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번역] 우리는 꿈꾸는 테레즈를 깨울 권리가 있을까? 번역 시리-즈

사진과 그림은 제가 원문과 달리 임의로 삽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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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발튀스 작품을 보이는 것은 관음증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편하게 할 권리에 대한 것이다.


"발튀스가 예술활동 중에 소녀들에 집착한데 비추어, 이 작품을 불쾌하거나 불편하게 여긴 관객도 있습니다. " 

이것은 미아 메릴이 발튀스의 그림, "꿈꾸는 테레즈"(1938) 옆의 벽면 설명문에 주석으로 추가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메릴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907 전시실에서 이 그림을 제거하거나 "더 많은 맥락"을 제공하도록 설득하려는 청원을 시작한 사람이다. 11,500명 가까이 청원에 서명을 했다. (중략)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문제로 인해 "꿈꾸는 테레즈"를 사랑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다소의 윤리적 딜레마가 생긴다. 나는 이 그림을 성폭력이라는 맥락에서 비춰본 적이 없지만, 다시 보니 메릴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테레즈의 속바지가 보이고, 허벅지 안쪽이 조금 보인다. 테레즈는 12살이나 13살 정도 됐다. 올해 중에는 다른 예술가들의 성폭력 사건도 있었다. (중략) 

▲꿈꾸는 테레즈

메릴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작품에 있어 이 점은 분명 문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그림을 옹호하고 싶다. 아동의 폭력적인 성애화를 묵인하지 않으면서 테레즈를 보는 방법이 있다. 그래, 발튀스는 변태새끼다. 하지만 그림을 다시 한 번 보라. 테레즈도 발튀스 만큼이나 변태적이다. 테레즈의 황홀해하는 얼굴을 보라. 그녀의 감긴 눈을. 이 아이의 숨소리가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청원에 서명한 사람들은 테레즈가 무슨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 그림을 볼 때 착취 만을 본다면, 이상하게도, 착취자가 이긴 셈이다. 남자들이 이긴 셈이다. 미술사는 남성사(His Story)일 것이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미안한데 내가 "꿈꾸는 테레즈"를 볼 때 보이는 것은 그런게 아니다.

나는 이 그림을 항상 사랑했다. 내가 섹시한 기분이 들게 해준다. 미숙하면서 섹시한 기분 말이다. 이 그림은, 복고풍으로, 내가 12살이나 13살 시절에 느꼈던 복합적인 욕망을 회복시켜준다. 난 내가 누구를, 무엇을 욕망했는지 모르겠다. 섹스를 원했던 것인지 보다 두루뭉실한 것을 원했던 것인지. 그 나이 또래의 소녀들은 소년과 마찬가지로 욕망하는 기제다. 그리고 내가 여성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이 그림에 대해 쓴 여성의 문장을 읽으면서, 나 혼자 이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투 vs. 미술관"이라는 기사에서 앨리스 B 로이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테레즈의 포즈를 볼 때, 우리 할머니가 내게 치마를 입었을 때면 다리를 꼬고 앉게 시키시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한 번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내 이해를 뛰어넘는, 무언의 법칙으로,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언의 법칙으로, 예술의 목적이란 예의범절이나 동시대의 기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이다." 


작년 Paris Review에 쓴 기고문에서 젠 조지는 자신이 테레즈와 열정적으로 동질감을 느낀다고 했으며, 전시회에서 몇 시간이나 테레즈를 바라보았다고 했다. "나는 테레즈가 방 안에 있는 동시에 밖에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녀는 꿈을 꾸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작가 스테파니 라카바는 내게 "테레즈를 볼 때 제일 좋은 것은, 테레즈가 깨어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섹스를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 도덕률에 도발함과 동시에 세계를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힘이 작용하는지 알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그녀가 세상 꼭대기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는 그녀가 단지 상황을 허용하고 있고 성적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보인다. 이 역할은 거의 신화적인 역할이기까지 하다. 페이토, 판도라, 칼립소까지 아우르며, 그녀는 가정적인 개소리나 어줍잖은 학설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크고 힘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사람들을 더 두렵게 한다.

라카바는 옳다. 테레즈의 존재 자체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는 성적으로 깨어있는 어린 소녀들을 끔찍이도 두려워한다. 이 소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두르는 것은 곧 괴물 같은 성적 욕망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몸부림일 때가 있다. 이 어린 소녀를 사람들이 바라보는 방법을 통제함으로써 우리는 소녀의 내적 삶을 앗아간다. 여성의 성욕이 영원히 감춰지고, 주석에 달리고, 부록에 첨부될 수는 없다. 때때로 우리는 여성의 성욕이 홀로 서도록 (혹은 다소 어색한 자세로, 앉아있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말이다. 

▲미드 House of Cards에 등장하는 "푸른 팔걸이 의자에 앉은 소녀(Little Girl in a Blue Armchair)"

이 논의는 내게 "예술적 사물"이라는 자넷 윈터슨의 훌륭한 수필을 연상하게 했다. 1995년에 쓴 이 수필의 제목은 앞으로도 읽고 뒤로도 읽어낼 수 있다. 우리는 예술을 사물화하지만 예술을 저항한다. 예술은 반격한다. 윈터슨은 다음과 같이 쓴다. "예술을 길들일 수 없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길들여질 수 있다."

(중략)

예술 작품은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런 작품이 있다면 아마 예술이 아닐 것이다.



▲I like skirts but I also like sitting like a man의 구글 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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