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 안남, 풍극관의 친구 문리후가 조선인 표류객 조완벽에게 이수광의 시를 보여주며
("두유노 리뚜이꽝?")
라고 말한게 바로 지난 번 포스팅이었습니다.
안남 사람들이 이수광의 시를 이렇게 아낀 이유는,
이수광이 중국에 갔다가 만난 풍극관과 시를 주고 받았는데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만 리나 떨어진 장기 낀 나라에서 와서(萬里來從瘴癘鄕)
멀리 중역을 통해 군왕을 알현하니(遠憑重譯謁君王)
한나라 때 새 동주가 세워진 지역이며(提封漢代新銅柱)
주나라 때 조공바치던 옛 월상국이라오(貢獻周家舊越裳)
"기묘한 모습의 산에서 코끼리 뼈가 많이 난다 (山出異形饒象骨)"
땅은 영기를 뿜으니 용향이 생산되도다(地蒸靈氣產龍香)
지금 중국에서 신성한 군왕을 만나니(卽今中國逢神聖)
천년토록 바람 잠잠하고 큰 파도 없으리(千載風恬海不揚)
사실 이 시는 이수광이 한 번 써서 풍극관에게 선물로 주고 끝난게 아닙니다.
조선과 안남, 두 나라의 래퍼가 조국의 명예를 건 랩배틀이었죠.
(저도 한시는 기본 밖에 모르는데)
이 랩배틀의 비트는 한 줄에 7글자 씩,
그리고 1,2,4,6,8번 줄에 향(鄕), 왕(王), 상(裳), 향(香), 양(揚)의 라임을 맞추는 겁니다.
라임이 잘 안 맞는다고요?
사실 조선 한자 발음을 고려하면 다소 색다른(?) 운자이긴 합니다.
하지만 안남 발음으로는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죠.
"흐엉, 브엉, 트엉, 흐엉, 즈엉"
그래서 저는 이 랩배틀, 안남 측이 먼저 마이크붓를 잡은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기록 상으로는 조선 쪽 랩이 먼저 나옵니다.)
그렇게 8라운드를 뛰시고 또 글자수랑 라임 바꿔서 계속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아수라 안남 래퍼 풍극관이 폭탄 발언을 합니다.
해동도 옛적엔 락룡의 땅이어서 (海東舊是洛龍鄕)
영재를 뽑아내니 왕좌의 재목들이로다 (秀發英才可佐王)
팔두 고명이니 조자건 같고 (八斗高名曹子建)
일편 정론은 두황상이로다 (一篇正論杜黃裳)
씩씩하게 수레 몰아 사신행차 엄숙하고 (駸駸車驟行軺肅)
복복한 옷의 향기 좌석마저 향기롭네 (馥馥衣薰左席香)
객관에서 잠시 서로 만난 사이지만 (客館暫時相邂逅)
귀국하는 수레바퀴 소리 만고에 전하여 드높으리 (蜚聲萬古共傳揚)
우와, 이게 무슨 소리죠?
해동(한반도)도 옛날에는 락룡군의 땅이었다고요?!

▲갓갓 풍극관 래퍼님 덕에 난생신화 분포도 다시 한 번 보고 가자...
도대체 풍극관은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이었을까요?
어쩌면 (용비어천가처럼) 조선의 왕족 또한 용의 후손이라는 흔한 칭찬을 한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중국사서를 통해 가야의 수로왕 신화 같이, 여러 개의 알에서 형제가 태어나는 이야기를 읽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락룡)군은 제래(帝來)의 딸, 구희(嫗姬)와 결혼해서 백 명의 사내아이를 낳았다. (풍속으로 전하기를 100개의 알을 낳았다고 한다) 이는 백월(百粤)의 조상(祖)이 되었다."
▲대월사기전서 中
또 반대로 이 백월(百粤 또는 百越)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조선인들도 대개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풍극관이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는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락룡"도 "상골"과 마찬가지로 그저 우연의 일치인 걸지도...
어느 쪽이든, 저는 충분히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곳에 용산(龍山)이 있는데 이것 참 더욱 신기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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