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베트남의 육체(陸體) - 일제, 아니 중국, 아니 베트남의 쇠말뚝 인도차이나 ~Indochine~

Liam Kelley 교수님의 The Geo-Body of Vietnam을 번역합니다.
블로그 이웃 解明님의 사이비 역사학은 왜 문제가 되는가? 포스팅에서 언급된 Geo-Body 개념입니다.
--------------------------------------------------------------------------------------

베트남의 지리적 신체


1983년,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이라는 책에서 국가는 "상상"이라고 주장했다. 국가가 상상되는 한 가지 방법은 인쇄된 대중매체를 통해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전국 단위의 사건에 대해 읽을 수 있는 신문이 있기 전에는 특정 지역의 사람들이 동질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향토성에 동질감을 느꼈고, 더 큰 개체에 속해 있다고는 덜 느꼈다.  

이 주장에 영감을 받아, 1994년 통차이 위니차쿨(Thongchai Winichakul)은 근대적 지도가 국민 의식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지도 속 시암: 국가의 지리적 신체 역사"를 출판했다. 


간단히 말해, 통차이의 주장은 사람들이 나라를 지면으로 볼 수 있는 근대적 지도 없이는 나라를 상상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통차이는 이 현상을 가리키는 "지리적 신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국가의 지리적 신체가 의미하는 바는 단지 1) 국가의 영토 만이 아니라, 2) 국가 영토상(象)을 지도와 국경의 형상에 노출된 국민들이 뚜렷이 인식하는 것이며 3) 국가 영토상(象)은 "자부심, 충성심, 애정, 열정, 편견, 증오, 논리, 비논리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17) 

지리적 신체의 또다른 중요한 점은 지리적 신체는 자립하고, 국경 밖 그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리적 신체는 이전의 공간 개념과 궤를 달리 한다. 예를 들어 불교적 공간 개념에 따라, 태국의 불교도는 오늘날 태국의 영역과 오늘날 인도에 위치한 석가모니의 출생 지역을 연결한 지도를 그렸다.


보다 최근인 2010년에는 모모키 시로가 "근세 베트남 국가와 지리적 신체: 풍수 자료를 통한 기초연구"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15세기 동남아시아: 중국이라는 요소"에 실어 출판하였다. 이 논문에서 모모키 교수는 현전하는 20세기 이전의 풍수(風水, phong thủy) 관련 문헌을 살펴보고, 이 문헌들이 "사람들이 일종의 지리적 신체를 상상하는데 도와줬다"고 주장한다. (138)

모모키는 이 지리적 신체를 "명확히 경계지어진 표면이 아니라 줄기와 구심점 여러 개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라고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모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지도 보다 풍수 묘사가 사람들이 지리적 신체를 더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게 했는데, 레 왕조의 지도는 (국가 전도와 현 지도 모두) 촌 이상의 행정단위 명을 제외한 지명이 거의 기재되지 않았고, 산과 강 같은 자연 지형물에 대해서는 더욱 티미했기 때문이다." (138-139)


모모키 교수는 풍수 문헌이 "명확히 경계지어진 표면"의 형상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점에 대해서는 옳다. 이 사실만으로는 지리적 신체라는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반면에 이는 전근대 동남아시아 내륙의 불교도가 자신들이 속한 영역과 역사를 석가모니와 그의 탄생지에 엮으려고 한 시도와 유사하다. 

예를 들자면, "안남풍수"라는 문헌에 등장하는 이 "지도"를 보자. 지도 한 가운데 있는 동그라미는 풍수적 기운의 구심점을 표상한다. 이 구심점에서 기운이 바깥으로 퍼져나가면서 강도와 크기가 달라지고, 그 과정에서 국력과 규모가 서로 다른 왕국들이 만들어지는데, 예를 들자면 지도에 표시된 "우리나라(我國)"가 있다. 


풍수적 기운의 원천은 대월의 경계 내에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풍수학적인 시각에서 대월은 더 큰 무언가의 일부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자립한 것이 아니다. 

더 강력한 무언가에 엮여있다는 의식은 베트남 풍수서의 근원지가 어디인지에 대한 사상에도 반영되었다. 

