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오삼계와 함께 삼번의 난을 이끈 경정충은 조선인의 아들? 용틀임하는 동아시아 근세

허목(許穆)의 문집인 의 미수기언(眉叟記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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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童子) 기봉(起鳳)은 옛날 혜군 태수(槥郡太守 혜군은 면천(沔川)의 구명) 윤복원(尹復元) 형제(兄弟)의 손자가 되는 사람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백성들이 당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부모 형제 처자가 서로 잇달아 죽어서 시체가 즐비하여 혼백은 의지할 곳이 없었으며, 포로가 길에 서로 이어지고 국가와 민족이 패망으로 서로 잃어버리고 울부짖으며 헤매고 있었다. 지금 그런 지가 40년이 지났으니, 그때에 늙은 사람은 다 죽었고 아이들은 늙었다.
이 동자는 복건성(福建省)에서 출생하였는데 그 아버지는 포로로 잡혀가 죽었으니, 고국과는 1만 수천 리가 떨어져 있는 곳이다. 우리 대행왕(大行王 임금이 죽은 뒤 아직 시호가 없을 때의 칭호) 10년(1669) 사신이 오는 편에 편지를 부쳐 왔는데 거기에 아비는 죽고 어려서 고모에게 의지해 있다고 하였고, 그 집안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고국의 소식을 알려 달라고 하였다. 백월(百越 중국 남단(南端)에 있는 종족(種族))과 조선(朝鮮)은 옛날 방외(方外)의 중역국(重譯國 여러 번 통역을 거쳐가는 나라)이다.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운 이때에 친척 사이에 이렇게 핏줄이 통하고 있으니, 대개 사람의 힘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고 인정이 서로 감동하여 된 것이라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아, 슬프다. 난리를 당하여 생긴 애처로운 사정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 아프게 하는구나.
숭정(崇禎) 말년에 명(明) 나라 장수 경중명(耿重明)은 그 군대를 거느리고 오랑캐에 항복하였는데, 명 나라가 망한 뒤에는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하여 땅을 떼어 봉(封)을 받아 정남왕(定南王)이라 칭하는 자다. 그전에 우리 강도(江都 강화도(江華島))가 함락되었을 때에 보화와 부녀를 모두 약탈해 갔는데, 동자의 온 집안은 그때 포로가 된 것이다. 그 아비에게 누이가 있었으니, 이 동자를 보살펴 준 사람이요 바로 동자에게 고모가 되는 사람이다. 중명에게 시집을 가서 정충(精忠)을 낳았는데, 지금 중명이 죽고 그 아비를 대신해서 복건을 지키고 있는 자다.
15년 맹동(孟冬) 10월 병신에 석호 노인(石戶老人)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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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은 성해응의 연경재전집에 있는 기사입니다.
(번역은 제가 했는데, 실력이 일천하니 얼마든지 고쳐주시기 바랍니다.ㅠㅠ)


허씨 기언에 이르길, 동자 기봉은 옛날 혜군 태수 윤복원의 형제의 손자되는 사람이다. 병자년에 청나라 장수 경중명이 강화도를 함락시키고, 보화와 부녀를 끌고 갔다. 동자의 가족도 포로가 되었다. 그 아버지에게는 여동생이 있는데, 중명이 (아내로) 거두어들여 정충(
精忠)을 낳았다. 중명은 죽고, (정충이) 대를 이어 복건 땅을 차지하고 있다. 동자도 복건에서 태어났다. 

현종 10년 경술년 사자가 와서 편지를 써서 전하길,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려서부터 고모에게 의탁해 자랐다고 하면서 집안과 나라의 소식을 물었다. 고모라고 부르는 사람은 정충의 어머니다. 그런데 중명의 아들은 계무이니, 정충은 그 (중명의) 손자다. 그 편지에서 중명이 (고모를) 거두어들였다고 한 것으 틀렸다. 어찌 계무가 거두어들인 것을 잘못 말해 중명이 거두어들였다고 썼을까? 

