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청동북을 두드리던 사람들은 어디로? (2) 인도차이나 ~Indochine~

Liam Kelley 교수님의 What Happened to the Đông Sơn Headhunters?를 번역합니다.
--------------------------------------------------------------------------------------

얼마 전에 필자는 (여기서) 끼에우 꽝 쩐 박사(Bác sĩ Kiều Quang Chẩn)의 논문을 언급했다. 이 논문은 머리사냥 풍습이 동 선(Đông Sơn) 시대 홍하 유역에 존재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이 주장의 한 축은 (동 선 문화의) 청동북에서 잘린 머리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형상이 있다는 것에 일부 근거하고 있다.[1]

청동북을 만든 사람들이 머리사냥을 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으나, 이들에게 청동북이 중요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데에는 무리가 없다.


이어서 필자는 며칠 전 (여기) 동 선 청동북을 중시하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왜냐하면 14세기에 레 딱(Lê Tắc)은 청동북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오랑캐(蠻子)"라고 분류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홍하 유역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진 교주외역기(交州外域記)에 답이 나와있다고 생각한다. 교주외역기는 역도원(酈道元)의 6세기 저서 수경주(水經注)[2]에 인용되어 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구절을 굉장히 유명한데, 다음과 같다.


交州外域記曰,交趾昔未有郡縣之時,土地有雒田,其田從潮水上下,民墾食其田,名為雒民。設雒王雒侯主諸郡縣。縣多為雒將。雒將銅印青綬。

교주외역기에 말하길, 교지(交趾)가 옛날에 아직 군현이 없었을 때, 토지에는 락밭(雒田)이 있었고, 그 밭은 조수(潮水)의 오르내림을 따랐다. 그 밭을 개간해서 먹고사는 백성의 이름은 락민(雒民)이었다. 락왕(雒王)과 락후(雒侯)를 세워 여러 군현을 다스렸다. 현에는 여러 락장(雒將)이 있었다. 락장은 구리 도장(銅印)과 푸른 끈(青綬)을 가졌다.

이 구절은 한나라 통치 이전(교지에 아직 군현이 없었을 때)의 시기를 언급하는 것이라면서 락 관료가 한나라의 군현제 아래에서 통치를 하며, 한나라의 통치 상징물(구리 도장과 푸른 끈)을 쓰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혼란스럽다. 

필자는 오래전에 (여기서) 이 구절이 사실 친한파(親漢派)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한나라의 군현제 아래 다스리고, 한나라의 통치 상징물을 사용하는 락 관료를 묘사함으로써, 이 구절을 "동 선 머리사냥꾼" 중 일부가 결국 한나라의 현지 관료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위 구절에서 또다른 흥미로운 점은 락밭이 "조수(潮水)의 오르내림"을 이용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홍수(floodwaters)로 물이 불고 주는" 대신에 "바닷물의 조수간만"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든,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이 구절이 범람하는 물(floodwaters)을 이용한 벼 농사를 상징한다는 것이다.[3]

이게 왜 중요할까? 내가 여기서 언급했듯이, 리차드 오코너(Richard O’Connor)라는 인류학자가 주장하기를 동남아시아 내륙에서는 농작 유형의 대대적 전환이 일어났다. 범람하는 물을 이용한 농사가 관개수로로 물을 댄 벼 농사(irrigated wet-rice cultivation)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교주외역기의 유명한 구절은 우리에게 "동 선 머리사냥꾼"이었던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려줄 수 있다. 친한파가 되고 청동북 대신 구리 도장과 푸른 끈을 지위의 상징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리고 아마도 머리사냥도 그만둠으로써) 이들의 옛 상류문화는 새로운 상류문화로 대체된 것이다. 

그리고 범람 침수를 이용한 농사에서 관개수로로 물을 댄 벼 농사로 이전함으로써, 문화 일반의 많은 부분도 바뀌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많은 이들이 교주외역기의 위 구절을 인용해 "중국인"들이 오기 전부터 홍하 유역에는 "민족(nation)"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필자는 같은 구절이 실제로는 한 민족(a people)과 민족문화의 소멸이 임박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겠다.[4]

사회문화적 변화의 첫 조짐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동 선 머리사냥꾼"의 소멸로 이어진 것이다. 

이미지 출처는 gallica.bnf.fr /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이다. 

---------------------------------------------------------------------------------------------

[1] 반드시 합당한 주장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아래는 로마시대 폼페이의 벽화인데, 머리 형상은 모두 "가면"이라고 추정한다.
로마인들이 헤드헌팅을 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2] 아래 기록의 전문은 어우 락이라는 나라는 없어 참조.
수경주가 언급된 다른 글, 고대 홍하 유역의 뱀과 의복 문화도 있다.
 
[3]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중언부언 번역을 했다. 요약하자면, 바닷물(조수)의 밀물과 썰물을 이용한 농법이라는 직역과, 바닷물로 논농사를 했을리는 없으니 우기의 강의 범람을 이용한 농사라는 의역이 있다는 말이다. 

조선시대 "락-농업"의 사례는 적륜재의 관련 포스팅 참조!ㅋㅋ
(그 "락"이 아니잖아!)

[4] 비슷한 사례로는 영화 "장군의 아들" 시리즈를 들 수 있다. 김두한의 민족영웅 서사는 사실 민족말살정책이 절정에 치달으며 학도병이 황군으로 징집되어가는 1930,4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적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1000년 뒤 일제시대 관련 "사료"가 (일제시대로부터 고작 50년도 안 지난 시기에 만들어진!) 장군의 아들 비디오 테이프 밖에 없는 상황에서 역사 연구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김두한의 영웅서사만 제거해내면, 그 당시 사회-문화-경제의 중심지는 김두한의 주 활동무대인 "종로"가 아니라 본정과 황금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핑백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