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그 해, 파리를 휩쓴 위수령 논란 있잖아, 근대


*제프리 H. 잭슨의 책, "물에 잠긴 파리 - 빛의 도시는 어떻게 1910년의 대홍수를 이겨냈는가?"에서 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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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제안은 파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퇴진시키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월 28일, 파리 시의회 예산위원회에 속한 의원들이 사적인 모임을 가졌는데, 이 날 유출된 내용에 따르면, 도세(Louis Dausset) 의원은 홍수를 제압하기 위해 파리 시에 "위수령"을 내릴 것을 제안했다. 다시 말해, 도시를 군대에게 맡기자는 말이었다. 전직 교수였던 도세는 민족주의적인 친정부 집단, 조국 프랑스 연맹(Ligue de la Patrie Francaise)을 창단한 인물이었다. 도세가 정확히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는 불확실하나, 위수령을 선언한다는 발상에 대해 많은 이들은 충격과 분노로 반응했다. 그들은 도세가 홍수 구제 노력을 완전히 군대화하고 싶어한다고 믿었다. 도세를 비판하는 세력(특히 그의 우익 성향을 우려하는 이들)이 보기에는, 해당 제안은 파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퇴진시키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30)

"점령을 입에 올리는 것 만으로도 불과 40년 전 프랑스 근현대사에서 가장 극심한 국민분열과 잔혹사를 겪은 이들의 뇌리에 생생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공화국 지지세력과 정치 좌파가 듣기에, 도세가 제안한 계엄은 끔찍한 충격과 배신으로 다가왔다. 코뮌이 잔인하게 해체된 기억이 여전히 많은 파리시민들의 기억에 생생했다. 특히 1871년 항쟁을 지지한 이들에게 계엄령이라는 것은  시가지에서 동지들을 처형하고 파리 독립에의 희망을 짓밟은 "피투성이 주간" 이후에도 파리를 몇 해 동안 점령했던 그 군대를 다시 불러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르 마탱(Le Matin) 지의 한 편집자는 (홍수 피해를 악화한 것으로 보이는) 파리 시의 공학설계 실패를 두고 프랑스 군대가 1870년에 입은 불명예스러운 패배에 빗대며, "예의주시도 하지 않고, 예방조치도 무시한 결과, 저들은 패배를 맛보았다." 또다른 편집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1870년, 파리는 두 차례 포위되었고, 우리는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1870년을 겪었듯이 홍수를 겪는다. " 점령(siege, 위수령)을 입에 올리는 것 만으로도 불과 40년 전 프랑스 근현대사에서 가장 극심한 국민분열과 잔혹사를 겪은 이들의 뇌리에 생생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프랑스와 파리 사이의 갈등, 포위, 정복이라는 불편한 역사를 도세가 건드린 것이었다. 

파리 시민들이 군대를 불신하는 이유로는 코뮌의 기억 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다 최근에, 프랑스 전체가 19세기 말 최대의 스캔들이라 불리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정치 노선 간에 깊은 골이 패여있었다. 홍수 당시, 이 끔찍한 간계가 남긴 씁쓸한 기억은 파리 시민들의 뇌리에 여전히 생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 군대는 국민과 국가의 수호자라는 신뢰를 크게 잃었다. 

1894년, 프랑스 군의 극비 문서군이 독일군 측으로 유출되었으나, 기밀누설을 한 범인의 정체는 아무도 몰랐다.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아픔이 얼얼한 채로, 새로이 안보 상 허점이 드러난 데에 수치심을 느끼던 프랑스 국민들에게 프랑스 군인이 자발적으로 적과 내통했다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군 내부에서는 알프레드 드레퓌스라는 유대인 장교에게 누명을 씌우기로 했다. (중략)



도마 위에 오른 것은 군대라는 조직의 정체성, 그리고 왕정, 귀족, 교회의 특권을 오래도록 지켜온 이 조직이 과연 자유 사회의 가치를 수호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많은 이들에게는 (드레퓌스가 아니라) 군대가 프랑스를 배신했을 뿐 아니라, 조국 프랑스가 힘들게 쟁취한 개인의 자유, 종교의 자유, 공정함, 법치주의라는 원칙을 배신한 것이었다. 한편 많은 이들은 여전히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믿었다.

군 부패와 종교적 차별의 희생양이라며 드레퓌스를 지지하는 세력과 드레퓌스를 간첩이자 매국노라고 여기는 세력 간의 전면전이 지면 상에서 오고갔다. 1906년, 프랑스 국회가 드레퓌스에게 사면을 내릴 즈음에야 싸움은 잦아들었고, 다수의 프랑스인은 무고한 인물에게 부당한 처분을 내린 것에 대해 군대를 몹시 불신하고 대놓고 경멸했다.
 
4년 뒤, 드레퓌스를 부당하게 대한 바로 그 군대가 파리의 거리에 나타났고, 많은 이들은 군대를 믿어도 될 지 고민했다. 1월 28일 물난리가 최절정에 달했을 때, 이러한 프랑스 군에게 파리를 넘겨야 한다고 루이 도세는 시민들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의 상흔이 생생한 상황에서 많은 이들은 군대에게 도시를 맡기고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생각에 고통과 공포를 느꼈다. (136-138)

Jeffrey H. Jackson, Paris Under Water: how the city of light survived the great flood of 1910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0), 13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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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ㅇㅇ 2018/07/10 12:42 # 삭제 답글

    흥미진진한 곳에서 이야기가 중단되었군요 ㅎㅎ 신뢰받지 못하는 군의 '대민지원'이라니 으슬으슬합니다
  • 남중생 2018/07/10 14:20 #

    앗, 결말을 말씀드리자면 1910년의 홍수기간 동안 위수령/계엄령은 발효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파리에서 "계엄이라는 말의 무게"를 더 이야기하고 싶어서 저 부분을 발췌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1 2018/07/11 23:43 # 삭제 답글

    좋은글 봤는데 위에서 분탕질이나 치고 감사덧글도 안달았네요
    잘봤습니다.
  • 남중생 2018/07/11 23:58 #

    잘 읽어주셨다니 제가 감사합니다.
    소신있게 목소리를 내주신 점 역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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