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임진왜란 전후로, 일본도가 여전히 사랑받았던 이유 雜同散異 Superfluous Things


작년 이맘때 Craig Clunas의 Superfluous Things는 번역/소개하다가, 
"탈역사적 소비심리"를 마지막으로 일시정지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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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걸쳐 일어난 공예품 수입이라는 새로운 현상은 때때로 어쩌다 생긴 호기심의 발로가 아니었고, 오히려 체계적으로 수입된 사치품 소비 경향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
(일본인 두목 아래에서 일하는 다수의 중국 실향민으로 이뤄진) '왜구(倭寇)'가 중국 연안과 부유한 강남 지역을 16세기 내내 노략질하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부자들은 일본산 물건을 집에 두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이 관심은 특히 칠기(漆器)와 금속공예 분야에 집중되어있다. 문진향이 일본도(日本刀)를 언급하면서 송대 학자 구양수(歐陽脩, 1007-1072)의 글을 인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도는 유서깊은 문학 소재였고, 조선산 종이 등롱에 대한 찬사 또한 동천청록집(洞天淸錄集)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출처: Craig Clunas, Superfluous Things: Material Culture and Social Status in Early Modern China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4), 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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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倭寇)'가 중국 연안과 부유한 강남 지역을 16세기 내내 노략질하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부자들은 일본산 물건을 집에 두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을 직접 겪은 조선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허목 선생의 "미수기언"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검(劍) 일본검(日本劍)이다.


외조부 백호공(白湖公)이 벼슬하지 않았을 때에 바다로 유람을 갔는데 만이(蠻夷) 장사꾼이 공을 만나 크게 기뻐하고서 치장한 상자 속에 든 검을 꺼내어 선물로 주면서 말하기를 “신표(信標)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공께서 받으시고 옷을 벗어 주어 사례하였다. 이 고검(古劍)은 길이가 한 자 남짓 되는데 아침이면 칼날에 물기가 있다. 공이 만력 4년(1576, 선조9)에 예조 정랑으로 39세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백사(白沙) 이 상국(李相國 이항복(李恒福))이 유권(遺卷)의 서문을 지으면서 매우 자세하게 칭찬하고 인정하였다.
임진년(1592)에 우리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나 우리 집안사람들이 양호(兩湖) 1000여 리를 피난 다녔는데 선비(先妣)께서 이 검을 지니고 다녀서 온전할 수 있었다. 탄식하기를 “난리를 겪은 뒤에 우리 선인의 옛 물품은 오직 검 하나뿐이다.” 하고 그 검을 백씨와 숙씨에게 돌려드렸는데 백씨와 숙씨가 받지 않으며 말씀하시기를 “큰 난리를 만나 골육도 보전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검이겠는가. 자씨(姊氏)의 현명함이 아니었다면 그 검이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된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 돌려주지 말고 자손에게 전하여 후세에 어진 어머니의 마음을 알게 하라.” 하였다. 이 때문에 그 검이 허씨에게 전해진 지가 2세 100년이 되었다. 선비의 성품이 충후(忠厚)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나 자잘한 사랑은 하지 않으셨다.


난리를 겪은 뒤에 우리 선인의 옛 물품은 오직 검 하나뿐이다.



이후에 성호 이익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도 이 허씨 가문의 일본도를 주제로 시를 짓습니다.
Craig Clunas가 언급했듯이, 일본도는 "일본의 무기"라기 보다는 
분서갱유로 소멸되어 이제는 볼 수 없는 중국의 옛 문물에 대한 향수를 일으키는 기제였거든요.


구양수가 시를 지어 깊은 뜻을 담았으나 / 歐陽作詩寓深意
분서(焚書) 이전의 시서를 그 누가 다시 알까 / 火前詩書誰復識
머나먼 곳 아득한데 어떻게 다다를거나 / 絶域蒼莽那可到
검을 마주하니 깊은 여한이 더욱 쌓이누나 / 對此益覺幽恨積
오호라 검이여 처음 바다를 건너올 적에 / 嗚呼劒兮初渡海
육경이 어찌하여 서로 따라오지 못하였던고 / 六經胡不相追逐
단간잔편(斷簡殘篇)에 파묻힌 쓸쓸한 내 신세여 / 棲棲殘簡蠧編裏
밤에 깨어 텅 빈 하늘을 아득히 바라보네 / 夜起遐眺雲空廓



오히려 "
역사적 소비심리"가 근대의 상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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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백호공이 만난 외국 상인은 일본인이라고 보는게 합당하겠지만서도...