13년 계축, 정충이 복건을 차지했다. 오삼계와 병력을 연대하여, 청의 (복건) 총독 범승모를 잡고 민(閩) 땅으로 들어가니, 진지(鎭) 내의 장수들이 모두 정충을 따랐다. 그의 정성이 이와 같았다. 무오년, 청나라 장수 도뢰(圖賴)가 민 땅에 들어오자, 정충은 항복했다. 

원래 중명은 가도(椵島)에 있었다. 경서를 익혔고(?) 덕이 있었는데 황명을 배반했다. 오랑캐들이 장수로 삼고 귀하게 대했다. 돌이켜보건대, 정충은 이를 즐겁게 여기지 않고, 거병하여 오랑캐(夷虜)를 쓸어버리고자 하였다. 이 때 황통은 이미 망해있었다. 정충의 뜻은 명나라 종실을 구해서 세우고, 천하를 호령하여 반정(反正)을 하고자 하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대만에 있는 정경(鄭經) 처럼 멀리서 영력제를 받들어[1]정월에 민월(閩越) 땅에서 웅거하려는 것이었는가? 또 아니면 오삼계를 따라 번(藩)의 방어를 맡고자 스스로 충성을 다하는 것이었는가? 이미 의를 떠받든 즉, 어찌 그 뜻을 따르지 않고 도뢰에게 항복한 것인가? 

아아, 정충은 참으로 동방 출신이다. 초목에 맹세컨대 우리의 기류(氣類)로다. 동쪽 땅의 사람은 아직까지도 만력제의 덕과 숭정제의 의를 노래함이 고을에서 끈이질 않는다. 정충은 꿋꿋이 타고난 천성을 지키고, 누린내 나는 오랑캐에 물들지 않았다. 즉, 그 마음의 불안은 좌임(左衽, 오랑캐 풍습)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혹자는 말하기를, 청인들이 정충의 번을 철폐하고, 요동(遼)으로 옮기고 싶어했다고 하여, 정충이 이에 군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저 요동은 정충의 고향(故邦)이니 금의환향할 일이다. 어찌 근심이 있어서 이러하였겠는가? 나는 정충이 반드시 이곳(복건)에서 나오지 않은 까닭을 안다. 모름지기 정충의 웅대함은 민 땅인 것이다.

동남의 호걸지사들이 지혜로운 자는 획책을 짜고, 용맹한 자는 무(武)를 떨치며, 왕진(王進)과 장문도(張文鞱)의 무리처럼 공명(功名)을 향해 내달릴 때, (윤)기봉은 반드시 더불어 나란히 말을 탈 것이다. 이 일이야말로 거리낌 없다고 할 수 있다. 아쉽도다, 땅이 멀어 소식을 알 수 없으니. 아아, 초월(楚越)과 북경(燕都)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구나.
 
그 황명의 은택에 젖은 이들은 분명 중국(中州)[2]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김성환(金聲桓)과 왕득인(王得仁)이 강우(江右)에서 일어났고, 이성동(李成棟)이 광주(廣州)에서 일어나서, 황명이라는 이름을 되찾으려 했다. 초월(楚越) 땅의 선비도 자연스레 이에 따랐는데, 중국의 선비는 반응하는 자가 없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이런 연유로 정충의 뜻이 이뤄지지 못했으니, 중국 선비를 욕보이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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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성공의 아들을 말한다. 영력제는 남명의 황제.
[2] 요동이나 복건 등지의 변방을 제외한 중국을 말한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일본인이었던 정경(鄭經)...
어머니가 병자호란 때 포로로 끌려온 경정충(精忠)...

삼번의 난과 남명 정권... 그들은 대체 정체(identity)가 뭐였던걸까요??


▲어린 정성공(정도령)과 어머니 타가와(田川)를 그린 박제가의 그림. 연평초령모의도(延平初齡依母圖)

서양화법(오오...)+박제가(호옹...)+정성공 모자(부왘ㅋㅋㅋㅋㅋ)
전 이런 그림이 있는지도 몰랐네요...