모모키 시로가 지적하듯이, 여러 베트남 풍수서에는 그 유래에 대해 공통된 주장이 실려있다. 당나라 행정관 고편이 이 풍수서 문헌군을 처음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당 의종이 고변(高駢, 안남절도사)을 안남으로 보내 천자를 낼 만큼 강력한 풍수적인 구심점을 억누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후에 명나라가 안남을 점령했을 때, 황복(黃福, 1362-1440) 장군이 고변의 글을 가지고 왔다. 이 글은 명나라를 무찌른 베트남인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니 베트남 풍수서가 공유하는 담론은 베트남 지형 내에 북쪽(중국)의 특정 인물들만 알아볼 수 있는 기운이 있다고 주장한다. 같은 사상이 18, 19세기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모모키가 언급하기를 "북방인이나 북쪽 손님들이 자행한 매장 행위에 대한 많은 일화가 있는데 ... 이는 이 매장지 주변에 사는 베트남인의 운명에 영향을 주었다." (129) 

다시 말해, 베트남 풍수서는 풍수적 기운이 베트남 왕국 밖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였으며, 이 기운에 대한 지식 또한 국외에서 왔다. 

이것은 지리적 신체와는 매우 다른 개념이다. 지리적 신체는,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립하고 독립되어있다. 베트남의 풍수 지식은 모두 베트남 국외에 있는 힘의 원천과 연결되어있는 것만을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지리적 신체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연결이 단절되어야 했다. 

이 연결고리를 잘라내는 작업은 20세기 초에 서양 사상을 접한 개혁파 지식인의 글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이를 남국지도(南國地圖)라는 공교육 교재로 만든 책의 첫머리에서 명백히 볼 수 있다. 남국지도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나라는 아세아주(亞細亞洲)의 남쪽에 위치해있다. 북쪽으로는 지나(支那)의 운남과 광서에 맞눌려있다. 서쪽으로는 애뢰(哀牢, 라오스)와 고만(高蠻, 캄보디아)과 접한다. 남쪽으로는 중국해에 닿아있다. 동쪽으로는 중국해와 중국의 광동에 경계한다. 우리나라는 이곳에 4,767년간 있어왔다. 우리나라의 전체 면적은 311,100 평방 킬로미터다. (북기北圻는 119,200. 중기中는 135,000. 남기南는 56,900.) 우리나라의 강역은 작지 않다."

이 구절에 쓰인 외래어(아세아, 지나, 평방 킬로미터)를 보면 교재 집필진이 서양의 공간개념에 영향을 받은 개혁파 저술을 읽은 뒤, 공간에 대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서양 국가들의 지리서와 마찬가지로, "남국지도"에는 풍수적인 구심점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또한 베트남 공간이 베트남 왕국의 경계너머의 힘의 근원지와 연결될 여지도 없었다.

이 책에서는 지리적 공간이 기존에 있던 힘의 근원지와 단절되었다. 이제 지리적 공간은 홀로 섰다. "우리나라"는 "아세아"에 있으며 면적은 "311,100 평방 킬로미터"다.

이와 같은 글은 베트남의 지리적 신체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래 사진 처럼 벽에 지도가 걸린 근대적인 학교 체제에서 이 정보를 가르치자, 비로소 지리적 신체가 등장했다.

--------------------------------------------------------------------------------------------------------
P.S.

와... 글 자체도 무지 흥미로웠지만, 내가 지금 뭘 읽은거죠?!

이 이야기에 따르면, 당 의종이 고변(高駢, 안남절도사)을 안남으로 보내 천자를 낼 만큼 강력한 풍수적인 구심점을 억누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후에 명나라가 안남을 점령했을 때, 황복(黃福, 1362-1440) 장군이 고변의 글을 가지고 왔다. 이 글은 명나라를 무찌른 베트남인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니 베트남 풍수서가 공유하는 담론은 베트남 지형 내에 북쪽(중국)의 특정 인물들만 알아볼 수 있는 기운이 있다고 주장한다. 같은 사상이 18, 19세기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모모키가 언급하기를 "북방인이나 북쪽 손님들이 자행한 매장 행위에 대한 많은 일화가 있는데 ... 이는 이 매장지 주변에 사는 베트남인의 운명에 영향을 주었다." (129) 


1) 1400년대 명나라의 베트남 침공/점령을 배경으로 한 땅 밟기 & 지맥 끊기 관련 전설이 있었고, 이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나름대로 당나라 때까지 거슬러올라감.