만이(蠻夷) 장사꾼이 공을 만나 크게 기뻐하고서 
치장한 상자 속에 든 검을 꺼내어 선물로 주면서 말하기를 
“신표(信標)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P.S. 2
또 한편으로는 임진왜란 피난길에 챙긴 조상의 유품은 일본도 한 자루가 전부였고, 
6.25 전쟁 당시 창경원 사육사의 피난길 동지는 일본어로 조롱하는 앵무새였다는게 참...

서울 탈환에 안도의 숨을 돌이킬 틈도 없이 전황은 역전되어 1.4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직원들은 다투어 피란 짐을 싸고, 나도 이때만은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동설한에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이 우리 안에 갇힌 동물 가족들을 남기고 발길을 돌리기란 차마 어려웠지만, 백번 궁리 끝에 떠나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앵무새 한 마리만 장에 넣어 가지고 떠났다. 정들었던 앵무새를 마지막으로 보고 문을 나서려는데, 'こら, こら! ばか, ばか!'하며 욕소리를 외쳐대는 이 오랜 친구만은 두고 갈 수가 없었다.

핑백

  • 남중생 : [느릿느릿 25] 유구의 도검난무! 2018-06-05 22:33:36 #

    ... 임진왜란 전후로, 일본도가 여전히 사랑받았던 이유</a> 포스팅에 이어서,--------------------------------------------------------------------------------------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걸쳐 일어난 공예품 수입이라는 새로운 현상은 때때로 어쩌다 생긴 호기심의 발로가 아니었고, 오히려 체계적으로 수입된 사치품 소비 경향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 more

덧글

  • ㅇㅇ 2018/06/03 18:06 # 삭제 답글

    당연히 순도 100퍼 교육의 산물 아니겠습니까? 미워하는 교육을 받아야 미워하겠지요.
  • 남중생 2018/06/03 18:19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일본도를 사랑하는 교육을 받았다는 점도 말하고 싶었습니다!^^
  • ㅇㅇ 2018/06/03 19:25 # 삭제

    당대에 조선인이라는 소속감과 중국의 땅에 대해 본디 고려의 영토였다고 인식하는 국가관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밝히는 역사관심 님의 소개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왜의 물건에 대해 적대적인 인식이 없었다는 사실은 세계화와 Made in 으로 표방되는 국가와 물건의 연결고리가 친숙해져일까요? 제가 적었음에도 이 추측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뵈는데... ㅎㅎ

    아마 역사의 흐름에 따른 소비심리 변천은 찾아보면 남중생 님의 예전 글에도 있을 듯 하군요. 학자들은 이런 변천과 그 동력에 대해 어떤 해답을 내놓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 남중생 2018/06/03 20:08 #

    made in (Japan)을 언급하신 것이 적확합니다.

    허목의 기사에서 일본은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데,

    전쟁 전에 외조부가 만난 이국적인 바다 오랑캐(蠻夷) 상인,
    임진왜란을 일컫는 동방대란(東方大亂),
    그러면서 검 자체는 일본검(日本劍)입니다.

    하나의 위협적인 외세인 "왜"를 경계하는 "조선" 사람이 아니라,
    구양수의 일본도 담론을 이어나가는 한자문명권의 세계시민으로서,
    세계대전인 "동방대란"에 얽힌 가족사를 언급하고,
    외할아버지가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만이 객상과 교류해서 얻은 보검이라는
    입장에서의 서술 전략으로 보입니다.

    탈역사적이라고도 할 수 있고, 역사적이되 코스모폴리탄의 시각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made in Japan 특산품인 "일본도"는 "동방대란" 보다 훨씬 오래된 문헌 전례가 있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봅니다.
  • 말초 2018/06/03 18:47 # 답글

    일본도가 되게 무서운 무기는 맞죠 - 잘 부러진다는 약점은 있지만 그건 조선, 청, 중세 유럽도 비슷했고 그래서 여러 자루의 칼을 들고 다녔는걸요

    명나라나 조선의 군인이나 관료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일본도를 든 해적이 사람을 세로로 한칼에 두토막냈다는 무시무시한 기록도 있고.. 명나라에서 일본도 든 왜구가 극성이라 원앙진을 개발하고 조선은 일본도를 수입해 왜검이라 부르고 익혔다능 =3=
  • 남중생 2018/06/03 18:58 #

    최근에 동래읍성 해자에서는 실제로 위에서 칼날로 잘린 두개골도 발견되었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1200038495&code=960201

    귀 베이고 코 베인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구양수의 시"가 더 와닿는 레퍼런스였다는 것은,
    그만큼 (탈)역사적 기억을 증명해 준다고 봅니다.
  • 나인테일 2018/06/03 20:21 # 답글

