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글이 안 읽히면 잠을 자는게 좋다 Post-Superfluous Things (6) 雜同散異 Superfluous Things

Bruce Rusk 교수님의 "Artifacts of Authentication: People Making Texts Making Things in Ming-Qing China"를 계속해서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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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문이 하치(何致)가 1212년에 새긴 것이라면, 송대에 발견된 유물(혹은 가짜 유물)이 명대에 이르러 비로소 널리 퍼진 경우일 것이다. 예를 들어, 1560년대에 학자고 출판업자이자 만년 과거 낙제생이었던 왕문록(王文祿, 1503-86)은 휘당적기(彙堂摘奇)라는 제목으로 아버지가 수집한 세 개의 금석문을 복제해서 출판했다. 우왕의 비문을 포함한 세 편의 글귀는 단순히 복사만 한 것이 아니라, 현대문으로 옮기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다른 두 편의 (그럴듯해 보이는 가짜) 금석문은 송대 서예학 및 고문자학 서적에서 나왔다. 하나는 등공(滕公) 하후영(夏侯嬰, 몰년 172 BCE)의 관뚜껑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자가 쓴 계찰(季扎)의 묘지명이었다. 등공의 관뚜껑에 적힌 글귀는 왕구(王俅)가 (12세기에 쓴) 금석학 모음집, 소당집고록(嘯堂集古錄)에서 나왔고, 공자가 손수 썼다는 묘지명은 유명한 10세기 붓글씨책 순화각첩(淳化閣帖)에서 나왔다.

법첩(法帖, 붓글씨책) 덕분에 학자들은 옛 금석문 뿐만 아니라 본디 종이나 비단에 쓰였을 붓글씨를 원본이 사라진 지 오래된 뒤에도 접할 수 있었다. 지난 장에서 크리스토퍼 우드가 논한 근세 유럽의 실로제(sylloge) 처럼, 이 붓글씨 모음집은 진품과 함께 짝퉁이나 짝퉁이라고 잘 알려진 것들을 섞어서 보여주었다. 하지만 유럽의 실로제 보다 중국의 법첩은 그 자체로 수준 높은 감상을 요하는 예술품이었다.[1] 명대 중반에 학자로서 법첩을 읽는다는 것은, 제일 먼저 이 사본의 출처에 대한 복잡한 담론을 짚고 넘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현재로서는 왕문록의 세 금석문 중 어느 하나도 옛것이라고 믿을 근거가 충분치 못하다고 여겨지지만, 16세기에는 세 경우 모두 거룩한 송대의 문헌 출처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금석문의 유래는 주로 문헌적 근거를 바탕으로 했다. 사물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서적에 복제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명대에 위조품이 기승을 부린 것은 사실이나, 이런 경우를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은, 이전 시기의 위조품이 더 널리 전파된 것 만큼이나 명대에는 진품에 대한 원칙이 느슨했기 때문이었다. 16세기에 증가한 것은 위조품을 만들 수 있는 여지나 능력이 아니라, 규모가 커진 도서 시장을 통해 위조품을 다수의 독자층에게로 신속하게 전파할 수 있는 역량이었다. 휘당적기는 왕문록의 널리 읽힌 모음집, 백릉학산(百陵學山)에 포함되어 출간되었다. 우왕의 비문은 신속하게 명제국의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서 이내 곧 장사(長沙), 강남(江南), 사천(四川)에서 출판되었는데, 이는 번창하는 인쇄 산업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장거리에 걸친 신속한 전달을 위해 인쇄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전국새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명나라 정부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정보와 사물을 재빨리 옮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 출판은 명나라 학자들이 우왕의 비문을 연구하고 해독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여러 유명한 금석문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서, 품질, 온전한 정도, 접근성이 각기 달랐다. 신우비는 새 발견이었고 다양한 사본이 있더라도 동일한 원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초기 수집가들 사이에는 특정 사본에 차이점이 나타날 것이라는 걱정은 적었다.[2] 대신 수집가들은 비문 그 자체와 이 비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관심을 돌렸다. 예를 들어 범대철(范大澈, 1524-1610)이라는 수집가는 여러가지 귀한 금석문과 서예 작품의 출처와 사본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가 우왕의 비문을 언급할 때는 이것이 옛 글씨임은 인정한 반면 자신이 소유한 특정 사본이나 본 적이 있는 다른 사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학자들의 관심은 오히려 비문을 현대 글자로 옮김으로써 글의 의미를 고정하는 것에 쏠렸다. 처음에는 비문은 해독할 수 없다고 받아들여졌다. 장사부지(長沙府誌)의 집필진은 글자를 옮겨쓰려고 시도하지 않았으며, 유학자이자 관료였던 담약수 (湛若水, 1466-1560)는 1536년 즈음에 남경에서 신우비문의 사본을 보았는데, 한 두 글자 밖에 알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 담약수가 보기에 이상한 글씨는, 비록 가독성을 저해하였지만, 이 글이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최초의 현대어 풀이는 심일(沈鎰, 1530년대 활동)이 시도하였는데, 
그의 해석과 한줄 한줄  충실한 설명은 이후의 해석에 바탕이 되었다. 이 해석문에 도달하기까지 심일은 우왕의 비문을 현전하는 비문이나 여타 역사적인 금석문에 비교하는 대신, 저자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처음 이 비문을 얻었을 때, 밤에 향을 피워 기도하기를, "신우(神禹)여! 성인이시여! 그토록 영험함이 있으시다면, 꿈에서 어떠한 조짐이라도 보여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꿈을 꿨는데 키가 큰 사람 하나가 병 하나를 들고있다가 내게 주었다. 그 병의 색은 노랗고, 높이는 1척 남짓되었으며,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글었다. 배 둘레에는 금 고리가 둘러있었고, 그 입구 주변에 가로로 "아무개 관리가 만들었다(某官造)"고 써있었다. 아래에는 전문(篆文)이 각각 용, 뱀, 초목의 모양이었다.[3] 자다가 첫 글자 하나는 잊어버렸다. 새벽에 이르르니 암송해서 글을 해석하기를 마치 원래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심일은 비문을 우왕이 홍수를 조절하고 강역에 평화를 정착시키는데 힘쓴 기록으로 읽었다. 그러나 이 꿈을 제외한 자신의 해석 방법을 설명하지 않았고, 외적 증거를 인용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인용을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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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전히 아동 교육용 붓글씨 책으로 쓰일 때 조차 그 역사성이 부각되곤 했다. 
"지금에 와서는 천하 모든 어린 아이가 글공부를 시작할 때이로하부터 외우는데이 주변에는 아직껏 이로하라는 것을 알지 못하시다니참으로 겐지모노가타리 따위에나, '나니와즈', '아사카산'으로 글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을 보았지만지금에 와서는 너무 어려워하거늘도리어 예스러운 것을 바라는 사람이로구나"

