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imitive Perfection: The Inscription of Yu태고(太古)의 달인: 우 임금의 비문
관료들은 전국새와 씨름하면서 전승과 그림을 인용했다. 이 전승과 그림이 보존되어 전해내려온 이유로는, 기이한 옛 유물에 대한 오랜 호기심을 들 수 있는데, 글씨가 써있는 경우는 특히 더 호기심을 끌었다. 옛 문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옛 문자가 적혀있는 유물을 더 많이 찾으려는 욕망과 함께 했으며, 이에 따라 찾아낸 유물과 출판한 서적은 또 고문자학(古文字學) 지식 목록의 일환이 되었다.[1] 이 과정에서 가장 이목을 끈 이야기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옛 성왕(聖王)인 우 임금(손수 주조한 솥이 이후에 전국새로 대체되었다는 바로 그분이다[2])이 썼다고 하는 비문(碑文)이었는데, 이 비문이 발견된 곳은 오늘날 후난성 장사(長沙) 근처 형악(衡岳)이었다.
이 유물을 둘러싼 전승은 우왕이 홍수와 맞서 싸울 적에 남긴 비문이 이 성스러운 산에 있다는 옛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오월춘추(吳越春秋)에 따르면, 우왕은 물을 다스리는 방법이 새겨진 옥 조각을 얻기까지 치수 사업을 완성할 수 없었다. 우왕이 형악서 세 달 동안 금식을 한 뒤에야 신의 심부름꾼이 옥 조각을 건네주었다. 이 전설은 우왕이 형악 어딘가에 비문을 남겨놓았다는 이야기로 발달했고, 어떤 이들은 형악 정상에서 서쪽에 있는 구루산(岣嶁山)을 비문의 위치로 지목했다. 송나라 때 쓰인 서령기(徐靈期, d. 474)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에 따르면, 서령기는 형악에서 15년 간 살면서 산을 샅샅이 살피던 중 천주봉(天柱峰) 정상에서 "올챙이 문자"[3]로 쓴 우왕의 비문을 발견했다고 한다. 몇 년 뒤, 임방 (任昉, 460-508)은 우왕이 쓴 또다른 비문을 언급하며, (선대에 요 임금이 남긴 비문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상고시대 내내 남았다"는 주나라 초기의 기록을 인용했다. 이 이야기는 당나라 때까지 살아남아, 한유(768-824)는 시에 쓰기를, "도인"이었던 서령기와 달리 본인은 우왕의 비문을 보지 못했음을 탄식했다.
岣嶁山尖神禹碑
구루산 꼭대기에 신우(神禹)의 비석,
字青石赤形模奇
파란 글씨 붉은 돌에 기묘하게 서렸구나
蚪蝌拳身薤倒披
올챙이를 펼쳐놓은듯 염교풀을 뒤집은듯[4]
鸞飄鳳泊拿虎螭
난새가 날개짓하며 붕새가 머무르고 호랑이 이무기가 뒤엉킨듯
事嚴跡秘鬼莫窺
삼엄히 자취 감추니 귀신도 못 훔쳐봤고
道人獨上偶見之
도인이 홀로 산을 타다 우연히 보았다네
我來咨嗟涕漣洏
나는 와서 탄식하고 눈물만 줄줄 흘리거늘
千搜萬索何處有
천번 뒤지고 만번 찾아도 어디에 있단 말인가?
森森綠樹猿猱悲
빽빽하게 푸른 숲 속 원숭이만 슬피 우네
위 시에서 한유는 비문의 형태나 내용에 대한 추측했을 뿐인데도, 형악 지역을 방문하거나 이 지역의 역사를 서술한 이들이 자주 인용했다. 이는 사라진 유물의 공백을 상상 만으로는 메우지 못했으며, 이 유물을 직접 본다는 것은 초자연적 힘의 징표였다는 것을 가리킨다/암시한다. 이 전설은 이후에 더 신비롭게 덧칠되었다. 송나라 때 전해지던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에 나무꾼이 바위 표면에 용 두마리가 서린 모양을 보았다. 돌에 새겨진 비문이 별안간 밝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고, 나무꾼은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겁에 질려 달아났다. 그 후로 아무도 비문을 보았다고 하는 자가 없었다."
========================================================================================
[1] "옛 문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옛 문자가 적혀있는 유물을 더 많이 찾으려는 욕망과 함께 했으며"
Rusk는 Clunas의 Superflous Things를 참조하고 있지만,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Clunas가 활용하지 않은 사료를 인용해 명나라 관료들은 사실 금문의 내용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이 글을 처음 번역하기 시작하면서 Superfluous Things가 "80년대 책이라서 다소 오래된 감"이 있다는 것은 이런 맥락이었다.)
"그러므로 유물에 글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그 물건의 가치를 더해준 것으로는 보인다. 새겨진 내용을 대체로 해독하지 못 했더라도 말이다. 엄숭(嚴嵩, 1480–1567)이 소유했던 1127 개나 되는 고동에 대한 카탈로그를 보면, 그중 어느 하나도 금문(金文)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당히 학식 있는 명나라 엘리트들조차 금문에 쓰인 옛 글자를 못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문이 중요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굳이 해독하지 않은 것이다."
(Clunas, Superfluous Things, 98)
[2] 솥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상고시대에 우왕이 만들었다고 하는 9개의 솥(九鼎, 구정)이다. 구정은 통치 자격을 감별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덕이 있는 군주의 궁궐에 이 솥이 놓이면 무거워서 옮길 수 없었으나, 간악한 군주의 치세 때는 솥이 가벼워져 쉽게 치울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궁궐에 이 구정을 설치하는 것은 정부의 정당성을 상징했다. 한나라의 전설에 따르면, 앞선 진나라(221-206 BCE)의 시황제가 강에서 구정 중 하나를 건져 올리려고 했을 때 용이 나타나 방해함으로써 시황제의 간악함이 드러났다고 한다.
전근대의 역사학자들도 익히 알고있던 역사 속의 모순은, 정당성 계량기로써 구정을 대체한 것은 바로 진시황의 돌 도장이 되었다는 것이다."(중략)
[3] "올챙이 문자"
"전국새의 명문은 한문을 멋들어지게 재구성해서 새나 다른 동물의 모양이 되도록 만든 조문(鳥文, 조어문鳥魚文, 어문魚文, 용문龍文 등으로도 불린다)의 과장된 형태였다."
최근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