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베트남 민족사에 있어서 청동북은 무관하다? 인도차이나 ~Indochine~

Liam Kelley 교수님의 The Unimportance of Bronze Drums in Việt History를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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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 들어 청동북은 "비엣
(Việt) 민족의 고대사"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비엣(Việt)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현재까지 (대략 기원후 1000년 이래) 청동북은 비엣 민족의 문화생활의 일부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청동북을 문화생활에 사용한 사람들은 비엣 민족이 자신들과 다르게 인식하고 멸시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이전까지는 그 어떤 비엣 사람도 청동북을 "비엣 민족의 고대사"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보지 않았다. 실제로 여러 세기 동안 대부분의 비엣인은 청동북을 보지도, 청동북에 대해 듣지도 못 한 채로 일생을 보냈다.


20세기 이전에 청동북에 대해 기록한 비엣인도 그 북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청동북에 대해 기록한 몇 안 되는 사례를 보면, 당시 현전하던 "중국" 기록에서 인용했다. 자기 스스로 청동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레 딱(Lê Tắc)이 14세기에 쓴 안남지략(安南志略)에서 청동북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살펴보자. 레 딱은 청동북을 노자(獠子, Lão)라는 다른 민족과 연관지었다. 레 딱은 노자를 "오랑캐(蠻子)"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노자(獠子)는 만자(蠻子)의 다른 이름이다. 많은 노자가 호광(湖廣)과 운남(雲南)에 노예로 있다. 교지(交阯)에 복역하는 노자도 있다. 또한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이빨에 구멍을 뚫는 자들도 있다. 종류가 아주 많다. 옛 기록에 실려있기를, 두형노자(頭形獠子, 아마 비두노자飛頭獠子의 오기일 것이다[1]), 적곤노자(赤裩獠子) 비음노자(鼻飲獠子)가 있다. 모두 바위 동굴과 다락집(橧巢)[2]에 살고 갈대로 술을 마신다(蘆酒). 적과 싸우기를 좋아해, 노()를 많이 다루며, 동고(銅鼓)를 울린다. 높고 큰 북이 귀한 북이다. 처음에 (북을) 만들면 뜰 한가운데에 놓고 동족(同類)을 부른다. 사람이 와서 문까지 (뜰을) 가득 채운다. 부호(豪富)의 딸(女子)이 금과 은으로 만든 비녀로 북을 두드리고는 주인이 갖게 내버려둔다. 혹은 말하기를 동고는 제갈량이 남만(蠻)을 정벌하던 징(鉦)이라고 한다."[3]  

[獠子] 獠子者蠻子異名也。多隸湖廣雲南、有服役於交阯、又有雕題鑿齒者、種類頗多、周載有頭形獠子、赤裩獠子鼻飲獠子、皆居岩窟或橧巢、飲蘆酒、好戦敵多操弩、撃銅鼓、以高大者為貴、鼓初成、置庭中、設酒招同類、来者、盈門、豪富女子以金銀釵擊鼓竟即留與主[4]或云銅鼓、乃諸葛亮征蠻鉦也。


그러므로 이 문헌에서, 청동북은 비엣과 다른 민족인 노자와 연관지어졌다. 레 딱이 "오랑캐"라는 멸칭을 붙인 민족이다. 노자라는 이름이 우리가 오늘날 "라오"라고 부르는 민족과 같다고 말하면 편리하겠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청동북은 우리가 오늘날 라오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조상만 사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레 딱이 제공한 정보 중 어느 것도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이 정보의 출처는 더 이른 시기의 "중국" 문헌이다. 혹자는 주장하기를, 레 딱이 이렇게 쓴 이유는 그가 책을 쓸 때 "중국"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지리지인 대남일통지(大南一統志) 또한 마찬가지로 "중국" 문헌을 인용해서 청동북이 무엇인지 설명했다.[5] 


대남일통지를 보면 동고신사(銅鼓神祠)라는 사당을 다룬 구절이 있다. 이 사당에 대해서는 차후에 쓰겠다. 대남일통지의 해당 구절 맨마지막에는 몇몇 "중국" 문헌을 인용해서 청동북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대남일통지의 베트남어 번역에서는 이 정보가 빠져있다는 것을 눈여겨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한문 문헌의 베트남어 번역이 형편없는 또 하나의 사례 추가다.)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후한서(後漢書)를 보면 마원(馬援)이 교지(交趾)에서 락월고(越鼓)를 얻었다고 되어있다. 광주기(廣州記)를 보면 리()와 로()가 구리를 녹여 북을 만든다. 오로지 높은 북이 귀하다. (너비가) 넉넉히 한 장(丈)을 넘는다. 처음에 (북을) 만들면 뜰에 걸어놓는데, 술을 마련하고 동족을 부른다. 부호의 딸(子女)[6]이 금은으로 된 큰 비녀로 북을 두드린다. 비녀를 남겨놓아 주인에게 넘겨준다. 또 수서(隋書)를 보면 여러 만(蠻)이 큰 동고를 많이 주조한다. 유사시에 북을 울리면 구름처럼 사람이 몰려온다. 북을 가진 자를 도로(都老)라고 부른다. 그 제도는 높이가 3, 4척(尺)에 윗면은 있고 바닥은 없다. 그 소리가 몹시 크지는 않다. (북의) 이름을 제갈고(諸葛鼓)라고 하는데 이는 (제갈)공명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명일통지(明一統誌)에도 제갈정만정(諸葛征蠻鉦)이라고 한다. 이를 근거로 들어, 동고는 동한 때 부터 있었지, 제갈공명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7]

