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네덜란드 풍설서] 부교 나으리의 오코노미에 맞춰 제출? (18-20) 아란타 풍설서


통사가 남긴 기록


대통사(大通詞) 미나라이 바바 타메하치로우(見習馬場為八郎)가, 1814(분카文化 11)년에 연번통사(年番通詞)로서 수행한 일을 기록한 "만기장(萬記帳)"을 보도록 하자(화력和曆 6월 23일 조). 나가사키에 있던 다수의 네덜란드 통사 중 상위의 대통사, 소통사 중 한 명씩 교대로 연번(年番)이 되어, 그 해 네덜란드인과의 관계를 관장했다. 

一、かひ丹部屋乙名・目付・大小通詞立合、両かひたん並船頭阿蘭陀人風説申聞候を書留、引取和解致す〔中略〕
하나, 카피탄 관저에 있어 오토나, 메츠케, 대소통사를 세워, 양쪽 카피탄 및 선장 아란타인의 풍설을 들은 것을 글로 남겨, 번역(和解)하였고 [중략]

一、風説下書出来致候ニ付、例之通中清書致し御役所え名村八右衛門持参、御用人え御目、御覧候処、御好も之ニ付、直ニ清書致させ候
하나, 풍설에서 받아적을 수 있던 것을, 예사대로 중청서(中清書)하여 관청(役所)에 나무라하치에몬(名村八右衛門)이 지참하여, 관리(御用人)를 뵙고, 보여드린 바, 호불호도 없음에, 바로 청서하였습니다. 
(『年番阿蘭陀通詞資料』)


첫번째 조항은, 상관장 관저에서 신구(新舊) 상관장(일본인은 포르투갈어로 "카피탄"이라고 계속 불렀다), 차석 상관장(헤토루[1]), 통사메츠케(1695년부터 배치된 최고직 통사. 모든 통사를 감독한다), 대통사, 소통사가 모인 장면이다. 도착한 네덜란드선의 선장이 상관장과 이야기하는 내용을 통사가 받아적어, 그 뒤에 "화해(和解, 일본어로 번역)"했다고 읽힌다. 풍설서의 "원문"을 배에 싣고 왔다는 흔적은 없다.

일본에 내항한 네덜란드선은 초여름에 바타비아를 출범해, 여름에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또, 화력 9월 20일까지(서력 10월말 경까지)는 나가사키를 출항해야만 한다는 막부에 의한 명령이 있었다. 한편 내항 횟수로 말할 것 같으면, 에도시대를 통틀어 1660년대가 가장 많은 10수 척, 1640-50년대, 17세기의 말에는, 매년 대개 5척이 내항했다. 1715년 이후는 막부의 명령으로 연 2척으로, 18세기말 이후는 연 1척으로 제한되었다. 

따라서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그때까지 남아있던 상관장과 여름에 파견되어온 신임 상관장이 둘다 나가사키에 근무하고, 때로는 둘이서 "신구舊 상관장"으로서 행동했다. 앞서 인용에서 "양쪽 카피탄"이라고 한 것은 그 까닭이다.

그리고 두번째의 조항을 보자. 받아쓰기가 가능하면, "중청서"(중간 단계의 청서)를 작성하여, 통사가 부교소에 지참하고, 중개를 통해서 나가사키 부교의 의견을 듣는다. 사료에 의하면 중청서를 부교에게 보여주는 것을 "사정을 여쭙다(御内慮相伺)"라고 표현했다. 이 수속이 공식 절차는 아니고, 내무용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리라. 본래 풍설서는, 네덜란드인이 이야기한 내용을 그대로 에도의 막부에 전하는 것이라는 구실이었다. 상관장 서명과 통사들의 도장(連印)이 그것을 보증하고 있다. 부교에게 발언권은 없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는, 부교의 "호불호(御好, 오코노미)" 즉 수정을 요구하는 지시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 다음에, 에도에 보내는 청서가 작성되었다. 

이 사료는 네덜란드어 "원문"을 싣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측에는 그 밖에도 여러 유사한 사료가 남아있고, 그 중에는 "원문"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료만 가지고는 결정적인 증거로 불충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松方冬子, オランダ風説書, (中公新書, 2010), pp.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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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르투갈어로 간사, 감독관을 의미하는 feitor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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