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베트남의 캄보디아 병탄 시기를 재고하다 (2): 둔전과 베트남화 [캄보디아 병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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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대 캄보디아 사람들이 베트남의 지배 하에 놓였을 때 세금을 어떻게 부과했는지를 둘러싼 "세금 문제"는 굉장히 복잡하고, 그만큼 굉장히 흥미롭다. 필자는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선 다른 사안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문제는 캄보디아의 둔전(屯田) 설치와 "베트남화(化)"라는 문제다.


A History of Cambodia에서 데이비드 챈들러는 대남식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친다.

"크메르족 사람들이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킨 나머지, 명명제는 해당 지역을 베트남인으로 채워 식민지화하고자 하였다. 탈영병과 일반 죄수들을 감옥에 가둬놓기만 하면 쓸모가 없으니 캄보디아로 보내 그곳 사람들과 살게 하면 캄보디아 사람들이 죄수들의 교화로부터 혜택을 받을 것이라며 이 정책을 정당화했다." (제 1판, 126쪽)

제 4판에서 챈들러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추가했다. "베트남인 죄수가 무고한 크메르인 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문명화 계획'의 또다른 면이었다"(152)


챈들러는 (번역가를 통해) 대남식록이 이 사안에 대해 무엇을 기록하고자 하는지를 개괄적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했으나, 이 주장이 놓인 세계관은 번역 과정에서 유실되었고, 명명제가 하는 주장의 전모를 담아내지도 못했다.  


명명제가 (1836년에) 쓴 글은 다음과 같다:

"진서(鎭西, 베트남이 장악한 캄보디아 지역)는 비로소 개척되기 시작했다. 밭은 비옥하고, 노는 땅이 많다. 짐은 이미 방변(防弁)과 병사(兵使)에게 400여 무(畝)의 둔전을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더 넓은 지역을 점차 개간한다면, 토지는 나날이 열리고 쌀이 남아돌아 천만세에 걸쳐 무궁한 이로움을 줄 것이다. 

그러니 탈영병 등의 범죄자를 오래도록 구속해도 이익이 없음을 감안할 때, 이들을 둔전에 충당하여 땅을 근면히 일구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한 (진)랍 백성들 사이에 섞여서 살아 한편으로는 이들을 한풍(漢風)에 물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하(夏)를 써서 오랑캐(夷)를 바꾸는 하나의 방법이다." (172/19b-20a)


이 글에는 "크메르족 사람들이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킨 나머지, 명명제는 해당 지역을 베트남인으로 채워 식민지화하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물론 베트남 민족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것은 장차 해당 지역을 보다 잘 장악하려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언급된 "지역"이란 무엇인가?

명명제는 둔전 정착민들이 이미 400무의 땅을 개간했다고 당당히 선언한다. 

6.6무 가량이 1에이커에 해당한다. 그러니 400무는 86에이커(34만8000㎡) 정도되는 것이다.

필자는 버몬트 주의 100에이커 정도 되는 농장에서 자랐는데, 아무도 우리 가족이 버몬트 주를 식민지화하려고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리고 버몬트는 캄보디아 면적의 1/6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1]

다시 말해, 캄보디아에 설치된 베트남 둔전의 극히 한정적인 규모를 통해 우리는 둔전 설치가 "크메르 민족 사람들이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킨 나머지" ... "해당 지역을 베트남인으로 채워 식민지화하고자"하는 거대 음모의 일환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명명제는 좁은 지역에 간 베트남 민족 사람들이 그 좁은 지역에 사는 캄보디아 사람들을 "한풍"에 물들도록 도울 수 있다고 믿었다. 

챈들러는 책에서 "베트남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해당 구절의 내용을 "문명화 계획"과 동치시킴으로써 이를 20세기 프랑스의 mission civilisatrice와 연결짓지만, 대남식록에서 명명제는 "한풍(漢風)"이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하를 써서 오랑캐를 바꾼다(용하변이, 用夏變夷)[2]에 대해서도 말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리고 명명제가 하고자 한 것에 "베트남화"나 "문명화 계획"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개념들은 1830년대 응우옌 왕조의 세계관의 문화적 맥락에 비춰보았을 때 이질적이고 시대착오적인걸까? 


하(夏)는 중국의 하나라를 가리키지만, 보다 일반적으로는 고대 중화 세계의 문화적 중심에서 살아간 식자층의 문화 세계를 의미한다. 

이 개념의 배경에는 하(夏)에 속한 사람들이 하가 아닌 사람들에 비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이 있으며, 하 사람이 하가 아닌 사람들과 교류함으로써 후자도 점차 하의 방식을 따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베트남화"와 같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명명제가 말하는 "하(夏)"나 "한(漢)"은 민족 정체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론적으로) 보편적인 정체성이었다. 

그러므로, 명명제가 하고자 한 것에 동치시킬 개념을 찾는다면 "기독교화" 같은 개념에 더 가까울 것이다. 

명명제는 자신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생활 양식을 모든 사람(캄보디아 사람 뿐 아니라 제국 내 모든 사람)이 따르기를 바랐는데, 당시 기독교 선교사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생활 양식을 사람들이 따르기를 바랐던 것과 같다. 

그리고 기독교 믿음에서 고대 예루살렘이 중요하듯이, 명명제의 세계관에도 옛 "성지"가 있었다. 하(夏)의 옛 세계였다. 더욱이 옛 성지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 양식이라고 인식한 것을 명명제는 자신의 시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따르기를 원했다. 

그러니 "베트남화"라는 개념은 명명제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한풍(漢風)을 베트남 민족의 풍습(thói Kinh)이라고 번역한 것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3]

명명제는 "베트남화" 보다 더 크고 더 강력한 무언가를 믿었다.    

마지막으로, 명명제는 기독교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큰 그림"을 보았다. 명명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86 에이커 면적의 땅에 사는 사람들부터 시작해도 충분했다. 

역사학자도 이 "큰 그림"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86 에이커에 사람들을 집어넣고 내버려두면 주변 이웃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길 바라는 것은 "문명화 계획"이나 "해당 지역을 베트남인으로 채워 식민지화"하는 것과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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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켈리 교수님네 농장/버몬트 주 전체 면적: 둔전/캄보디아 전체 면적을 단순 비교할게 아니라, 당시 기술이나 제반 여건을 고려했을 때 캄보디아 내에서 개간할 수 있는 땅 면적이 얼마나 되었을지, 당시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사람에게 400무가 어느 정도의 땅 크기로 받아들여졌는지를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트랙터로 밭 갈고 비행기로 농약 뿌리는 시대의 "규모 감각"은 1830년대와 다를 수 밖에 없다.  이럴 때는 미국 농부 출신인 켈리 교수님의 순박함(?)에 당황하게 된다. 

[2]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3]
그러나 베트남(특히 응우옌 왕조)의 "한(漢)"은 자국민의 민족 정체성을 의미하는 방향으로 쓰인 정황이 있으며, 켈리 교수님도 이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 있다. 혼밥왕 가륭제 포스팅 참조.
다만 그렇다고 해서 한풍을 "낑 족(베트남 민족)의 풍습"이라고 번역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오해를 감안한다면, 그대로 "한풍"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다. 진서의 백성을 물들이는 "한풍"은 "베트남 민족 고유의 풍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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