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1945년 베트남에서 놓친 기회, 또는 기회주의? 인도차이나 ~Indochine~

파리 13구님의 [45년] 호치민은 미국의 OSS 요원이었는가?을 읽고나니 생각나는 글이 있었습니다.

과거의 호치민이 뭐라고라???에서 한 번 소개드린 바 있는 하와이 주립대학 Liam Kelley교수님 블로그에서
A Lost Opportunity or Opportunism in 1945 Vietnam
을 번역/소개해보렵니다.


"바로 여기서 "잃어버린 기회"라는 주장이 해체된다고 생각한다. 1945년에는 기회가 형성될 수 있는 너무나도 많은 이해관계와 안건이 모든 방면으로 있었다. 이는 기회주의가 만연할 수 있는 환경이었던 반면, 기회를 확보하기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한편 기억이란 과거의 다양한 목소리와 이해관계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기억 또한 결국 기회주의적인 것이다."


=========================================================================================
1945년 베트남에서 놓친 기회, 혹은 기회주의?


많이 들리는 주장 중 하나로 트루먼 대통령이 베트남 독립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호치민의 편지에 대답을 안 함으로써 미국이 1945년에 기회를 잃었다는 주장이 있다. 

미국 정부가 호치민이 공산주의자보다는 민족주의자에 가까웠다는 점만 이해하고 베트남 독립을 지원했더라면. 그 시점 이후에 일어난 모든 것이 달라졌으리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특별히 연관이 있는 인물은 1945년 베트남에서 활동한 OSS(미국 전략정보국) 요원, 아르키메데스 패티(Archimedes Patti)다. 패티는 1980년에 책(Why Viet Nam? Prelude to America's Albatross)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그는 위 주장을 매우 강하게 펼친다. 



이 주장은 베트남에서 펼쳐지는 담론에도 들어있다. 예를 들자면, 혁명가이자 역사가인 故 쩐 반 저우(Trần Văn Giàu)가 "Pacific Century: From the Barrel of a Gun"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4:00):




"미국이 지원해주리라는 호치민의 믿음에는 논리적 근거가 있었습니다. 요점은 호치민이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고 싶어한다는 것이 아니었거든요. 주안점은 독립, 자유, 민주주의였지, 공산화된 베트남이 아녔죠. (우선 이걸 성취하고) 그 다음에 공산주의는 어떻게 할지 두고보자...(는 심산이었습니다)"[1]

지난 15년간, 학자들은 이 주장과 맞서 싸워왔다. 예컨대, 마크 필립 브래들리(Mark Philip Bradley)라는 역사가는 저서 "Imagining Vietnam & America: The Making of Postcolonial Vietnam, 1919-1950"에서 패티가 1980년에 기억한 내용과 1945년에 쓴 내용 이 상당히 차이가 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1980년에 패티는 1945년 8월 27일에 있었던 장 생트니(Jean Sainteny)와 보 응웬 잡(Võ Nguyên Giáp)의 회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문명적으로 보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트니는 보 응웬 잡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부모처럼 훈계하는 어조로 분위기를 깔았다 ... 보 응웬 잡은 빈틈없는 절제력을 발휘하며 완벽한 프랑스어로, 자신은 훈계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2]... 생트니는 난생처음으로 프랑스인을 상대로 자기주장을 펼치는 베트남인과 대면한 것이었다 ... 생트니는 한 수 졌을 뿐만 아니라 화가 난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134)

그러나 1945년 당시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시작부터 프랑스인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했으며 안남인(Annamites)들은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입지를 빼앗겼는데, 주로 유럽인을 대할 때의 열등감 때문이었다." (135)

또한 다른 학자들은 쩐 반 저우의 주장과 달리, (호치민이) 공산주의를 두고보는 기간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3] 


어찌 되었건, 사람의 기억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가? 1945년 베트남에는 미국을 위한 기회가 있었을까?

미국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 있었다. 예컨대 1945년 8월 22일, OSS 국장 윌리언 도노반(William Donovan)[4]은 (중국) 쿤밍에서 활동하는 OSS 요원이 제출한 정보를 국무장관에게로 전송했다. 이 요원은 "중국 국민당 베트남 지부(Annamite Kuomintang Party in China)의 지도자이자 하노이 중앙 해방 위원회(Central Liberation Committee in Hanoi) 직속 대표"의 말을 인용했다:

"중앙 위원회는 미국 정부에게 인도-차이나 인민은 무엇보다 인도-차이나 독립을 갈망한다는 것을 알리고자 합니다. 또한 인도-차이나 인민은 민주주의의 챔피언인 미국이 인도-차이나가 독립을 확보하는데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1) 프랑스 세력이 인도-차이나에 발을 들이는 것을 금지하거나 지원하지 않는 것; (2) 약탈과 도난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중국 세력을 제어하는 것; (3) 인도-차이나 인민이 천연자원(the resources of the land)을 활용할 수 있도록 기술 고문을 보내는 것; (4) 인도-차이나가 지속해나 갈 수 있는 산업을 개발해주는 것."

