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ce Rusk 교수님의 "Artifacts of Authentication: People Making Texts Making Things in Ming-Qing China"를 계속해서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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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명의 존립은 신성한 유물에 달렸다"
(斯文所在眞有神物)
"너무 늦게 태어났다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
(不必以生世太晩爲恨也)
[신우비가 송대에 발견된 뒤, 1534년까지 잊혀졌다는] 독특한 역사 덕분에, 이 비문을 둘러싼 논의는 송대의 수집 전통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과거의 자료와 선례를 통해 유물을 연구해야할 필요는 줄었지만, 학자들은 이 유물을 어떻게 다뤄야할 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모호함은 당대의 석학 왕세정(王世貞, 1526-90)이 취한 입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왕세정은 비문을 우왕이 실제로 쓰지는 않았으리라고 추정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시적인 글씨 형태를 보아 진나라 이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설령 위조품일지언정 진나라 이전에 만들어진 위조품이라는 것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우왕의 시대 이후에 등장한 지명 같은 시대착오적인 표현을 지적하며 비문이 위조품이라고 단언한데 비해, 다른 이들은 비문을 옹호하기를, 현대어역이 틀렸으며 우왕의 비문은 유물이자 태고적 글씨의 사례로서 가치가 있다고 했다. 게다가 워낙 태고의 글씨인 나머지 이를 현대 글자로 옮기려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1565년까지는 그래 보였다. 그러나 위조 전문가 풍방[2]이 그의 출판업자 친구 왕문록[3]에게 가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를 입수했다고 말한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풍방은 류창(劉敞, 1019-68)이 쓴 글의 사본과 거기에 달린 주석을 찾았다고 주장했다. 류창은 구양수(歐陽修, 1007-72)가 집고록(集古錄)을 집대성할 때 자주 자문을 구한 호고주의자였다. 풍방의 자료는 위조품이었다. 그 자료는 1078년에 쓰였다고 되어있는데, 이는 류창이 사망한지 10년이 지난 시점이다. 풍방은 또한 류창이 신우비문에 대해 남긴 기록이 송수(宋綏)와 호세장(胡世將)이라는 두 명의 송대 수집가가 쓴 두 권의 책에 실려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이 책 제목은 어떤 믿을만한 전기에도 기록되어있지 않다. 풍방은 왜 이와 같은 가짜 참고자료를 만들어냈을까? 풍방은 양신처럼 송대의 선례가 없다며 기뻐하거나 심일[4]처럼 신성한 영감을 기다리지 않고, 대신 송대 자료를 발명하는 것으로 비문을 둘러싼 논의에 개입해 그 해석방법을 문헌적 근거라는 익숙한 길로 유도하고자 했다. 풍방의 송대 문헌이 진품이라면, 우왕의 비문에 대해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은 류창이 쓴 글이자 곧 풍방이 소유한 글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풍방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학술 분야였다. 풍방에게는 아직 상업 출판 시장으로 유통되지 않은 고유 자원(송대 필사본)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풍방이 믿고 의지한 것은 그러한 자료를 실제로 보유하고 있음이 아니라, 그러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는 그의 주장이 그럴싸하다는 점이었다. 풍방 본인의 수집가로서의 명망과 그의 가족의 보유한 수집품의 규모나 심도를 감안했을 때, 믿기 어려울 정도는 아닌 주장이었다. 바로 이것이 풍방이 옛 문헌들을 위조하기 위해 쌓아올린 명망이었다. 다른 유사한 경우에도 풍방은 잃어버린 지식의 회수처로 자기 가족의 서재를 부각시켰고, 양신처럼 송대 호고주의자들을 우회하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조롱하였다.
