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임진강 유람선은 어디로 향하는가? - 조선의 경우 (2) 雜同散異 Superfluous Things


2. 임진강 유람선은 어디로 향하는가?


낙선군을 만난 당시의 상황은 허목의 일기에도 현장감 넘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갑진기행(甲辰記行) - 1664, 현종 5년 1월 15일
보름 무인일(15일), 또 큰 눈이 내렸다. 횡산(橫山)에 있을 때 낭선공자(朗善公子)가 사행(使行)에서 돌아와 형산신우비(衡山神禹碑)를 나에게 보내 주었는데, 그 글씨가 매우 특이하여 조적 고문(鳥跡古文)과는 또 달랐다. 패사(稗史)에 하후씨(夏后氏)가 형사전(形似篆)을 지었다고 하였는데, 이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석고문(石鼓文)과 비교하면 더욱 예스러워 알기 어렵다. 성인(聖人)의 활동시기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3700여 년이나 지나 비석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는데, 가정(嘉靖) 연간에 형산(衡山) 악록(岳麓)의 땅속에서 출토되었다. 남예부 상서(南禮部尙書) 담약수(湛若水)가 이 비문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그런데 허목이 머물던 횡산은 몇 년 전에 본 신비한 "문석"과 상당히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이었습니다.

횡산(橫山)은 연천(漣川) 북쪽 강가에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송림(松林)과 사장(沙場)이 아래위로 널려 있고 남쪽 언덕은 모두 층암절벽이며, 벌여 있는 산에는 숲이 우거졌으며 앞에는 옛 나루터가 있다. 강 가운데 돌이 많아 배가 돌을 스치며 지나가는데, 물살이 세어서 자칫 실수하면 배가 돌에 걸려 건너갈 수가 없게 된다. 서쪽으로 장경대(長景臺)의 석벽을 바라보이고 동남쪽이 석저 협구(石渚峽口)인데, 절벽 위에 도영암(倒影庵)이라는 절이 있다. 그 법당(法堂)이 강을 굽어보고 있어, 중이 가사를 입고 검은 두건을 쓰고 염주를 굴리며 불경을 외는 것과 도끼를 들고 나무하는 사람, 동이를 들고 물 긷는 사람이며 쌀 씻는 사람이며 빨래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모두 그 밑 깊은 못에 비치므로, 내려다보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다. 그 아래는 망저탄(望諸灘)이요 또 그 아래는 장군탄(將軍灘)인데, 장군탄 아래 웅연 석벽(熊淵石壁)에서 이상한 석문(石文)을 보았으며, 강가에는 석린(石鱗)과 석묵(石墨)이 나고, 오래 사는 사람이 많았다.

▲별표는 "문석"의 위치. 붉은 영역 표시는 "연천군 중면" (중면의 일부는 휴전선 이북이다)
19세기 조선의 "자라 인간"이 살았던 곳 역시 연천군 중면 지역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허목이 형산 신우비 탁본을 선물로 받은 1663년 이후로, 
웅연의 문석 or 석문도 자주 언급/방문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일찍이 웅연 석벽(熊淵石壁)에서 돌에 새긴 이상한 글씨를 보았는데, 그 글씨는 괴괴(怪怪)하고 기기(奇奇)하여 어떤 것은 내려 그었고 어떤 것은 가로 그었으며 혹은 합쳐지기도 하고 혹은 흩어지기도 하는 등 그 변화가 진정 놀라웠다. 돌은 푸르고 글자는 검으나 이끼는 끼지 않았다. 숭정(崇禎) 말년에 이 고을에 현감으로 온 사람이 돌을 깨고 몇 글자를 파내려고 돌을 두어 치쯤 깎아 냈으나 석문은 그대로 있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
(...)
초서는 또 왕자(王者)의 동문(同文 천하(天下)가 글을 같이 쓴다는 말)에도 끼어 있지 않았으므로 옛날 서적(書籍)에도 언급이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것을 얻어본 뒤에야 초서와 예서도 천지의 조화로 된 글이어서 석문에 이와 같이 나타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금상 8년 가을에 한산(寒山) 송 장로(宋丈老)가 윤희중(尹希仲)과 함께 석록(石鹿)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하여 함께 큰 강의 강가에 이르러 강가 주인을 따라 웅연(熊淵)의 신비스러운 석문(石文) 글씨를 보았다. 그런 다음 배를 띄우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 망저탄(望諸灘)을 지나 횡산(橫山)으로 올라가서 장경대(長景臺)에서 놀았다. 이때 날이 이미 어둑어둑해졌는데, 모래는 희고 물은 아득하며 연기 낀 경치는 끝이 없었다.
송 장로는 지금 나이가 84세이고, 무경(茂卿)과 희중(希仲)도 모두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하며, 나 또한 백발의 노인으로서 제군들의 뒤를 따랐다. 이 유람이 노인의 승사(勝事)라고 할 만하기에 기록하는 바이다.
7월 하순에 73세 노인 미수는 기록한다."

