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조선의 키리시탄 - I want to Believe (1) 용틀임하는 동아시아 근세

이번 포스팅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과연 어떻게 전달하는게 좋을까... 한동안 고민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포스팅은 확실한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나름대로 논리적인 추론을 해나가던 것들이라면,
이번에는 보다 그럴싸한 흥미 위주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만큼 이건 제 개인의 역사적인 '창작'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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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세평

우선 윤세평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 인물이 언급되는 곳은 임방(任埅, 1640~1724)이 17세기 후반에 쓴 "천예록"이라는 기담집입니다.

천예록에는 많은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지만, 그중에 윤세평 이야기는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또 윤세평을 다룬 이야기가 유독 재미있는지, 이웃 블로거 분들이 천예록을 소개하는 글을 보면 꼭 윤세평으로 시작을 끊더군요.^^ (저는 여기에도 모종의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역사관심 님의 두억시니, 기이한 공포 등. 

우선 역사관심 님의 포스트에도 인용되어 있는 윤세평 이야기의 앞부분만 옮겨놓겠습니다. 


멀리서 누이 집의 초상을 안 윤세평
"윤세평은 무사 출신의 재상이다. 일찍이 중국에 가던 길에 이인(異人)을 만나 비법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남에게 내보이지 않았다. 늘 방에서 혼자 거처하여 아내와 자식이라도 감히 엿보지 못하게 하다보니 남들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겨울밤이면 항상 차가운 철 조각을 양쪽 겨드랑이에 끼었다가 한참 뒤에 다시 그 철 조각을 바꾸어 끼우는 일만이 목격되었다. 그럴 때면 아내와 자식들은 그가 끼고 있던 철 조각이 뜨거워져 마치 불에 달군 쇠처럼 변하는 것을 보곤 하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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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중국에 가서 만났다는 이인은 누구고,
'능력'이라는 게 과연 저 철판 달구기 말고도 더 있는걸까요?
그리고 가족들로부터 굳이 숨기는 이유는?

다음은 '해조곡'이라는 제목의 일제시대 신문 연재소설을 보시죠. 
1801년 신유박해를 배경으로, 숨어사는 조선의 천주교도들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예-라 돼가는대로 돼라"

이렇게 절망에 가까운 낙관을 하며 경순이는 가만히 손을 품에 넣어 겨드랑이 밑에 품고 다니는 놋쇠 십자가를 살그머니 쥐어보았다. 그리고 억지로 잠을 청하였다.  

옷고름을 고쳐매는 동안 문득 겨드랑이에 차고 다니는 십자가 생각이 나서 황황히 손을 넣어보고 그는 몹시 놀랐다.
목에서 비스듬이 겨드랑이 밑으로 걸고 다니는 십자가가 없어졌다.

"아
 ㅅ"


이 소설이 어떤 내용이냐하면 막 해적단도 나오고, 천주교와 박해가 나오고, 평등사상과 가족드라마가 있고... 말로 하면 기니까 네이버 지식백과를 빌리겠습니다. 

작품소개

천주교 탄압을 배경으로 하여 지배층의 보수성을 비판하고 인간평등사상을 역설하는 주제를 뚜렷이 드러내는 작품이다. 정부의 박해에 항거하는 해적단의 활동을 서사의 중심축으로 놓은 것이 특징이다. 해적단의 항거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평등사상이 확산될 수밖에 없음을 역설하는 낙관적인 전망을 보이고 있다.

내용

평범한 상인이었던 해룡은 서학의 이념에 공명하여 독실한 신자가 된 형 백순의 죽음을 계기로 역시 신자가 된다. 백순은 사악한 그의 아내에게 살해되었는데, 이 사건의 전모를 보고 해룡은 현실 사회에 대한 염증을 느낀다. 결국 지배층의 보수적 이념에 반발하는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항거를 위해 해적단을 만든다.
(중략)
그러던 중 해룡은 순교자들의 사적을 기록한 백서를 북경 천주당에 전하러 가던 황사영의 체포 소식을 듣는다. 해룡은 산적 두목 악일과 의기투합하여 황사영의 구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황사영의 백서 사건은 조정에 큰 충격을 주어 교인 탄압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종교적 신앙심에 바탕을 둔 인간 평등 사상은 계속 확산될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해조곡 [海鳥曲] (한국현대장편소설사전 1917-1950, 2013. 2. 5., 고려대학교출판부)


"아
 ㅅ!"


네... 1930년대에 이런 소설이 있었습니다. 저같은 사람은 한 번 빠지면 못 헤어나오는 소재죠.