▲양신(楊愼, 1488-1559)의 해석
그리하여, 우왕의 비문이 송대 호고주의 전통과 단절되었음[5]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비문을 연구하기 위해 다시 서재에 파묻혀 사전을 뒤져보고, 수집가들이 비문에 대해 한 말을 살펴보아야 (혹은 발명해야) 했다. 우왕의 비문은 그 진위에 대해 의심을 받으면서도, 후대의 금석문 모음집과 사전에 실렸으며, 다른 사본과 해석에 대한 전형적인 논의가 뒤따랐다. 그리하여 호고주의는 기도, 꿈, 노래의 대상이 되던 신비한 유물을 어느 정도 길들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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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문명의 존립은 신성한 유물에 달려있다"
16세기 초에 예부상서 부한이 주장한 바와는 상반되는 의견이다.
"생각컨대, 도장(璽)의 쓰임은 문서를 식별하고 위조를 방지하는 것이지, 보물로 간직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시황이 람전(藍田)에서 옥을 얻어 도장을 새긴 이래, 한나라 이후로 이것이 전하여 쓰였습니다. 이로부터 꾀와 힘으로 (전국새를) 다투어 취하고는 말하길, 이 도장을 얻으면 곧 천명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도장이 없으면 몹시 부끄러워 하며 천명이 떠나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알지 못한 것은 천명은 덕으로 받는 것이지, 도장으로 그 경중을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까닭에 전국새를 구해도 못 얻자, 스스로 새겨 위조함으로써 애써 사람을 속인 것입니다. 혹시 이를 얻으면 진나라 옥새라며 떠들어대며, 임금과 신하가 기쁜 낯빛을 하고, 거듭 잔치를 벌이고, 두루 제사를 지냄으로써 천하에 과시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천 년 동안 웃음을 살 일입니다."
[2] 풍방(豊坊, 1493-1566)
"당대 사람들이 생각없이 "물건을 좇"는 것을 개탄한 풍방의 걱정은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풍방은 미술 시장과 서적 시장의 내부사정에 정통했으며, 서예 전문가로 특히 유명했고, 감별사였던 그는 의심스러운 신종 물품의 범람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풍방은 시장을 기만하기도 했는데, 수집가와 대중 독자를 현혹시킴으로써 중국 역사상 가장 대담하다고 할 수 있는 위조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가짜 유물을 만드는 것도 시장을 조작하는 방법 중 하나였으나, 풍방은 실재하는 물건에 그럴싸한 출처나 의미를 부여하는 문헌을 만들어냄으로써 보다 간접적으로 개입하기도 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위조 문헌은 다시 위조 유물을 증명하는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이 순환고리는 역사를 조작하는데 일조한 공예인의 세계, 수집 행위, 학술 활동을 하나로 이었다."
[3] 왕문록(王文祿, 1503-86)
"1560년대에 학자고 출판업자이자 만년 과거 낙제생이었던 왕문록(王文祿, 1503-86)은 휘당적기(彙堂摘奇)라는 제목으로 아버지가 수집한 세 개의 금석문을 복제해서 출판했다."
그리고 이 둘이 친구였다는게 소오름...
[4] 심일(沈鎰, 1530년대 활동)
"처음 이 비문을 얻었을 때, 밤에 향을 피워 기도하기를, '신우(神禹)여! 성인이시여! 그토록 영험함이 있으시다면, 꿈에서 어떠한 조짐이라도 보여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꿈을 꿨는데 키가 큰 사람 하나가 병 하나를 들고있다가 내게 주었다. 그 병의 색은 노랗고, 높이는 1척 남짓되었으며,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글었다. 배 둘레에는 금 고리가 둘러있었고, 그 입구 주변에 가로로 "아무개 관리가 만들었다(某官造)"고 써있었다. 아래에는 전문(篆文)이 각각 용, 뱀, 초목의 모양이었다. 자다가 첫 글자 하나는 잊어버렸다. 새벽에 이르르니 암송해서 글을 해석하기를 마치 원래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5]
"신우비는 새 발견이었고 다양한 사본이 있더라도 동일한 원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초기 수집가들 사이에는 특정 사본에 차이점이 나타날 것이라는 걱정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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