웅연범주도(熊淵泛舟圖)에 대한 기 - 1672, 현종 13년 임자년
"금상 13년 4월에 권 공산(權公山)이 권 저작(權著作)ㆍ권 조대(權措大) 두 사람과 함께 석록(石鹿)의 산속 집으로 늙은이를 찾아왔기에 적적하던 중에 마음을 툭 터놓고 며칠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다음 함께 웅연을 구경하기로 하였는데, 정극가(鄭克家)가 뒤를 이어 이르렀고, 김현서(金玄瑞)도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전날 밤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마침 내리던 비가 개어 모래톱과 물가의 맑은 경치가 볼만하였다. 주인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예를 갖추었기에 매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튿날 웅연으로 나가서 신비로운 석문(石文) 글씨를 보았다. 기괴한 글씨가 혹은 세로로 혹은 가로로 뻗고, 혹은 합해지고 혹은 흩어지는 등 변화가 놀라웠으니, 이는 기화(氣化)가 이루어 낸 귀신의 자취라 하겠다."

석문기(石文記) - 1660, 70년대?
"석문은 용이나 뱀, 초목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가 기괴하여 뭐라고 형용할 수가 없다. 푸른 돌에 검은 글씨가 이끼에 묻히지 않았다. 이전에 한 수령이 돌을 쪼개어 몇 글자를 떼어 냈는데, 2촌(寸) 두께 정도의 돌을 떼어 냈는데도 돌의 글씨는 달라지지 않았으니, 이것은 귀신이 만든 글자이다."


신우비 탁본도 마음에 들었는지, 거듭 이야기합니다. 

형산비기(衡山碑記) - 1663년 여름 무오년(1678, 숙종4)이라고 되어있는 것은 잘못.
금상 4년 여름에 공자(公子) 낭선군(朗善君)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연경(燕京)으로 갔다가 형산신우비(衡山神禹碑) 77자(字)를 구해 왔는데, 그 글자는 용사(龍蛇)ㆍ조수(鳥獸)ㆍ초목(草木)의 모양과 유사하면서도 문채가 나고 신기하여 뭐라고 형용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하후씨(夏后氏) 우(禹)가 수토(水土)를 평정한 뒤에 사물을 본떠서 글자를 만들어 간악한 귀신과 괴상한 동물들이 그 형체를 숨길 수 없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해(害)를 멀리하여 평지에 살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 비가 지금 4000년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명(明)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와서 비로소 나타났다. 아! 성인의 글이 나타나고 숨겨지는 것은 하늘에 달린 일이다. 그런데 공자가 또 구하여서 우리나라에 전하였으니, 또한 사람의 힘으로는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이하 생략)

그러나 허목은 신중하게도 신우비와 웅연 석문을 결코 함께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넌지시 같은 책 속에 신우비 관련 글과 석문 관련 글을 나란히 배치시킬 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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