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박지원이 바라던 유통 인프라, 그리고 뜻밖의 커넥션 창작물의 원형을 찾아서~


박지원이 바라던 유통 인프라, 그리고 뜻밖의 커넥션


제가 열하일기에서 특히 좋아하는 글귀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영남(嶺南) 어린이들은 새우젓을 모르고, 관동(關東) 백성들은 아가위를 절여서 장 대신 쓰고, 서북(西北) 사람들은 감과 감자(柑子)의 맛을 분간하지 못하며, 바닷가 사람들은 새우나 정어리를 거름으로 밭에 내건만 서울에서는 한 웅큼에 한 푼씩 하니 이렇게 귀함은 무슨 까닭일까." 

▲열하일기, 일신수필 중 거제(車制) 


나라 한켠에서는 새우젓이 뭔지도 모르는데 다른 한 구석에서는 새우와 정어리를 비료로 쓰면서 음식물쓰레기 취급한다는게 인상적이죠...;;

발에 채일 정도로 차고 넘친다는 의미를 과장해서 "거름으로 밭에 낸다"고 쓴걸까... 싶었는데, 3년 전 적륜 님의 "魚油(어유)와 商人(상인)들" 포스팅을 읽고 말끔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질소와 단백질 성분의 잔류물은 일본에서 비료로 사용된다, 일본 국내에서는 수요를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수천톤의 생선 잔류물이 ‘코리아’에서부터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들어온다."
▲1920년 독일 교과서에 실린 조선의 정어리 잔류물(Rückstände) 이야기!

네, 실제로 일본이나 조선에서는 정어리를 포함한 해산물 찌꺼기를 비료로 썼군요.

역사관심 님 덕분에 알게 된 19세기 오주연문장전산고 기록에는 멸치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멸치는 한 그물로 만선하는데 어민이 즉시 말리지 못하면 썩으므로 남은 것은 거름으로 사용한다."


▲썸네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없으면 허전하니까... 마침 오늘 읽은 기사에서!

그렇다면, 문장의 머리와 꼬리를 장식하는 새우(젓)와 정어리는 해결되었겠다... 나머지 이야기들도 당대 현실을 반영한 표현일까요?

예컨대 감과 감자(柑子)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서북사람들 말이죠...
이건 제가 번역에 불만이 많습니다.

설령 "감자"에 괄호치고 한자를 달아놓았더라도, 현대 독자가 저걸 한자로 읽고 어떤 식물을 말하는건지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감자는 potato가 아니라 귤이에요. 그냥 귤.

원문에는 "의 맛을 분간하지 못한다"고 써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번역을 한 소용이 없죠...
만약 (언어유희의 귀재인) 연암 박지원 선생님이 감(柿)과 감(柑)의 발음을 갖고 농담한거라고 판단했다면,
"감귤의 맛을 분간하지 못한다"라고 번역했을 수도 있을겁니다.

고전db에 올라와있는 많은 자료들이 감자라고 쓰고 있어서, 참 아쉬움이 많습니다.
제주도 특산물로 올라오는 감자...
일본 감자를 나눠먹는 아메노모리 호슈와 조선통신사...


네, 뭐 답답한 감자 이야기는 이만큼 했으면 됐고, 
사실 오늘 포스팅은 바로 "관동(關東) 백성들은 아가위를 절여서 장 대신 쓰고" 부분 때문에 쓰게 되었습니다.

1780년 연행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위 내용이, 사실은 보다 이른 기록에도 나옵니다.
취직을 못해서 강원도 인제로 떠나는 (군입대가 아닙니다) 친구에게 박지원이 써준 글인데요.

이제 영숙이 기린협에 살겠다며 송아지를 등에 지고 들어가 그걸 키워 밭을 갈 작정이고, 된장도 없어 아가위나 담가서 장을 만들어 먹겠다고 한다. (今永叔將居麒麟也。負犢而入。長而耕之。食無䀋豉。沈樝梨而爲醬。)


이 백영숙이라는 친구가 누구냐하면, 바로 백동수입니다.
네, 무사 백동수요. 연암 그룹의 머슬을 담당했죠.