[2] "여러 유명한 금석문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서, 품질, 온전한 정도, 접근성이 각기 달랐다. 신우비는 새 발견이었고 다양한 사본이 있더라도 동일한 원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초기 수집가들 사이에는 특정 사본에 차이점이 나타날 것이라는 걱정은 적었다."
"
부한은 먼저 새로 발견한 옥새와 역사적인 기록에 나온 묘사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부한이 인용한 책 제목은 도종의(陶宗儀, 1316-1403)의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 뿐인데, 이 책은 신변잡기적인 기록과 다른 책으로부터 베낀 구절의 모음집이다. 철경록은 도장의 명문과 도장을 장식한 짐승 모양을 재현해놓았다. 부한의 생각으로는, 철경록이 편찬되기 400년이나 전에 전국새가 자취를 감췄고, 10세기 이래 나타난 다양한 옥새가 모두 위조품이라는 것이었는데, 이런 부한이 철경록이 얼마나 권위가 있다고 보았는지는 불확실하다. 더욱이 철경록 자체에도 서로 다른 내용이 쓰인 두 가지 버전의 전국새가 실려있었다."

[3] "아래에는 전문(篆文)이 각각 용, 뱀, 초목의 모양이었다."
"전국새의 명문은 한문을 멋들어지게 재구성해서 새나 다른 동물의 모양이 되도록 만든 조문(鳥文, 조어문鳥魚文, 어문魚文, 용문龍文 등으로도 불린다)의 과장된 형태였다. 이렇게 장식적이고 보기 드문 글자 형태를 찾아보는데 명대 초기의 옛 글자 자전은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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