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 오시사의 논리적 사고와 동남아시아 여성의 역사적 주체성 인도차이나 ~Indochine~

Liam Kelley 교수님의 Ngô Thì Sĩ’s Logical Thinking and the Historical Agency of Southeast Asian Women를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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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학자 오시사(吳時仕, 1726 - 1780)가 베트남 역사기록에 대해 내린 평을 읽을수록, 이 사람이 맘에 든다. 오시사는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해야할 일을 했다. 바로, 역사 기록을 차근차근 읽고, 그 기록에 대해 논리적이며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물론 여느 역사학자와 마찬가지로 오시사도 당대 사조와 사회에 매여있었다. 이와 같은 조건은 오시사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과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영향을 주고 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합리적인 접근방식을 통해 역사기록의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오시사가 지적한 문제점은 오늘날에도 말이 된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현대의 역사학자(역시 자신이 사는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받고 한정받는 사람들)조차 오시사가 한 만큼 명확하게 짚어내지 못한 것들이다.


일례로, 오시사는 고대에 첫 (신화 속의) 웅왕(雄王)이 등장이 문헌 마다 크게 상반되게 다뤄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모든 기록에 첫 웅왕은 반인반신과 인간여성 사이의 아들인 것으로 언급된다. 아버지 락룡군(貉龍君)은 "용" 혹은 "뱀"의 세계에서 왔다. (그래서 용군으로도 불린다.) 한편 구희(嫗姬, 구 공주)는 인간이었다. 

이 둘은 100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한 명만이 최초의 웅왕이 되었다. 아들 중 누가 왕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다르다. 

이 주제에 관한 "최초의" 혹은 "가장 이른 현전하는" 기록은 15세기 기담집 영남척괴열전(嶺南摭怪列傳)이다. 이 문헌에는 락룡군이 구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한다.

"50명의 아이는 내가 수부(水府, thủy phủ)로 데리고 가서 각처(各處, xứ)를 나누어 다스리게 할 테니, 당신은 나머지 50명과 함께 지상에 남아 자식들로 하여금 나라(國, quốc)를 다스리게 하오."

(今相分別,吾將五十男歸水府,分治各處。五十男從汝居地上,分國而治。)

영남척괴열전의 기록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백 명의 자식들은 그 말에 따랐다. 그리하여 용군과 50명의 자식은 떠났다. 구희와 나머지 50명의 자식은 봉주(오늘날 백학현)에 거처했는데, 자식 가운데 웅장한 자(hùng trưởng giả)를 추대해 임금으로 삼았고, 웅왕이라 칭했다.  

(百男聽從,然後辭去。嫗姬與五十男居峰州(今白鶴縣是也),自相推服,尊其雄長者為主,號曰雄王。)


그러므로 이 기록에 따르면 어머니를 따라간 아들 중 하나가 최초의 웅왕이 된 것이다. 게다가 지상에는 "나라"가 있는 한편, 락룡군이 돌아간 수부에는 여러 "지역"(각처)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따라간 아들들이 서로 "추대해서 임금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이 기록은 구희와 함께 지상에 남은 50명의 아들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위 기록과 상충하는 기록도 15세기의 것인데, 오사련(吳士連)의 관찬 정사 기록인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다. 

이 책에서 오사련은 영남척괴열전의 정보를 포함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오사련이 기록한 바는 다르다.

아들 50명은 어머니를 따라 산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50명은 아버지를 따라 남쪽에 거했다. (남쪽에 거함은 남해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맏아들을 웅왕으로 봉했고, 군위를 잇게 했다. 

(分五十子從母歸山,五十子從父居南。 [居南作歸南海。] 封其長為雄王,嗣君位。)


이 기록에는 모두가 지상에서 살아가지만, 락룡군과 구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아들을 50명 씩 데려간다. 구희는 아들 50명을 이끌고 산기슭으로 가고, 락룡군은 "남쪽에" 나라를 세워 혼자서 맏아들을 웅왕으로 봉하고, "군위"를 잇게 한다.

이것은 명백히 훨씬 더 남성 중심적이고 왕조 중심적인 기록이다.


