별한 관복을 하사받았음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을 7월 6일, 고만국(高蠻國, 캄보디아) 문무 관료에게 관복을 하사했다. 이때부터 고만의 관민(官民)이 의복과 기물에 모두 화풍(華風)을 쓰기 시작했고, 꼬치머리(串頭衣), 둘러입는 치마(幅圍裙), 엎드려 절하기(膜拜), 박식(博食)의 모든 오랑캐 풍속이 점차 개혁되었다."

秋七月初六日,欽頒高蠻國藩僚文武朝服。從此高蠻官民衣服器用皆效華風,而串頭衣、幅圍裙、膜拜、搏食諸蠻俗漸革矣。    



이제 해당 구절을 분석하면서 무슨 뜻인지 살펴보자.

우선, 정회덕은 "오랑캐(蠻)"풍과 화(華)풍의 차이를 인식했다.

정회덕이 언급한 "화풍"이란 무엇이었을까? 응우옌 왕조 관료처럼 하는 것이었다. 즉, 특정한 의복을 입고, 고전한문을 읽고 쓰며, 상고시대에 기록된 특정 의례 절차를 따르는 것 등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정회덕에게 중요했던 것은 당시 중국과 조선의 식자층에게 중요했던 것과 일치한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보편적 절차였다. 

그렇다고 해서 식자층의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왕국/제국의 모든 백성이 자신들처럼 옷을 입고 고전한문을 배우게 강제했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당시 동아시아에는 "화풍"을 따르지 않는 수백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집권하는 식자층은 이들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식자층은 자신들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썼고, 여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조공 정치의 세계가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베트남과 조선의 사신이 조공을 바치러 북경을 방문할 때, 이들은 "화풍" 의복을 입고 궁정에서 올바른 "화풍" 의례를 거행했다.

마찬가지로 청나라 사신이 베트남이나 조선을 방문할 때, 모두들 "화풍" 의복을 입고, "화풍" 의례를 거행하는 행사를 통해 사신단을 영접했다.[1]

응우옌 왕조는 중국과 맺은 조공 관계의 절차를 캄보디아와의 관계에서도 재현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건 강요된 것일까? 이론적으로는 그러면 안 됐다. 왕국 밖의 사람들이 같은 의복을 입고 같은 의례를 숙지했다는 사실은 "화풍"의 어마어마한 힘과 흡인력을 증명해주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동아시아 문화 전통 속에서 의복과 의례에 대해 식자층이 보인 생각은 당시 서양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보인 생각과 매우 유사했다.

기독교에 내재된 힘과 선함이 새 개종자를 끌어모아야 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개종하러 올 수록 이 "진실" 또한 더욱 자명해졌다.  

[1820년 전 한 시점에서] 정회덕이 "이때[1816]부터 고만의 관민(官民)이 의복과 기물에 모두 화풍(華風)을 쓰기 시작했"다는 주장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당시에 "수백 명의 이교도들이 개종하러 왔습니다" 따위의 말을 한 것과 공유하는 바가 많다.

이러한 말이 정말로 진실이었을까? 일부만 그렇다. "수백" 명이 개종을 하러 오는 대신, 19세기 선교사들이 한 말을 우리는 대개 "몇 명을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개종시켰습니다."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고만의 관민(官民)이 의복과 기물에 모두 화풍(華風)을 쓰기 시작했"다는 말 대신에 우리는 "응우옌 왕조의 관료를 맞이하는 프놈 펜의 궁중 의례에서 캄보디아 관료들은 '화풍' 의복을 입었고 식후 만찬에서 젓가락을 사용했습니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말은 과장이었고, 높은 분들 마음에 들도록 작성된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유럽에 있는 교회 고위 성직자들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이러한 말을 적었고, 정회덕은 새로 왕위에 오른 명명제에게 올리는 1820년 보고서에 위와 같이 쓴 것이다. 

1867년, 가브리엘 오바레(Gabriel Aubaret)라는 이름의 프랑스 장교가 정회덕의 가정성통지를 번역했다. 그러나 오바레의 한문 지식은 가정성통지를 정확히 번역할 만큼 좋지 못했고, 특히 이를 번역하는데 필요한 문화적/역사적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더욱 그랬다.

오바레의 프랑스 번역을 영어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병자, 가륭제 15년, 7월 6일, 가을, 안남 황제는 캄보디아의 여러 행정 및 군사 관료에게 의례용 의복을 하사하였다. 그로부터, 캄보디아의 관료와 백성들은 의복 뿐 아니라 일상용품에도 안남 풍속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머리를 자르고, 옆트임이 없는 옷을 입고, 훈도시를 입고, 손가락으로 집어 먹고, 쭈그려앉아 인사하는 야만스러운 풍습이 매일 조금씩 사라졌다.   

정회덕이 점차 변하고 있다고 말한 4가지 풍습 중 오바레가 정확히 맞춘 것은 "손가락으로 집어 먹기" 하나 뿐이다. 

정회덕은 머리 자르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는 캄보디아 인들이 "꼬치머리(串[=貫]頭衣)"를 한다고 했고, 이는 동아시아 문화 전통에서 굉장히 흔한 "야만인"의 징표였다.

