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1930년을 전후한 두 인물의 기록 있잖아, 근대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의 "신여성 도착하다" 展 (이요 님의 전시 소개 포스팅)에서 마주친 의미심장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조선사회는 아직 인텔리 여성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외국어 교수 노릇을 하려고 애썼으나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서울 어느 학교에 교사로 취직하려다가 문부성에서 교원면허를 내주지 않아 그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나중에 어떤 신문사의 여기자로 입사하려고 운동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할 수 없이 낙원동에 있는 여자소비조합을 인계해서 사람의 왕래가 많은 서대문 밖 교남동 큰 거리에 자그마한 점포를 빌려서 장사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배추, 감자, 마른미역줄기, 미나리, 콩나물을 만지는 것이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 최영숙 양의 일상직업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자본이 없는 일개 구멍가게로 어떻게 한 집안 생활비가 나오리까. 오직 최영숙 양은 살을 깎는 듯한 경제적 곤란을 당하고 지냈을 뿐입니다.
(‘서전 경제학사 최영숙 양 일대기’, ‘삼천리’, 1932년 5월)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또다른 기록이 있더군요.

"(전략) 박촌(樸村) 박석윤(朴錫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라도 창평(昌平) 지주의 아들로 동경제국대학을 나온 수재인데, 경도(京都) 삼고(三高) 시대에는 조선인 유학생이면서도 명투수로 유명하여 일고(一高) 대 삼고(三高)의 야구시합 때에는 전 일본의 야구팬을 열광케 하였다. 그 후 영국에 유학하여 케임브리지대학을 나와 영어도 본격적인 소위 ‘킹스 잉글리쉬’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도 유명하였다. 
(...)
그리하여 사이토 총독이 일본의 전권대표로 제네바 군축회의에 갔을 때에는 런던에 있는 박석윤을 일부러 청해다가 조선의 대표적 인물로 사이토에게 소개하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28년 박촌이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 사이토는 쌍수를 들어 환영하면서, 무엇이고 총독부의 고관(高官) 자리를 하나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박촌은 꼭 소에지마 백작의 영향만은 아니겠지만, 장래 조선이 독립을 하자면 일보일보 전진하여 우선 자치를 해서 설사 일본이 패망하지 않더라도 독립할 기틀만은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총독부 관리가 되는 것을 거절하고, 자기는 자치운동에 헌신할 결심을 하였다. 그뿐 아니라, 일본의 관료제도는 제아무리 제국대학 출신이라 하더라도 ‘고문(高文)’ 시험에 합격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고등관이 될 수 없다는 철칙이 있어서 박촌에게 일약 높은 자리를 주는 것은 총독부 간부들이 모두 반대를 하므로 사이토 총독도 할 수 없이 이번에는 경성일보 사장 마쓰오카(松岡正男)를 불러다가, “박석윤과 같은 유위(有爲)한 인물을 놀게 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니, 신문사에 자리를 하나 만들어 주라,” 고 하였다.
 (후략)
(적륜 님의 모순의 인생, 중첩된 인격 포스팅에서 인용한 김을한, "한국신문사화" (탐구당, 1975) 中)

한국신문사화에 등장하는 박석윤에 대한 묘사는 "근대 엘리트談의 클리셰" 포스팅에서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요? 

적륜 님께서도 "이 이야기에는 전부 다 받아들이기에는 몇가지 팩트가 틀린 것이 있"다고 하셨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총독이 고관 자리를 제안했는데 본인이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다소 과장이 들어가있지 않나 싶습니다.

다만, 적륜 님의 포스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박석윤도 경성제대 교수 임용을 기대하고 유학을 다녀왔다가 고배를 마신 케이스지요. 그리고 그렇게 자리잡을 곳이 마땅치 못하자 신문사에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박석윤 본인이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제국 내 고위인사와 맺은 네트워크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봅니다.)

한편 최영숙은 귀국 후 반년 내로 사망합니다. 
삼천리의 신문기사는 "일대기"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부고기사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관의 "신여성 도착하다" 전을 아직 못보셨다면 적극 추천드립니다.
제가 지난 포스팅에서 소개드린적 있는 이유태의 "탐구"(1944)는 이번 전시의 대표작입니다.

(이 그림이 붙은 굿즈도 많아요...)

얼마전까지 1934년작이라고 설명이 붙어있었는데, 제가 문의해서 고쳐놓았으니 이미 보신 분은 또 보셔도 좋습니다!

덧글

  • 하니와 2018/02/09 05:51 # 삭제 답글

    최영숙이라... 혹시 인도에서 혼외자를 낳았다던 그 분인가요?
  • 하니와 2018/02/09 06:15 # 삭제 답글

    아, 링크 거신 기사 바로 뒤에 나오네요.
    ===================================
    핍박받는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념으로 스웨덴에서 5년 동안이나 공부하고 돌아온 최영숙에게 고국이 허락한 일자리는 고작 ‘콩나물장수’였다. 그나마 오래 할 수도 없었다. 귀국한 지 채 5개월도 지나지 않은 1932년 4월, 임신 중인 최영숙은 태아에 탈이 생겨 동대문부인병원에 입원했다. 인도청년 ‘미스터 로(Mr. Row)’와의 관계가 드러난 것은 그때였다. 산모의 생명이라도 구하고자 낙태수술을 받았지만 병세는 나빠져만 갔다. 마지막 희망을 품고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계속했지만 악화되는 병세를 돌이킬 수 없었다. 4월23일 오전 11시, 최영숙은 홍파동 자택에서 27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스웨덴에서 돌아온 최영숙이 조선을 위해 일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을 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영숙이 홍제원 화장장에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 이후에야, 사람들은 그에게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 쏟아진 관심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요절한 인텔리 여성을 향한 안타까움의 표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단지, 스웨덴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 여성이 무슨 까닭으로 인도에서 ‘혼혈 사생아’를 임신하고 돌아왔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

    왜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을지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네요.
  • 남중생 2018/02/09 08:57 #

    최영숙의 쓸쓸한 죽음은 서양 도깨비에게 홀리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안아키스트가 1932년 조선에 많았다는 반증이겠죠. ㅠㅠ 지금은 얼마나 다른가 모르겠습니다...
  • 이글루스 알리미 2018/07/25 08:24 # 답글

    안녕하세요, 이글루스입니다.

    회원님의 소중한 포스팅이 7월 25일 줌(http://zum.com) 메인의 [허브줌 컬처] 영역에 게재되었습니다.

    줌 메인 게재를 축하드리며, 게재된 회원님의 포스팅을 확인해 보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남중생 2018/07/25 20:09 #

    감사합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