"결론적으로, 인도-차이나 인민은 무기한으로 필리핀과 같은 상태에 놓이기를 원합니다."


또한 후잉 반 코아(Huỳnh Văn Khoa?)[5]의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후잉 반 코아는 1945년 7월에 베를린에 살고 있었는데 미국과 인도차이나 간의 협력 제안(Vorschläge für eine Zusammenarbeit zwischen Amerika und Indochina)인도차이나 경제(Die Wirtschaft Indochinas)라는 두 편의 문서를 독일어로 작성했다.

1945년 10월 29일 후잉 반 코아는 두 문서의 영문본을 완성한다. 정확한 번역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영어 문서는 덜 완성되어있지만, "미국과 인도차이나 간의 협력 제안" 문서의 제목이 "인도차이나의 숙명(Indo-China's destiny)"라고 된 것을 볼 때 더 낙관적인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후잉 반 코아가 생각한 인도차이나의 숙명이란 정확히 어떤 것이었을까? 후잉 반 코아가 미국으로 가서, 미국 여권을 발부받고, 미국의 영향력있는 은행의 도움을 통해, 인도차이나에 최초의 미국 은행을 설립하고는 "'인도-차이나' 미국 수출입 회사" 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후잉 반 코아는 당시 베를린에 있는 인도차이나 학생들을 함께 데려가는 것도 제안했다. 이들은 "유럽에 있는 최고 수준의 인도-차이나 학생들"이며 그에 의하면 "이들이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후잉 반 코아는 이 학생들이 훗날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을 위한 프로파간다"를 만드는 작업을 맡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또한 필자가 이전에 언급했듯이, 2차대전 당시 미군에 입대한 프랑스 거주 베트남 남성도 비슷한 편지를 쓴 바 있다.

그러므로 1945년에는 미국 정부에게 편지로 "기회"를 제공한 베트남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품은 미래에 대한 욕망은 모두 달랐다. 게다가 내가 여기서 언급한 사람들은 당시 베트남에 있었던 다양한 미래상의 작은 표본을 대변할 뿐이다.

바로 여기서 "잃어버린 기회"라는 주장이 해체된다고 생각한다. 1945년에는 기회가 형성될 수 있는 너무나도 많은 이해관계와 안건이 모든 방면으로 있었다. 이는 기회주의가 만연할 수 있는 환경이었던 반면, 기회를 확보하기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한편 기억이란 과거의 다양한 목소리와 이해관계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기억 또한 결국 기회주의적인 것이다.[6]

==========================================================================================
[1] 이 말은 영어 나레이션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다소 어색하다. 맥락 상 "호치민의 목적은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호치민의) 주안점은 독립, 자유, 민주주의였지, 공산화된 베트남이 아니었다."라고 번역하는게 맞아 보인다.

[2] "프랑스인 보다 불어를, 일본인 보다 일어를 더 잘하는" 인물묘사에 대해서는 근대 엘리트談의 클리셰 참조.
 
[3] 다시 말해, 얼마 안 가서 공산주의 정책을 강하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4] 1945년 8월 김구 임정 주석이 도노번 국장과 광복군의 국내 진입 작전을 합의한 뒤 나오고 있다. (출처)
 
[5] 독일어/영어 알파벳으로만 이름이 남아있기 때문에 성조까지 정확한 베트남어 이름을 고증할 수 없다.

[6]
게시글 원문 맨밑에는 사료들을 볼 수 있는 링크가 있다.


핑백

덧글

  • 함부르거 2018/01/22 11:00 # 답글

    요약하자면 '호치민이 그렇게 클 줄 누가 알았겠냐'군요. ^^;;;

    1945년의 시점에선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제각각의 경로로 미국에 접근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지 사정을 모르는 미국인들이 누굴 선택해서 파트너로 삼는다는 발상 자체가 어려웠겠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정책 판단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겠지요.
  • 남중생 2018/01/22 18:07 #

    말씀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호치민이 대빵이 되었으니 호치민만 어떻게 하면...이라는 발상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분명 현실에서는 그거보다 훨씬 복잡한
    조직/사회에서 살면서 왜 역사를 대할 때는 그렇게 명료하고 단순해지는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댓글 입력 영역