오사련 버전 이야기에 "남쪽에 거했다"고 되어있는 구절은 "남해로 돌아갔다"고도 되어있다. 이는 17세기 후반에 대월사기전서를 인쇄 출판하면서 누군가가 추가한 것이다. 이 누군가는 오사련의 이야기와 영남척괴열전의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이 차이는 오시사가 18세기에 논한 문제다. 오시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관[오사련]은 아비를 따른 자들이 국통(國統)을 바르게 하기를 원했다. 그로 인하여, 그 문장을 바꿔서 "나머지 50명은 아버지를 따라 남쪽에 거했다."고 하고, 그 아래 웅왕을 이어붙임으로써, 마침내 사실이 착오되고 잊혀지게끔 했다. 독자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史氏欲以從父者為正國統,因變其文曰,五十子從父居南,而以雄王繋其下,遂使事實錯泯,讀者不能無疑。)


다시 말해, 오시사는 오사련이 영남척괴열전의 기록을 변형해, 보다 명확한 부자승계의 국통을 보이고자 했다고 느낀 것이다.

그런데 구희를 따라간 아이들도 락룡군의 아들 아니던가? 왜 이들 중에서 왕이 나올 수 없을까? 오시사가 던진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어미를 따른 아들들은 여전히 용군의 자식으로, [아버지의 핏줄에서]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어찌 반드시 아비를 따른 아들만 왕이 되고, 어미를 따른 아들은 오랑캐(蠻者)가 되었는가? 

(從母之子,孰不離屬於龍君者,豈必以從父之子為王,而從母之子為蠻者乎。)

어머니를 따라 산으로 들어간 아들들이 "오랑캐"가 되었다는 기록이 당시에 있었는지, 그저 당시의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평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오시사가 당대 사람들의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과거 일화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들은 모두 남자였다고 주장하는 남성 중심적인 믿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이른 기록이 가리키는 바가 아니다. 

오사련이 남성 중심적인 역사를 제작했다는 것은 새로운 의견이 아니다. 예컨대 수 년 전에 학자들은 오사련이 쯩 자매의 반란에 내용을 추가함으로써 서사를 보다 남성 중심적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가장 이른 사료에는 쯩 짝이 한나라의 행정관과 법적인 문제에 휘말렸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 반면, 오사련은 한나라의 관료가 쯩 짝의 남편을 죽였기 때문에 복수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내용을 추가했다. 

다시 말해, 남편을 이야기에 끌어들임으로써, 오사련은 여성의 주체성(agency)를 줄였다. 쯩 짝의 반란 사유는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남편에 대한 순종이라는 사회적 가치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여성이 역사적으로 "중국" 여성 보다 더 주체적이었다고 믿고, "베트남"을 "동남아시아"라고 믿는 사람들은 재빨리 오사련이 쯩 자매의 반란에 관한 정보를 왜곡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여성의 역사적 주체성"을 보여주는 더 좋은 "예시"는 영남척괴열전에 기록된 최초의 웅왕이 세워진 이야기일 것이다. 

여기에는 남편이 수중 궁궐에서 애들이랑 노는 동안, 자기 힘으로 아들 50을 기르는 여자 이야기가 있다. 
(외출한 남편이 친구들이랑 종일 커피/맥주/위스키를 마시는 동안 가게를 운영하는 부인과 닮았다.)

또한 (틀림없이 어머니의 지도 아래)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장 웅장한" (나이만 많은 것이 아니다 - 그건 "중국식" 방법이니까) 아들이 왕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동남아시아"를 가장 아름답게 포착했다. 그런데 왜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주지 않는걸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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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서 리암 켈리 교수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농담을 하고 있다. 연관 포스팅 (차후 게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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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nenga 2018/03/23 12:51 # 답글

    미국의 모 토크쇼의 아이들 인터뷰 조사에서는
    압도적으로 엄마를 선택하더군요
  • 남중생 2018/03/23 17:11 #

    아무래도 시간을 오래 보낸 쪽을 선호하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 解明 2018/03/23 13:16 # 답글

    "남편은 외출하고는 친구들이랑 종일 커피, 맥주, 위스키를 마시는 동안 가게를 운영하는 부인과 닮았다"라는 대목에서 터졌네요.
  • 남중생 2018/03/23 17:10 #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억척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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