    일본도가 제대로 전쟁에 쓰이던 시절은 사무라이의 상징이 어쩌네 하는 후기 에도시대 일본 귀족용 허세 잇 패션 아이템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쟁무기였으니까요. 냉전을 겪는 와중에도 서방에서 마47이나 알라의 요술봉 같은 물건 자체에 딱히 대단한 적개심은 없었던 것과 같은 이야기겠지요.
  • 남중생 2018/06/03 20:50 #

    송나라 구양수의 “일본도가”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고, 거기서 출발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정치적 시대배경으로 구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명 에도시대가 진행되면서 검이 장식적으로 변한 것도 일본도가 글로벌 소비재가 되는데 한 몫 했으리라 봅니다.
  • 迪倫 2018/06/04 00:27 # 답글

    별로 받아들이기 어려울지 몰라도 일본도가 조선 후기에는 조선 환도에 영향을 많이 미치기도 했고, 동래 왜관에서 밀수품목 중에 중요 아이템이었죠. 실제 일본검을 차는게 “쾌사”라고 한 유생도 있었습니다.
  • 남중생 2018/06/04 00:34 #

    ㅠㅠ 제가 항상 일본도 관련 포스팅을 할 때는 적륜님의 19세기 왜관 포스팅을 링크 걸어놓는데...
    요즘 링크 납치가 너무 과한가 해서 생략했습니다.

    하지만 제 블로그는 항상 적륜재에서 얻어가는 것이 많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미군철수 없으면 반역 2018/06/04 06:24 # 답글

    지금도 일본도는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죠.
    곡선이 섬뜩하면서도 아름답고 사무라이들의 무용담과 연결되어 매우 매력이 있는 무기입니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에서 일본의 긴 칼이 출토되었는데 그걸 보면 일본의 칼은 오래 전부터 길었나 봅니다.
    칼 외에도 일본식 투구나 갑옷이 발견되는 걸 보면 일본서기에 기술된 임나사가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죠.
  • 미군철수 없으면 반역 2018/06/04 12:31 #

    일본도가 우수하다는 걸 인정하는 것처럼 임나사도 역사적 사실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 앗싸리하죠.
    그러나 독도영유권 같은 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김대중협정을 개정해서 훼손된 영유권을 회복해야 합니다.
  • 미군철수 없으면 반역 2018/06/04 06:34 # 답글

    우리를 침략한 일본의 칼이니 좋아하면 안된다.
    이런 바보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겠죠.
    공자왈 맹자왈보다 쌀과 칼이 백성들에게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군사정부의 역할은 매우 적절했다고 봅니다.
  • 남중생 2018/06/04 08:46 #

    군사정부가 국민이 아니라 “백성”을 생각했다면 그것만으로도 과오라 하겠습니다.
  • 미군철수 없으면 반역 2018/06/04 12:19 #

    백성은 민중 또는 인민이죠.
    건국전후에 미제와 반동괴뢰 이승만이 민중들을 학살하여 피바다를 만들었었죠.
    먼산족들이 추앙하는 이범석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가장 악랄했던 김창룡이 죽자 이병도는 그를 찬양하는 비문을 지었죠.
    먼산족들이 이병도를 추앙하는 이유일 겁니다.
  • 남중생 2018/06/04 12:36 #

    그러면 지금도 백성이라 부르겠죠. 전에 신민적 태도를 지적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 미군철수 없으면 반역 2018/06/04 20:10 #

    지금도 인민이란 말은 쓰지 않죠.
    해방 후 세워진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열등감 때문일 겁니다.
    미제가 들어와 뭉갯지만 민중들의 마음 속에는 인공만이 유일한 합법 정부였죠.
  • 남중생 2018/06/04 20:47 #

    전에 신민적 태도를 지적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 미군철수 없으면 반역 2018/06/05 04:18 # 답글

    임나경영설을 같이 연구해 봅시다.
    단군조선설 부정이나 고려계승론 부정보다 더 어려운 논쟁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죠.
    http://qindex.info/d.php?c=5999
  • 남중생 2018/06/05 10:00 #

    전에 신민적 태도를 지적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x3
  • 미군철수 없으면 반역 2018/06/05 14:38 #

    솔직히 임나경영설 인정하지 않습니까?
  • 남중생 2018/06/05 16:13 #

    아뇨, 신민적 태도 지양합니다.
  • 무명병사 2018/06/05 13:55 # 답글

    그러나 미 해병 앞에서는 "어이쿠 이게 뭐야 오늘 득템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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