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전후로, 일본도가 여전히 사랑받았던 이유 포스팅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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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걸쳐 일어난 공예품 수입이라는 새로운 현상은 때때로 어쩌다 생긴 호기심의 발로가 아니었고, 오히려 체계적으로 수입된 사치품 소비 경향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Craig Clunas, Superfluous Things: Material Culture and Social Status in Early Modern China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4), 58.
검(劍) 일본검(日本劍)이다.
외조부 백호공(白湖公)이 벼슬하지 않았을 때에 바다로 유람을 갔는데 만이(蠻夷) 장사꾼이 공을 만나 크게 기뻐하고서 치장한 상자 속에 든 검을 꺼내어 선물로 주면서 말하기를 “신표(信標)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공께서 받으시고 옷을 벗어 주어 사례하였다. 이 고검(古劍)은 길이가 한 자 남짓 되는데 아침이면 칼날에 물기가 있다. 공이 만력 4년(1576, 선조9)에 예조 정랑으로 39세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백사(白沙) 이 상국(李相國 이항복(李恒福))이 유권(遺卷)의 서문을 지으면서 매우 자세하게 칭찬하고 인정하였다.
(임진왜란 전후, 일본도가 여전히 사랑받은 이유 中 미수기언 기사)

P.S.1
치요가네마루는 실물로 보면 존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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