정회덕은 "옆트임이 없는 옷을 입고, 훈도시를 입는 것" 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캄보디아인들이 한 폭의 천으로 몸을 두르는 하의[2]를 입는다고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회덕은 "바로 서서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어서 하는" 풍습이 있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캄보디아인들이 땅에 엎드려 절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바레는 정회덕이 실제로 쓴 내용 중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챈들러는 이 오해를 되풀이했다.) 동시에, 오바레는 캄보디아 인구가 전부 이러한 모든 풍습을 바꾸고 있다는 정회덕의 주장을 글자 그대로 믿은 것으로 보인다. 해당 페이지의 주석에 오바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인들은 오늘날 [1860년대], 자국 풍습을 모두 회복했다. 안남국 영토에 사는 이들만이 종종, 드물지만서도, 안남[사람]과 유사한 의복을 입는다. 그러나, 여성은 캄보디아 왕국에서만 머리를 자른다. 안남인들은 머리를 길게 기르는데, 코친차이나 여성의 머리모양과는 조금 다르다."


데이비드 챈들러는 "크메르인이 치마 대신 바지를 입고 짧은 머리 대신 긴 머리를 해야 한다는 명령"이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그 어떤 증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챈들러는 (오바레의 오역을 통해) 정회덕이 더 이른 시기에 다른 맥락에서 한 발언을 잘못 인용할 뿐이다. 

정회덕은 옷차림에 대해 쓰기는 했지만, "크메르인이 치마 대신 바지를 입고 짧은 머리 대신 긴 머리를 해야 한다는 명령"이 있었다고는 쓰지 않았다. 

정회덕은 1816년 캄보디아 조정의 문무 관료들이 응우옌 왕조와의 조공관계 상의 의례에 참석했을 때 '화풍' 의복을 입었다고 기록했다.

이는 캄보디아 관료들이 이후에도 수 년간 계속해서 따랐다. 

정회덕이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 다른 변화들은... 맥락화할 필요가 있다. 

정회덕의 보고서는 1820년 황제에게 올린 것이다... 1816년 응우옌 조정이 캄보디아 관료들에게 하사한 화풍 의복의 힘으로 인해 캄보디아 왕국 전체가 순식간에 탈바꿈하여 모든 농민들까지 화풍의 변혁적인 힘에 합류하고자 서둘러 그런 의복을 어떻게든 사고 싶게 만들었을까?

이것은 바로 정회덕 같은 사람이 신임 황제가 믿게 하고 싶었던 전근대적 정치선전인 것이고, 이를 통해 자신을 홍보할 수 있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개종시킨 이교도 숫자를 부풀림으로써 유럽에 있는 고위 인사들에게 잘 보이고자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상, "백성들"은 관료들이 응우옌 왕조 사신들과 프놈 펜 왕궁에서 만날 때 무슨 옷을 입었는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회덕은 캄보디아건 어디건 "백성들"이 무엇을 입었는지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관료들"에게만 신경을 썼다. 그리고 응우옌 왕조가 찬 왕과 성립한 조공 관계의 절차에 따라, 왕과 관료들은 응우옌 왕조 관료들을 만날 때마다 "화풍" 옷을 입어야 했다... 그리고 그대로 따랐다.  

당시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의복 변화는 이게 전부고, "명령"에 의해 그랬다는 근거는 없다. 찬 왕은 조공국이 되기를 자청했다. "화풍" 의복을 입는다는 것이 바탕에 깔려있는 요청이었다. 

그리고 응우옌 왕조 관료가 떠나고 나면, 옷도 몸을 떠났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도 바탕에 깔려있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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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찬가지로 청나라 사신이 베트남이나 조선을 방문할 때, 모두들 '화풍' 의복을 입고, '화풍' 의례를 거행하는 행사를 통해 사신단을 영접했다."

켈리 교수님께서는 "(중국과 다른) 베트남의 고유 문화"라는 베트남 민족주의 담론을 깨기 위해, 중화 보편주의를 자주 인용하시는데 너무 나갈 때가 있다. 이 경우도 그렇다. 

구범진 교수님의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을 보면, 당시 동아시아 사람들도 외교 의례의 보편성과 정체성에 있어서 혼동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주인에게는 만주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던 청나라 건륭제는 조선으로 가는 사신들이 조선에서도 오직 말을 타도록 명령을 내렸고, 그 정책의 의도를 오해한 조선에서는 청나라로 가는 조선 사신도 오로지 말을 타도록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 건륭제는 이 제도의 취지를 조선 측에게 다시 설명해야 했다. 

조선으로 파견되는 청나라 사신은 항상 만주인 위주로 선발되었고, 조선에 가서도 만주 정체성을 드러내도록 요구받았다. 이 '만주' 사신들이 특정 의례에서 '화풍' 의복을 입었는지는 별도로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켈리 교수님이 위에서 말한 것 보다는 훨씬 복잡한 생각이 오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정회덕의 기록에는 "둘러입는 치마(幅圍裙)"라고 되어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전의 뱀을 잡을 때 왜 여자 옷을 써야 할까? 포스팅 참조.



이 포스팅에서 켈리 교수님은 동남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남자는 훈도시를, 여자는 사롱 치마를 입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캄보디아에서는 (집권층) 남자들도 사롱을 입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베트남의 집권층은 이를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없어서 야만스럽다고 여겼던걸까?   

[3] 유구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느릿느릿 36) 유구의 흔한 관복 착용법 - 이중적인 의복 문화 포스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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