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벨테브레이가 박 포장이 되기까지 - I want to Believe (3) 용틀임하는 동아시아 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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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내가 곡절을 물었더니,

"내가 주량이 워낙 커서 졸지에 배를 채우기 어렵다네. 한 번 꿀꺽 마시고 나면 갈증을 참을 수 없어, 부득이 그렇게 마셨다가 토해냈다가 하여 아쉬운 대로 목을 축이고 흥을 돋우는 것이지."

그때 해로(海路)로 중국 사신이 떠나는데, 박씨는 포장(砲匠)으로 끼이게 되었다.대개 옛날엔 중국을 해로로 내왕했는데, 상사(上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이 각기 배를 따로 타고 표자 문서(表咨 文書)[2]도 각기 일부씩 소지하여 불의의 사고에 대비했다. 가령 고려 때 상사 홍사범이 익사하고 서장관 정몽주가 홀로 살아온 것[3]이 그것이다.

[2]
 외교문서
[3] 1372년 사행선이 돌아오는 길에 허산(許山) 앞바다에서 조난당한 일이다.

(전 포스팅에서 인용한 부분에 이은, 박 포장 이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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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그렇다면 조선인들이 박연(벨테브레이)를 데리고 명나라로 해상 조천사행을 데려갔다고요?
하하... 저는 박포장 기담의 앞부분(캐릭터 설명, 이상한 술버릇)과 뒷부분(표류기담)을 반드시 서사적인 순서로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봅니다.

두 부분은 사실 서로 갖다 붙인 것 마냥 단절되어있죠. 
어마어마한 술을 들이켰다가 토해낼 수 있다는 능력을 이용해, 표류된 섬에서 바닷물을 삼킨채로 탈출했다가 토해낸다던가 하는 식의 연결이 전혀없습니다. 


다시 말해, 제 추론은 이렇습니다.

이상한 종교의식을 행하고, 아내도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훈련도감에 속해있는 사람으로서 "박 포장"이라는 캐릭터가 조선인들의 머리 속에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였고, 당시 조선 사회의 세계관을 초월하는 외국에서 귀화한 사람을 조선인이 이해하기란 심리적인 거부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벨테브레이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무역선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해도, "회사"나 "무역"을 조선인에게 이해시키기란 어려움이 컸겠죠.

적륜 님도 18세기 백과사전, 화한삼재도회의 "네덜란드" 항목을 인용하면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其國主。號古牟波爾亞。
그 나라의 임금은 고모파이아(古牟波爾亞)라 부른다.

이 기록을 적륜님께서 과거 포스팅에서 두 차례에 걸쳐 언급하셨는데요.

이번 포스팅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고모파이아는 실은 박명수의 퐈이아입니다….는 농담입니다. 실은 고모파이아의 화한삼재도에 붙은 가타카나 표기는 コンハンヤ(곤한야)입니다. 즉, Compagnie입니다. 네, 바로 VOC = de 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입니다. 당시 전지구 어디에서도 주인이 없는 나라의 형태를 이해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된다. 아마 나가사키를 통해 너희는 누구의 다스림을 받느냐 하니 저희는 콤파니아를 따릅니다라고 대답했을테고 당연히 이 콤파니아가 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비바 레푸블릭!

이 고모파이아의 화한삼재도에 붙은 가타카나 표기는 コンハンヤ(곤한야)입니다. 예전 일본어에는 청음이나 탁음을 표시하는 것을 쓰지않는 경우가 많아서 좀더 유추하면 콘판야 コンパンヤ, 실은 콤파냐 Compagnie입니다. 네, 바로 VOC = de 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를 나라의 주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은 17-18세기 전세계에서 '회사'라는 존재가 나라를 다스린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아마 네덜란드 사람들밖에 없었을 겁니다. 


네덜란드인이 상주하는 일본에서도 이해하기 버거워했는데, 조선이야...


그래서 동인도회사의 무역상단에 속해있던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가 제주도에 표착한 사건은,
조선인들의 머리 속에서 훈련도감에 속한 화포장 박연이 조공무역 선단을 따라갔다가 무인도에 표착한 사건으로 "번안"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표류해온 외국인 벨테브레이를 본국으로 돌려보내지도 못하고 우리가 억류하고 있으면서 조선인을 만들어버렸어...
가 아니라,
처음부터 조선인이었던 박연(朴)이 외국에 나가려다가 표류를 했는데, 무사히 조선땅으로 돌아왔어! 만세!
가 된것이죠... 무섭다;;


"벨테브레이의 이름은 얀 얀서(Jan Janse) 혹은 얀 얀스존(Jan Jansz = Jan Janszoon)입니다. 미들 네임인 얀서나 얀스존은 모두 영어의 Johnson하고 정확히 같은 의미입니다. 그의 이름을 만어(蠻語)로 박연이라고 했다는 기록에 따라 벨테브레이를 비슷한 발음의 ‘박’씨로 삼고 ‘얀’을 따서 연(淵, 延, 燕, 한군데는 朴仁으로 되어 있음)으로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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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조선과 동아시아의 "민족성"에 대한 인식은 아래 두 포스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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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네비아찌 2018/04/07 08:57 # 답글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니 과연! 하게 되네요 ^_^
  • 남중생 2018/04/07 17:14 #

    곰곰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newbie 2018/08/24 20:58 # 삭제 답글

    재미있는 추론입니다! 술 관련 에피소드는 정말 그럴싸하게 들리는군요.

    박연 관련해서 조금만 더 기록이 남았었으면 정말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드네요.
  • 남중생 2018/08/24 21:54 #

    사실 "술"과 관련해 하멜 일행의 비범한 모습을 언급하는 기록으로는 "술을 마실 때는 코를 뒤로 돌려서 마신다더라"라는 것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서양인들의 큰 코에 착안해서, "불편해서 어떻게 음료를 마시지?"하는 궁금증이 낳은 결과겠죠.

    아무쪼록 "기행적인 음주 행위"가 여기서도 네덜란드인의 다름을 드러내는 장치로 쓰인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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