P.S.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게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윤기봉이 자기 고모부가 누군지도 헷갈린다는게 이상하죠?

어쩌면 "윤기봉의 편지”의 정체는, 반청복명 운동에 연관되어있다고 느끼고 싶었던 조선인 식자층의 관념이 반영된 위조문서가 아닐지도 생각해봐야합니다.

정씨 대만에 대한 조선인들의 인식이 만들어낸 정감록과 "해도진인 정도령"처럼 말이죠.

"마지막으로 한반도와 대만섬이라는 두 개의 중심점이 16~18세기의 정치적 연쇄반응 속에서 뜻밖의 모습으로 관련을 맺은 그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사례를 소개한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하고 대만섬의 정씨 정권과 대립하던 시기, 한반도의 해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배가 종종 출몰하였다. 이를 ‘황당선(荒唐船)’이라 부른다. 조선 사람들은 이 배를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협조하는 조선을 증오한 대만섬의 정경이 보낸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날과 같은 지리 감각이 없던 조선 사람들에게 대만섬은 한반도의 호서 지방과 가까이 있는 섬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공포가 언제부터인가, 한반도 남쪽바다 저 너머에 있는 섬에 사는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장차 조선왕조를 뒤엎으러 올 것이라는 혁명의 신앙으로 바뀌었다.(이재경·‘삼번의 난 전후(1674~1684) 조선의 정보수집과 정세인식’·서울대 국사학과 석사논문) 현재 유통되는 ‘정감록’은 근대에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김용주(金用柱) 등이 그 형태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백승종·‘정감록 미스터리’·푸른역사) 그러나 그 원형은 뜻밖에도 대만섬의 첫 독립 정권과 이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공포에서 출발하고 있다."
(김시덕 교수님의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中 112-11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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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흑범 2018/03/10 08:25 # 답글

    허목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수 있습니다 성리학이 진리라고 여기던 시대에 단군정통론을 주장했고, 노장사상에도 관심을 보였다 하니까... 그러면서 이율곡을 스님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었지요.
  • 남중생 2018/03/11 00:27 #

    위조론을 말씀하시는거라면, 허목 본인이 위조를 했을 가능성은 적다고 봅니다. 사신이 와서 편지를 전달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차후에 연행사와 별단(보고서) 작성이 정례화되면서 이런 가짜 문서가 유통되는 경우는 꽤 빈번하기도 했고요.
  • 쿠다라나이 2018/03/10 16:04 # 삭제 답글

    대만은 백제의 담로아니었나요..(퍽)
  • 남중생 2018/03/10 19:50 #

    그러기엔 닉네임부터 벌써 백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잖아요ㅋㅋㅋㅋㅋㅋㅋ (설득력이 없는걸?ㅋㅋ)
  • 역사관심 2018/03/11 04:12 # 답글

    김시덕교수님의 저 부분을 읽으면서 조선인들의 당대 대만에 대한 감각이라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측면에 관심이 잠시 갔었는데, 오늘 이 글도 그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남중생 2018/03/11 05:43 #

    그리고 명청 교체기에 조선인들이 어렴풋하게 상상한 대만의 이미지가, 이후 20세기 들어 식민지 문학에서 "대만의 생번보다 조금 나은 조선인"이 언급되기 전까지 가장 가깝고 뚜렷한 이미지 아닐까 싶습니다. 대만과 조선이 엮일 기회는 크게 이렇게 두 번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어때요?" "요보 말씀요? 젊은 놈들은 그래도 제법들이지마는, 촌에 들어가면 대만의 생번보다는 낫다면 나을까, 인제 가보슈.... 하하하." 대만의 생번이라는 말에 그 욕탕 속에 들어앉았던 사람들은 나만 빼놓고는 모두 껄껄 웃었다. 나는 기가 막혀 입술을 악물고 치어다 보았으나....(후략)

    적륜재, "대만과 조선....그러고보니, 아는게 없구나!" 中
    (http://dylanzhai.egloos.com/3182562)
  • 역사관심 2018/03/11 04:13 #

    으헉.
    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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