2) "황복(黃福, 1362-1440)" 장군과 정확히 동시대에 활동한 "황엄"(둘이 관련이 있었을까?)을 주인공으로 한 조선 초기의 땅밟기 및 지맥 끊는 이야기가 있었고, 이건 나중에 임진왜란 이여송, 일제시대 쇠말뚝 이야기로 이어진다...

초록불 님의 쇠말뚝 괴담의 원조격 이야기 포스팅과 쇠말뚝 이야기 포스팅 참조!

3) 그.런.데. 사실 리암 켈리 교수님은 헬조센의 쇠말뚝 이야기를 모르셔서 연관을 못 지으셨지만, 베트남의 너무너무 유명한 "청동 기둥" 이야기가 있었으니,

『후한서()』 「마원열전()」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원은 구리를 녹여 일부는 말뚝을 만들고 나머지는 말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전자는 땅에 박아 베트남이 중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했고, 후자는 중국 수도로 가져가 궁 한쪽에 세워 두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새로 생긴 이 두 가지 조형물이 아니라 이것들을 만들기 위해서 없어진 베트남의 전통 유물이다. 그 유물이란 다름 아닌 동고였다.

마원의 행위는 베트남인들에게 자신들의 전통을 생각나게 할 만한 재료를 없애고, 그것들을 중국의 것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고사에 나오는 마원 장군의 구리 말뚝은 유명해서 16세기 말 북경에서 나눈 우리나라 사신 이수광()과 베트남 사신 풍극관() 사이의 필담에서도 이수광이 이 구리 말뚝(동주 )에 대해서 질문하는 광경이 나온다. (최상수 1966 : 87-88).

[네이버지식백과] 쯩 자매의 반란 [Trung, 徵] (동남아시아사, 2007. 9. 12., 미래엔) 


이수광만 질문했나? 한월 창화시의 대부분이 이 "구리 말뚝"을 소재로 한다. 


다만 조선과 안남의 압승술/지맥 끊기 이야기가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영향을 주었다기 보다는 원명 교체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트라우마일 것으로 보인다.
(海明 님의 이여송과 일본인들의 선배는 호종단? 포스팅 참조!)

또한 안남과 조선 모두 훨씬 더 오래된 유사 전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명대의 단일 사건 보다는 훨씬 더 오래된 중국과의 갈등관계에 보다 근래의 사건이 겹쳐져 이런 서사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2018.04.20)



-풍극관 (馮克寬 Phùng Khắc Khoan, 1528-1613)-


핑백

  • 남중생 : 타치바나 난케이는 왜 박쥐를 몰라야만 했을까? 2018-04-13 19:55:39 #

    ... 사람이야! 여담이지만, 문화재 반환 압력은 한국의 쇠말뚝 괴담과도 느슨하게 연관이 되어있다. (베트남의 지리적 신체 포스팅과 초록불 님의 쇠말뚝 괴담의 원조격 이야기 참조.) 그렇다면 박쥐를 소개 ... more

  • 남중생 : 지리적 신체의 또다른 이름, "지도 페티시" 2018-04-13 22:01:53 #

    ... 이전 포스팅에 이어 국가의 지리적 신체에 대해서 계속 씁니다."지리적 신체" 개념을 언급하신 解明 님의 "사이비 역사학은 왜 문제가 되는가?" 포스팅에 붙여쓰는 ... more

  • 남중생 : 불교 신자는 평면 지구론을 믿는 걸까? 2018-04-15 17:09:44 #

    ... otyk) 박사의 블로그에서 Do Buddhists Believe in Flat Earth?를 번역합니다. 전근대의 불교적인 지리관/우주론에 대해서는 베트남의 지리적 신체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 ------------------------------------------------------------ ... more

  • 남중생 : 정약용과 쇠말...뚝 괴담 2018-05-01 18:07:12 #

    ... =====================================================================================P.S.베트남의 육체 포스팅과 이여송과 일본인의 선배는 호종단? 포스팅을 참조해주세요. ... more