後漢書、馬援於交阯得駱越鼓。廣州記、狸、獠、鑄銅為鼓鼔、惟髙大為貴、濶丈餘。初成懸於庭、置酒、招同類、豪富子女以金銀為大釵叩之、迶畱許主人。又、隋書、諸蠻多鑄大銅鼓、有事則鳴之到者如雲。有鼔者號為都老。其製髙三四尺、有上面、無下底。其聲亦不甚大。名曰諸葛鼓云。是孔明所製。明一統志、又以爲諸葛征蠻鉦。據此則、銅鼓自東漢巳有之、非始於孔明也。


그러므로 "비엣 민족 고대사"의 상징물이 청동북은 20세기 전까지 기본적으로 비엣 민족이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20세기 들어 유럽인들이 청동북을 땅에서 발굴해내고 비엣인에게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소개한 뒤에야 비엣인이 청동북을 그리 중요한 상징물로 보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 이미 답을 말해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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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켈리 교수가 이렇게 역주를 단 이유는 비두노자(飛頭獠子)라는 명칭을 중국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발힌 바 있는데, 아마도 비두만(飛頭蠻), 혹은 비두노자(飛頭獠子)에 대한 전승과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로쿠로쿠비"도 참조.)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100년 전으로 돌아가 보르네오 섬의 다약(Dayak) 인, 수마트라 섬의 바탁(Batak) 인, 대만 고산지대의 여러 선주민 집단을 만나본다면, 이들의 생활양식은 기원전 1천년기 사람들의 공통된 생활양식과 여전히 유사성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유사성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기둥 위에 얹힌 집에 살고, (찹)쌀을 먹고, 화전농법을 행하고, 그리고... 머리를 사냥하는 것이다."

[3] 이 마지막 문장은 왠지 모르게 Kelley 교수님의 번역에는 빠져있다. 또한 중간에 "노를 많이 다룬다(多操弩)"는 내용도 생략되어있다. 아래, 대남일통지 기사도 마찬가지로 제갈공명이 언급되는 마지막 몇 문장을 생략하고 번역하셨다. 
이전 베트남의 노자 포스팅에서는 모두 번역하고 언급한 부분이라서, 왜 생략했는지 의아하다. 

이 포스팅에서는 서유기 中 공명의 진태고 기사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전부 번역한다.

[4] 원문에는 주입(主入)이라고 되어있지만, "주인"이 맞다. (베트남의 노자 포스팅 참조.)

[5] 여기서 켈리 교수님께서 "중국"에 큰따옴표를 계속 다신 이유는 "비엣"이 베트남이 아니고, "노자"가 라오스가 아니듯, 여기서 말하는 "중국"도 현대 국가 중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6] 한나라 시대의 어느 시점부터 (후한서가 쓰일 당시까지도) "자녀(子女)"는 "딸"이라는 뜻이었다. 성중립적인 자(子)에 성별을 붙여, 아들(子男)과 딸(子女)로 구분했다. 14세기 원나라 때 쓰인 "안남지략"에는 자녀(子女)를 뒤집어 여자()라고 고친 것에도 유의.
쉭릯 님의 트윗 참조.

[7] 이 마지막 문장은 의미가 모호하다. 대명일통지를 "명일통지"라고 쓴 것으로 보아, 이 구절은 대청일통지를 참조하고 쓴 것인데, 대청일통지의 원문에는 "지금 후한서 주석을 보면 이 동고는 동한 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제갈공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今按後漢書注則東漢時巳有此鼔似不始于孔明也)"라고 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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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푸른별출장자 2018/03/17 01:33 # 답글

    헤드 헌팅은 어쩌면 폴리네시아인들의 전통인 듯 합니다.

    지금의 베트남 북부와 중국 남부에서 기원전 아주 오래전에 대만을 거쳐 동으로는 뉴질랜드와 하와이 (또는 미대륙까지)
    서로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마다가스카르 (아프리카에도 들어 갔겠지만 흔적은 없고...)
    북으로는 일본과 한반도까지...

    대만의 고산족부터 다이야크나 바타크 나 또는 머나먼 폴리네시아 어느 섬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 헤드 헌팅이고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는 노래들은 꺽기 기법이 들어간 창법을 따르고 있지요.
  • 남중생 2018/03/17 07:08 #

    꺽기 창법도 오스트로네시안/폴리네시안 전통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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