"1773년에 가족과 함께 강원도 기린협(, 지금의 강원도 인제)에 은거하여 농사를 지으며 무예를 연마하였다."
(두산백과, 백동수 항목)

백동수가 기린협으로 이사간 건 1773년!

그러니까 박지원이 연행길을 나서기 7년 전에 쓴 글이네요.
한국고전종합DB 내에서 아가위로 장을 담근다는 내용은 박지원의 두 기록 빼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가위를 절여서 장 대신 쓰는" 관동 백성들의 이미지는 그 당시 조선인이 관동에 대해 흔히 갖고 있는 이미지였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능력있는 친구가 잘 쓰이지 못하는 걸 보고 안타까워 하는 박지원의 마음이 크게 반영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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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더 발달된 물류로 전국 시장의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 지역과 거리에 따른 가격 장벽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 조선의 박지원이 있는가 하면...

동시대에 현해탄 건너편에서는 번화함과 물류유통이 건강과 수명에 부정적이라고 주장한 의사, 타치바나 난케이가 있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은 고기로 허기를 채우고밥 대신으로도 생선을 먹고배의 드나듦이 있어 여러 지방의 조운이 원활하니밥은 그 쌀이 자유로운 까닭에, (...) 배로써 왕래하는 것이 편안하여생선과 소금의 이익이 풍부하니자연히 몸도 편해져서 식도락하며 지내는 고로몸이 병들어 단명한다

또한 더더욱이산 속은 사람의 왕래가 부자유해서쓸쓸하고 질박하니매춘부나 유녀도 없고, 매이 전염될 걱정도 없다바닷가는 어디서든지 모든 지방으로 길이 잘 통하니, 북적이고 화려해서 유녀가 없는 곳이 없고사람 마다 매독을 옮겨서, (...) 아무리 태생이 건장하다고 하더라도단명병신(短命病身)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맞지 않는다이것이 산 속과 바닷가의 수요(寿妖)의 차이의 근본이다

나가사키는 고기가 많기로 천하제일이라야채류보다도 저렴할 정도이니사람들이 모두 매일 고기로 만나서 허기를 채우고또 예로부터중국인이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배워어떤 고기라도 기름에 튀겨서깊은 맛을 내서 먹는다게다가 금은의 이윤(通利) 각별히 좋아서사람들이 모두 환락하며 살아간다. 그런 고로 밤낮으로 오로지 먹고 마시는 것만을 낙으로 삼아몸을 움직여 기혈을 돌게 하는 일이 없다이는 모두 종양 류가 많아지는 근본이다교토는사람 모두 가업에 전문적으로 종사하고몸을 움직여 일하며바다가 없는 지방이니어육이 각별히 값비싼 재료라서빈천한 자는 구하기 어렵다고로 다른 지방과 다르고평소에 검소하게 먹는다옹정의 류가 적은 까닭이다그렇지만번화한 땅인 까닭에 매독의 걱정은 나날이 늘어나고귀천(貴賤)할 것 없이 병에 걸리는 자가 없는 데에 가깝다혹시 보양을 바란다면, 교토 지방도 장수를 얻을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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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흑범 2018/03/02 10:47 # 답글

    여당인 노론의 당원인데도 비주류라는 이유로... 노론 내 큰 3대 계파인 벽파도 아니고 시파도 아니고 청명당도 아닌 단지 비주류라는 이유로 기피되고 반쯤 배척된게 아쉽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보고 동병상련을 느낀 것은 아닐까요???
  • 남중생 2018/05/03 17:52 #

    백동수에게 증정한 서문(동일한 글)에, 백동수가 박지원의 연암협 집터를 찾아준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기린협에 들어간 백동수와, 연암협에 은거한 박지원... 동질감을 느꼈을 만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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