덧글

  • 남중생 2018/04/13 00:08 # 답글

    모모키 시로 교수의 글과 베트남에서 중국인이 땅 헤집는 이야기들은 곧 소개하겠습니다.
    (기다려주세요^^)
  • 바람불어 2018/04/13 10:10 # 답글

    한월 창화시의 대부분이 이 "구리 말뚝"을 소재로 한다. <--- 이거 흥미롭네요.
  • 남중생 2018/04/13 11:24 #

    네네, 중국의 사서에 기록된 베트남+중국의 교화가 남쪽까지 미친다는 증거+신기한 유적 이 모든게 합쳐져서,

    “북경까지 오는 길에 동주는 보고 오셨는지~“ 같은 식으로 줄곧 반복됩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것도 정리해서 소개해야겠네요^^
  • 바람불어 2018/04/13 18:46 #

    1. 이수광이 구리말뚝을 소재로 중국-월남, 중국-조선 그리하여 조선-월남 관계를 어떻게 상호이해했는지 흥미진진하네요.

    2. 남국지도 첫머리 글을 보고 전 이게 딱 생각이 났습니다.

    "국민소학독본 (1895년)

    제1과 대조선국

    우리 대조선은 아세아주 중의 일 왕국이라. 기 형은 서북으로서 동남에 출한 반도국이니 기후가 서북은 한기 심하나 동남은 온화하며 토지는 비옥하고 물산이 풍족하니라

    세계 만국 중에 독립국이 허다하니 우리 대조선국은 기 중의 일국이라..단기위와 삼한과 나여제와 고려를 지난 고국이오. 태조대왕이 개국하신 후 오백여년에 왕통이 연속한 나라이라."

    http://contents.history.go.kr/data/img/ta/ta_m52/ta_m52_1130_01.jpg
  • 남중생 2018/04/13 19:13 #

    오오 훌륭합니다! 국민소학독본이 아주 여기에 비교하기 딱이네요.
  • 解明 2018/04/13 19:43 # 답글

    쇠말뚝이라는 소재가 직접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외국인이 산천의 지기를 끊는다는 식의 이야기는 조선 초에서 고려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습니다!
  • 남중생 2018/04/13 19:51 #

    오호! 감사합니다.
    그러면 원명교체기에 베트남과 조선에서도 무언가 비슷한 트라우마를 느꼈나 보군요.
    명청교체기 트라우마만 주로 언급되는데, 더욱 흥미롭습니다.

    그렇담 아무래도 이 포스팅의 논조를 조금 바꿔야하겠는데, 지맥 끊기 이야기들을 소개해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 解明 2018/04/13 20:48 #

    제가 언급한 자료는 국문학자 조동일 선생의 글인데, 다음 주에 시간이 나면 해당 글을 발췌하여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남중생 2018/04/20 13:58 #

    오호호호,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광주사태 설문조사 2018/04/13 23:03 # 답글

    월남이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군요.
    그런데 현대사는 미국을 물리치고 민족통일을 이룩한 월남이 부럽습니다.
    사드재인이 윌남에 가서 과거의 참전을 사과 비슷하게 했는데, 월남전의 책임은 미국에게 있으니 사과도 미국이 먼저 해야죠.
    한국은 몽골의 일본침공때처럼 동원된 거 아닙니까?
    괴뢰가 몸통을 사과하는 격이죠.
  • 남중생 2018/04/14 00:04 #

    사과 비슷하게 했다는 것은 사과를 안 했다는 뜻이지요?
  • 광주사태 설문조사 2018/04/14 07:40 #

    사과에 대한 외교적 수사로 유감이라는 말을 쓰죠. 일본수괴가 한국통치에 대해 사과할 때도 유감이라는 표현을 썼죠. 미국이 저지른 제주학살에 이어 미국이 저지른 월남 침공까지 사드재인이 사과하고 다니네요.
  • 남중생 2018/04/14 15:08 #

    그럼 사과를 했다는 말씀이시군요.
  • 광주사태 설문조사 2018/04/14 07:49 # 답글

    국가가 상상이라는 말은 사드재인에게 해당됩니다.
    영토, 주권 그리고 국민이라는 실체가 없었던 1919년을 건국의 기점으로 잡았으니까요.
    전임자인 김대중과 노무현도 1948년을 건국의 해로 계산하였죠.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