그렇다면 과연 고증 수준은 어떨까요?
1931년에 쓴 1801년(황사영 백서 사건) 배경의 소설이니까 정확히 130년 전의 일이죠. 
그러니 대단한 고증력을 기대할 것은 못됩니다.^^

심지어 저 소설의 내용이 19세기 초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의 습관을 제대로 고증해낸 것이더라도 그걸 1500년대 사람인 윤세평(천주교 신자 추정)이 그대로 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윤세평이 16세기 사람인 것은 어우야담의 윤세평 이야기에 나와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그냥 그럴싸한 연결고리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천예록의 윤세평 기록이 천주교의 입장에서 쓰인 글이라면 다음과 같은 형식이었겠죠.

"윤 아고스띠뇨 세평은 꼬레아의 군인이었다. 일찍이 시나의 수도에 가서 예수회 선교사를 만나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이교도의 땅인 꼬레아에 돌아가서는 자신의 신앙을 감추고 남에게 내보이지 않았다. 늘 방에서 혼자 거처하여 기도하며 아내와 자식이라도 감히 엿보지 못하게 하다보니 남들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그가 몸에 지닌 청동 십자가 목걸이를 자기 전에 풀어놓았는데, 이교도인 아내와 자식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쇳조각을 몸으로 뎁힌다고 여길 뿐, 영문을 알지 못하였다. 어느날 아고스띠뇨의 가족이 호기심을 못참고 벗어놓은 십자가를 만져보았는데, 마치 불에 달군 쇠처럼 뜨거워서 손을 데였다. 이교도가 성상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중략)"


물론 이건 제가 천주교 이야기이길 바라기 때문에 그렇게 읽힐 수 있는 것입니다.


SF 이야기로 읽고 싶어다면 존다리안 님 처럼, 
겨울철에 차가운 쇳조각을 양쪽 겨드랑이에 끼우는 것을 두고 "이건 일종의 냉각장치를 끼우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는 데 착안하여 "안드로이드나 사이보그,연금술로 만든 인조인간" 가설을 세울 수 있죠.
(저는 한편 양액에 날개가 돋아난다는 등의 도교적 클리셰가 원래 이야기에 '사족'을 단 경우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윤세평은 정말 흥미로운 캐릭터가 됩니다. 그를 언급한 어우야담의 기록도 볼까요?

조선 중종 때, 대신 윤세평이 사절단으로 북경을 가는 도중 어느 길손으로부터 마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집에 있을 때는 가족들과 떨어져 별당에서 기거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아내와 자녀들까지도 그를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당시 전우치라는 이도 기교를 부리는 자였는데 집주인으로 둔갑해서 아녀자들의 방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혐오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윤세평은 이런 소문을 듣고 그를 이 땅에서 쫓아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전우치도 윤세평의 소문을 들은 터라 그의 앞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은 터였다.
(...)
또 어느날은 윤세평이 집에서 통곡을 하며 우는 것이었다. 그의 가족들이 깜짝 놀라 이유를 물었더니, "전라도에 사는 내 누이가 지금 숨을 거두었구나." 하면서 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이의 집이 가난하니 하인들에게 장례준비를 시키고, 한 하인에게 편지를 써서 주면서 당부했다. "밖에 나가면 대문 앞에 갓을 쓰고 병줄 복장을 한 사람이 있으니, 그를 불러 들이거라." 하인들은 그를 불러들였는데 분명 신의 사자인 듯 했다. 그는 들어오자 윤세평에게 엎드려 절을 하자 윤세평이 말하기를, "내 누이가 전라도에서 방금 죽었구나. 이 편지를 가지고 가서 내가 명한 대로 시간 내에 답장을 가지고 오너라. 그렇지 못하면 벌을 내릴 것이니라."라고 했다. 사자는 길을 떠났고, 어둠이 채 내리기도 전에 답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편지 내용은 "그녀는 오늘 죽었는데 저희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마침 처형께서 편지와 장례물품을 보내주셔서 고맙게 요긴하게 잘 썼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리 알고 빨리 오셨는지 저희는 놀라울 따름입니다."라고 적혀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을 당한 누이 집은 서울에서도 열흘을 가야 당도할 수 있는 곳인데, 사자는 단 두 세 시간 만에 왕복을 한 것이다. 


천사를 소환하고, 장난꾸러기 도사 전우치를 응징하는... 키리시탄 마법사!
(적륜 님께서 소개하신 기리시탄 바테렌: 마법기담 참조.)


일본에서 키리시탄 마법사가 국가 전복을 꿈꾸는 복수의 화신이라면,
조선에서는 되려 순기능을 한다고 할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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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8세기 조선의 이국/해양 기담 및 복수극을 향한 취미에 대해서는 과거 포스팅 참조.


덧글

  • 역사관심 2018/04/01 11:20 # 답글

    오~~~ 이게 이렇게 연결되는군요. 사실 저 윤세평 기담에서 제일 특이한 부분이 겨드랑이에 철조각... 저 부분이었는데.
  • 남중생 2018/04/01 11:43 #

    헤헤, 남중생 뇌피셜입니다^^ 심증 정도로만 읽어주세요~ 오늘 중에 조선 키리시탄 설을 하나 더 올릴테니,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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