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오 학사는 운남에 가있어! 곧 돌아오실 거라구!" 용틀임하는 동아시아 근세

*큰 오역을 하나 했습니다. 
오 학사는 오삼계가 청나라에 반기를 들자 "배편으로" 조선에 편지를 보냈다는 소문이 납니다.
"배를 타고" 직접 바다로 나간게 아닙니다.ㅠㅠ
전적으로 제 오역입니다.


지난 포스팅에서 경정충 (하프) 조선인 설을 다뤘었죠? 
여기에 이어서 좀더 자료 발굴을 하겠습니다.

출처는 계속 성해응의 연경재전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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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배신전(
陪臣傳)[1] 뒤에 적는다.

김후재(金厚齋)의 서간집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청인이 오 학사[2]를 죽이지 않았다. 오삼계의 군중에 숨어, 삼계가 청에 반기를 들기에 이르자, 학사는 배편으로 우리에게 편지를 썼는데, (본인의) 나이로 증험을 삼았다. 윤 학사의 순절도 날짜가 미상이다. 

돌아가신 황강한(黃江漢)의 배신전의 내용에서 오, 윤 두 학사에 이르면 그 돌아가신 바를 모르거늘, 정유년 4월 19일 청인에게 피살되었다고 상세히 써있는 것이다. 

생각컨대 우리나라 사람(동인)이 윤기봉의 일을 가리켜 오 학사와 헷갈린 것이다. 기봉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가, 경중명의 포로가 되었다. 이 때는 중명을 따랐다. 그 (경중명의) 손자 경정충이 동남에서 군사를 일으켜, 오삼계와 동맹을 맺고, 우리에게 통신을 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경정충을 모르고 그저 오삼계를 알 뿐이니, 따라서 기봉을 오 학사라고 말한 것이다. 

(이하 생략)

*윤기봉과 무관한 이야기이므로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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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강한의 황명배신전을 말한다. 삼학사 중 홍익한을 제외한 두 학사의 4월 19일 사망설을 펼쳤고, 이후 송시열의 "삼학사 전"에 그대로 반영되어 삼학사 관련 공식설정으로 고착된다. 4월 19일 사망 기록은 소현세자의 심양일기에서도 확인된다.

[2] 삼학사: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에 반대했다가, 이후 심양에 끌려가 고문/처형된 3명의 학사(學士). 홍익한, 윤집, 오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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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성해응의 논리를 정리해보자면,

1. 윤기봉은 실제 인물이다. 
2. 윤기봉은 경정충 세력에 속해 있는데, 조선에 연락을 취하려고 했다.

3. 그런데, 조선인들이 경정충을 모를테니까 (동맹 세력인) 오삼계의 이름을 빌리기로 결정.
4. 그런데, 그것도 "오삼계"라고 쓰지도 않고 "오 학사"라고 씀. (성해응: 그래서 조선인들이 헷갈린거야!) 
5. 그런데 사실은 편지에 쓴 "오 학사"도 오삼계를 확실히 지칭한 것도 아니고, 윤기봉이 자기자신을 말한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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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드는 의문:

- 윤기봉은 (최소한 아버지가) 조선인인데 왜 스스로 누구누구의 아들/자손 "윤기봉입니다"라고 하지 않았지? 왜 그 대신 굉장히 헷갈리기 쉬운 편지를 그것도 남의 이름으로 써서 보냈지?

- (분명 전편 설정에서는) 복건성에서 태어났고 조선땅을 밟아본 적도 없는 윤기봉이, "조선인들이 병자호란 때 참전한 경중명 아들은 모르고 운남왕 오삼계는 알겠지"라고 판단을 했다?

위의 4번 논리가 오히려 성해응이 빠진 함정을 잘 보여주는 것 같은데,
성해응은 오 학사와 오삼계가 같은 성이라서, 읽는 사람이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걸 자기 주장의 주된 논거로 삼고 있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김후재의 서간집에 등장하는 "오 학사가 오삼계의 군중에 숨어~" 썰부터 
"같은 오(吳)씨 성인데... (받아주지 않았을까?)"하는 기대가 깔려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건, 여기서 인용하는 원문을 김후재 서간집에서 찾으면 더 쓰겠음)


여기서 볼 수 있는 패턴.

으으... 성공, 경, 씨 대만... 분명 우리 조선한테 도와달라고 할텐데, 아니 안 요청해도 우리가 도와줘야할텐데...
...도령! ...감록! 씨 도령이 바다 밖에서 우리를 찾아올 게 틀림없어!

으으... 학사, 으으... 절개를 지킨 불세출의 영웅이 그리 쉽사리 죽었을리가 없는데... 으으
... 삼계! 삼계 세력에 숨어들었다가, 배편으로 소식을 전해올거야!


1. 성이 동일한 인물을 찾는다 (없으면 만든다)
2. 중국 남부로 피신했다고 주장한다.
3. 조선으로 편지를 쓸 거다 (분명) 


"기봉"도 학사의 불확실한 생사여부가 낳은거라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윤기봉의 "어렸을 때 죽은 아버지" 설정과 "같은 성씨에 대한 집착"이 나란히 이해가 된다... 


▲이거잖아... 


"오 학사는 오삼계한테 가있어! 곧 돌아오실 거라구!"
(이하 생략)



결론:
성해응은 나름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고, 
오 학사-오삼계 음모론이 틀렸고, 삼번의 난 지역에서 "편지를 보냈다는" 공통점을 볼 때, 윤기봉과 혼동한 거라고 파악했다.
하지만, 그 공통점이 많이 보이는 윤기봉 이야기도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하나의 음모론을 제거한다면서, 또다른 음모론에 놀아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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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3학사의 사망 날짜 기록은 1790년에야 박제가(또 박제가네요...)가 발견합니다.

"박제가의 메모를 본 서호수는 삼학사가 죽음으로 의리를 지킨 사실이 분명해졌음을 기뻐했다. 그때까지 조선인은 삼학사의 종말을 분명히 알지 못했고, 홍익한은 오삼계(吳三桂)의 군대에, 윤집과 오달제는 먼 곳에 유배되었다는 소문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정조는 삼학사가 순절한 사실이 청나라 서적에 드러났다고 하면서, 그때까지 삼학사가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다고 했다. 삼학사의 죽음을 보았던 조선인이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였다. 1796년에 정조는 홍익한이 살신성인한 3월 5일에 제사를 올리게 하고 특별히 제문을 지어 보냈다. 이로써 홍익한의 사망일을 3월 5일로 확정되었다."


"그때까지 조선인은 삼학사의 종말을 분명히 알지 못했고, 홍익한은 오삼계(吳三桂)의 군대에, 윤집과 오달제는 먼 곳에 유배되었다는 소문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정조는 (...) 그때까지 삼학사가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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